미국이 아니었다면 한방이는 살아 있었을까

피 한방울 안흘리던 중기유산의 기억

by 후이빈

** 사실적인 유산묘사가 있어 읽기에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2012년 봄 결혼후 7년만에 임신을 했다. 박사유학생활을 마치고 새로 잡은 직장때문에 이주한지 몇 달 안되서였다. 아이는 별로 관심도 욕심도 없이 살았는데 먼 바람인지 슬슬 아기 생각이 났다.

그때만 해도 나의 체력과 건강에 대해 자신있었으므로 몇년씩 불임인 커플이나 아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일은 나와 아주 멀리 있는 특정집단의 이야기라고 자만했었다. 마음먹지않아 그렇지 임신도 한방에 되잖아? 이러면서 앞으로 술못먹겠네 하는 순진한 염려만.. 당연히 임신 사실을 한국에 전화로 알리고 안그래도 결혼후 오년이 넘게 임신소식없는 우리를 염려하던 엄마아빠는 잘되었다며 한국에서 미국으로 날아오셨다.

임신한지 삼십년이 넘은 우리엄마는 그 사이의 세월의 간극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나를 당신이 임신했던 시기로 소환해 이런저런 지침을 내리며 행복해했던것같다. 너무 누워있으면 안되니 수영이라도 배우자. 운동해야하니 밥먹고 나가자.. 커피는 절대 안된다 디카프는 카페인이 거의 없다고 말해도 콧등으로 흘려버리고 나는 임신선배의 기세에 눌려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입덧은 있었으나 즐거웠고 입덧이 심할수록 애가 건강하네 어쩌네 엄마는 입덧이고 뭐고 기억도 안난다며 나중에 애낳을때 고통에 비하면 세발의 피도 안된다는 스몰토크도 나눠가며 마의 1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별 생각없이 배정되는 의사를 만나 별 특별할 것없는 조언을 듣고 한달뒤에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무슨 병원이 촘파도 잘 안하고 손으로만 만져보냐며 역시 미국은 의료저질이라는 시덥잖은 농담을 나눴다. 그후 교통사고와 같이 순식간에 일어났던 유산의 17주 이전까지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충격에 지워진 것이 아닐까.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우리는 전날 일요일에 이제는 조심해야할 기간이 좀 지났으니 좋은데 엄마구경도 시켜드릴겸 나가보자며 일본정원에 다녀왔더랬다. 아기자기하고 잘 가꾸어진 영화세팅장같은 정원에서 쫄쫄쫄 솟아나오는 식수는 먹으면 장수할 것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아래층 수지 할머니는 말이 안통하는것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않고 친화력을 발휘하시는 모친과 친해져서 같이 오전티타임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초기 생리통같은 느낌. 배가 땡기는 건가. 어젯밤에 간이 센걸 먹었나. 설사할거같아. 엄마한테 말하니 누워있으면 괜찮아질거야 할머니는 담에 내려가지뭐. 임신중에는 배가 많이 땡긴다던데 그건 후기 아니었나? 벌써 땡기기도 하나? 별스럽지 않은 생각들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가만히 누워 있는데 삼십분이 지나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고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배가 계속 아파.. 왜 그러지? 병원에 전화를 한번 해봐야겠어. 미국 산부인과 시스템이 어떤지 처음 겪어보던 나는 시키는 대로 사람이 받지않는 병원자동응답기에 배가 아프다는 메세지를 남겼고 나를 직접 본 적도 없는 당직간호사의 전화를 받아 통화를 했다. 그것도 두번이나. 배가 아픈데요 라고 말하는 나에게 간호사는 통증의 강도를 물었고 나는 심한 생리통정도라고 말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좀 누워있어보세요 통증이 더 심해지면 다시 전화하세요. 전하기너머의 간호사는 아주 친절했지만 나의 마음도 나의 통증도 진정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않았다. 이럴거면 왜 전화를 한 거지 라는 생각이 들며 따뜻한 샤워를 하면 나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튼지 몇분 되지않아 갑작스러운 통증과 함께 뭔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건 뭐지? 설마 싶어 아래를 만져보니 풍선같은 무언가가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고 몇 초간 별의 별 생각이 다 스쳤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겪는 나로서는 이게 아기집이라는것을 생각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온 몸이 오싹하면서 머리속이 하애지고 엄청난 두려움이 나를 순식간에 지배하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를 미친듯이 부르자 엄마가 뛰어오셨고 나는 엄마를 보며 외쳤다. 엄마 이상해 뭔가 밑으로 나오고 있어! 나는 이미 울며 나오는 아기집을 본능적으로 손으로 억지로 막아보려했다. 그런 나의 몸부림을 비웃듯 아기집은 무서운 속도로 나오고 있었고 나는 엄마 뭐가 나와! 뭐가 나와! 어떡해! 막을수가 없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임산부 딸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엄마는 출근한 오빠핸드폰으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고 그때쯤 이미 나는 욕실 바닥에 누워 이미 순식간에 나와버린 아기집을 쳐다볼 생각조차 못한채 그저 누워서 사시나무떨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다음의 기억. 집에 오고 내옆에 911에 전화하던 오빠의 목소리. 친절했던 911 여자대원의 손길. 차갑던 내화장실 바닥. 구급차 침대에서 부터 병원침대까지 새로 깐 듯한 시트의 까끌한 감촉.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하지 못하던 내 마음. 모든 일은 삼십분이 채 되지 않아 일어났고 피한방울 한방울 새지않은 내 몸은 아기집이 나온뒤 아무렇지도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처음보는 남자 의사가 아기는 죽었고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알수 없으며 아기는 문제가 없어보인다고 했을때 물었다. 그럼 제 문제일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한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시도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의사는 알수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기를 보시겠어요? 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고개를 저으며 눈물이 쏟아졌다. 병실 한쪽 구석에 작은 탁자에 아기가 누워있는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용기가 나지않았기 때문이다. 얼마후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 이봐 요 . 저는 많은 산모들과 유산을 겪어본 간호사에요. 제 경험을 말씀드릴게요. 아이를 잃은 많은 산모들에게 마지막으로 아기를 보겠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안 보겠다고 이야기해요. 무섭지요. 하지만 아기를 보지않고 돌아간 많은 산모들이 사실은 더 힘들어한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힘들었던 그 날의 일을 상상하고 악몽을 꿔요. 아기들의 모습도 실제와 다르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모습으로 상상하고 기억하게 되지요. 그게 산모를 더 괴롭게 한답니다. 지금 아기를 보는 것이 힘든일이겠지만 나중에 더 힘들게 기억하지는 않게 도움이 될 거에요. 저를 믿으세요."


