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티 Oct 19. 2024

인육

사가와 잇세이

아민 마이베스

제프리 다머

알프레드 피쉬

니콜라이 쥬마갈라에프

한성현


“아, 한성현은 나야.”


난 그녀를 향해 윙크했다. 만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통성명을 하지 못하다니. 어차피 그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물 건너 간 일이지만.

난 깨끗하게 절단된 그녀의 머리를 들어 입맞추었다. 아직 온기가 약간 남은 입술은 핏기가 빠져나가 파리했다.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난 그녀의 파우치를 뒤적거려 루즈를 찾아내 그 입술을 예쁘게 칠해주었다. 이 정도면 애프터 서비스로는 적당할 것이다.

가만 보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난 그녀의 입에 십만 원짜리 수표를 물렸다. 눈은 진작에 감겨 놓았기 때문에, 머리만 삭발시켜 놓는다면 돼지머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난 거기에 대고 진지하게 기도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가와 잇세이 님.”


유명한 인육 섭취자이자 내 대선배 중 한 사람을 향해 난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아직 살아있는 양반이었지만 뭐 어떠랴. 오히려 다른 선배들처럼 비참하게 감옥 안에서 최후를 마친 게 아니라, 베스트셀러까지 내면서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본받을 점이 크다.

식사 기도를 마친 나는 소장하고 있던 칼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독일 헹켈 사에서 만들어진 280만원짜리 칼부터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자를 때 쓰는 칼까지 모두 여덟 종류였다. 물론 정육점에서 쓰는 고기 절단기나 송곳 등은 작업실 저편에 설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해체부터 요리까지를 모두 나 혼자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할 순 없잖아? 아무리 우리 그룹 사람들이 내 발가락을 핥으려고 애쓴다 해도, 내가 여자 시체를 낑낑대며 썰어대는 모습을 본다면 발가락을 깨물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조리 준비를 마친 나는 최종적인 점검을 하기로 했다.

오늘의 재료는 19세 여고생. 갓 잡아 신선하고, 핏물이 아직 덜 빠진 상태이다. 체형은 약간 살이 붙은 편이지만, 쓸데없이 근육이 붙은 것보단 이 편이 더 상급이라 생각한다. 난 로리콘이 아니기 때문에 여고생의 벗은 몸을 봐도 별로 성적인 매력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선 20세 이하 여자는 먹이, 그 이상은 정상적인 성인 여성이니까. 20세란 기준은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첫 사냥감이자 포획에 실패했던 최초의 여자가 스무 살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해줄 것이다. 스무 살의 여자란 도라에몽 같은 존재라서, 가방 안에서 스프레이니 스턴건이니 너클이니 하는 것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여고생은 가방 안에 참고서와 콘돔밖에 없으니 얼마나 은총스러운 먹잇감인가.


“그나저나 자판기 콘돔이라니. 이런 싸구려 말고 돈 좀 모아서 스킨레스 정도는 사야 할 것 아니냐.”


저쪽에 놓은 머리를 향해 난 탄식했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소위 커플샷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자친구가 어떤 녀석인지, 아니 애당초 남자친구가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곧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한 후 난 작업을 개시했다.


1. 먼저 핏물이 모두 빠졌는지 확인한다

2. 확인 후 배를 가른다

3. 내장을 제거한다(버린다는 건 아니다)

4. 부위별로 토막낸다

5.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 말고 인육을 먹는 사람이 또 늘어나는 걸 원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인육을 먹는 것은 내가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날 남들과 차별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다. 재벌 2세라고 해서 맘에 내키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금기를 깨고, 정말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사실 동기 자체는 그냥 어쩌다 죽인 창녀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발상의 전환을 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딘가에는 인육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다고도 들었지만, 나처럼 직접 재료를 조달해 먹는 타입은 방금 언급한 선배들 외엔 찾기 힘들 것이다. 난 그 사실에 만족하고, 나 같은 사람이 더 없기를 바란다.