간호사의 눈을 보며 나는 그럼 아기를 볼게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무서웠다. 내 뱃속에 나온 죽은 아기라니.. 간호사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시체는 자는 것같은 작은 아기였다. 이미 신체부위가 다 형성된 16주의 아주 작은 아기가. 손가락도 발가락도 모두 열 개인 아기가. 한방이라고 이름붙이고 인격화시켜 대화를 하던 내 뱃속의 생명체. 아기는 평화로워보였다. 고통에 힘들어하며 죽지않았을까 하던 나의 상상력과 달리 잡지에서 보던 아기의 순수한 느낌 그것이상은 없었다. 나는 이제 그 간호사가 나에게 제안해준 것을 감사한다. 그분말대로 나는 그 날의 일을 생각할때 몹쓸 상상력을 발휘해 나를 괴롭히길 자주했다. 자책하고 싶을 때 한방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충격과 좌절감, 자책이 섞여 소용돌이 치던 그 어둠에서 한 발짝도 걸음을 떼어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주변에 존재했던 모든 사물과 일련의 사건들이 악마의 장난처럼 느껴지고 공포로 소름돋던 어느 영화대본을 혼자 각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기는 괴로운 표정으로 피를 묻히고 나에게 간절한 눈빛을 하고 쳐다본다거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알수없는 원인으로 유산을 반복하는 망상들이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내가 보았던 마지막 한방이의 모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슬픔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방이를 보여준 간호사가 나간뒤에 병원직원이 찾아와 한방이의 장례절차를 알려주는 브로셔를 나에게 건넸다. 아기가 이미 신체가 완성되고 어느정도 큰 후에 유산되었으므로 비슷한 경우의 다른 아기들과 함께 병원에서 관리하는 캘버리 공동묘지에 함꼐 화장하여 뿌려준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눈물을 흘린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뜨겁게 눈물이 되어 흐르는데 나는 이것이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잘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꺠닫는 것은 한 생명을 품고 잃는 기억은 각색되고 옅어지는 다른 기억들보다 끈질기게 뿌리내려 어느새 내 자아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 아픔이 사라지지않고 어느새 익숙해지는 흉터같은...


아파트 화장실 차가운 바닥에서 시작된 나의 유산과정은 당일날 늦은 저녁 하룻밤 입원을 권유하는 의사의 의견을 거절한채 집으로 다시 돌아옴으로 채 하루가 안되는 시간안에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순식간에 임신전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나는 아기집이 나온 그 순간부터 아무런 통증도 후유증도 없는 심정적으로 고약한? 신체정상상태였다. 보통 그런 유산의 경우에 많은 출혈이 동반되어 위험해질 수 있으나 나는 양수는 커녕 피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혹시 남았을 태반이나 후처치 또한 필요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자연분만한 성공적인? 산모였다. 모든 것이 야속했다. 나는 왜 이렇게 멀쩡하며 그 동안 아기만을 생각하며 나의 자아는 내팽겨쳤던 지난 4개월은 바람에 날아가는 깃털마냥 순식간에 사라진 것일까. 나는 누구에게 한탄해야하며 왜 이런일이 일어난건지 왜 아무도 모른는 걸까. 유산며칠후 만난 담당의사 Stall 은 누구도 예상하지못한 일이라는 멘트를 먼저 날리면서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미국에서 의사나 병원에 거는 소송의 위력을 일찌감치 들어온 나는 그런 의사의 모습이 약간은 비겁해보였다. 오빠와 나는 충격으로 가득차 있었고 유산의 이유를 아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으므로 얼굴이 달아올라 화가 섞인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어떤 의사였어도 Stall 보다 더 나은 대답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기검진은 큰 문제가 없었고 초산의 경우 산모가 건강하고 별다른 검사결과(물론 미국은 초음파는 ㄱ커녕 의사인가 산파인가 헷갈릴 정도로 그저 배만 만져보고 끝나는 검진이었다.)없이는 의사와 농담따먹기정도로 끝나는 정기검진이 다수이고 그마저도 4주에 한번이었다. 나중의 밝혀진 나의 유산이유는 자궁경부무력증이었는데 자가증상이나 검진시 발견하기 힘들며 유전도 아니고 질초음파를 통해 자궁경부길이를 매번 재보아야 알 수 있는 드문 병?이다. 대부분은 아이를 유산하고 나서야 알게 되며 한국처럼 세밀하게? 자주 초음파를 비롯한 검진을 하는 경우에 간혹 일찍 발견되어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아주 밥맛없는 이슈다. 가장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었다. STALL 은 흥분한 오빠의 감정상태를 강조해서 차후면담을 보고 함으로써 오빠의 이성을 더 잃게 만들었지만 감염전문의사를 소개시켜주었고 그 의사를 통해 여러 유산 가능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감염을 가능성높은 원인으로 추측하는 의사에게서도 속시원한 원인확답을 듣지 못했으므로 그 후로도 한참동안 나는 기본적인 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감염이 원인이라면 알수 없는 어떤 경로로 자궁에 세균이 침임하게 되었으며 나의 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균덩어리로 인식한 아기집을 밀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감염상태라면 바로 임신을 하는 것은 위험하니 앞으로 최소한 일년은 임신을 하지 말라는 권유도 잊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후 시누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한국이었다면 유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엎지른 물을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한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했다. 처음엔 왜 미국에 살고 있나 원망했고 그 다음엔 아쉬움으로 17년을 미국에 살고 있는 지금은 궁금하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한방이는 살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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