어쨌든 말로 하자면 조리책 두 권 분량의 설명이 들어갈 만한 대작업을 뚝딱 해치우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처음보단 나은 편이었다. 처음으로 이 작업실에 여중생을 납치해 왔을 땐 해체에만 이틀이 걸렸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서류들과 씨름하고, 퇴근하자마자 작업실에 와 해체에 몰두하느라 코피를 흘렸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지금은 한나절이면 얼추 얼기설기 토막내는 것까진 가능하다.

이때까지의 내 인생은 적당히만 해도 아버지의 후광이 모든 걸 해결해 주었지만, 처음으로 해체를 완료한 순간만큼은 내 스스로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몇 년 간 반응이 없던 내 물건이 거세게 요동쳤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날 밤은 모처럼 제대로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 내가 세상을 먹는 여자와 안는 여자로 구분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난 해체를 완료하고 고기를 대충 양념에 쟀다. 인육은 특유의 풍미가 있긴 하지만 날로 먹을 만한 건 아니다. 양념에 재지 않으면 어떤 요리를 해도 누린내가 나기 때문에, 최소한 두어 시간 정도는 이렇게 재 주어야 한다. 이어서 특별히 비싼 돈 주고 구입한 특제 환풍기를 돌려 냄새를 뺐다. 이렇게만 보면 작업 완료 같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여기저기 튄 살점들과 남은 찌꺼기들의 청소였다. 이미 충분히 피곤한 터라 당장 청소를 할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보통 요리란 건 자기가 차려서 먹을 때까진 맛있지만, 그 뒤의 설거지를 생각하면 얼마나 골치아픈가. 난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지만, 그 느낌만은 잘 알 것 같다.

그래서 난 오늘만은 편법을 쓰기로 했다.


어이, 묶은 거랑 재갈 풀어줄 테니 이거 좀 치워봐.”


구석에서 16비트 정도의 박자로 떨고 있던 노숙자 소녀에게 난 책임을 떠넘겼다.

긴 머리가 아니었다면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을 한 소녀였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형편없는 청바지를 입은 걸 보면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은 듯한데, 어쩌면 가출한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떡진 머리를 하고 앉아 있는 걸 보니 입맛이 뚝 떨어진다. 도무지 먹을 맘은 나지 않지만, 마침 내가 여고생을 잡는 걸 저 녀석이 목격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잡아온 터였다. 내 작업과정을 잘 보라는 뜻에서 눈가리개는 하지 않았지만, 재미없게도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내가 재갈을 풀어주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급하게 말했다.


“날, 날 어서 풀어줘요! 안 그러면 큰일나요!”

“여기로 잡혀온 후의 첫 마디가 살려달라는 말이 아니니 가산점을 주겠어. 플러스 오 점. 그런데 큰일난다니, 아가씨 아빠가 경찰청장이라도 되나?”

“농담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내 몸엔 세균이 있어요! 날 먹으면 당신도 병에 걸릴 거예요!”

“잘 익혀 먹으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혹시 알아? 아가씨가 여길 잘 청소해 주면 아가씨를 놔 줄지. 사실 아가씨가 너무 더러워서, 저 여고생처럼 확 잡아먹을 생각은 거의 없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


그때 갑자기 지하실의 철문이 쾅 하고 울렸다. 난 깜짝 놀라 철문을 쳐다보았다.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쾅쾅쾅, 하고 누군가가 문을 계속 두드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난 분명 문을 세 겹으로 걸어잠근 자택의 지하실 안에 있었다. 어떤 사람도 내 허락 없이는 문지방조차 밟기 힘든데, 대체 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작자는 뭐란 말인가?


“누구야, 너!”


넌지 네놈들인지는 몰라도 감히 내 집을 쳐들어왔다는 게 미칠 정도로 화가 나 난 있는 힘껏 외쳤다. 하지만 대답 대신 철문이 우지끈 하며 찌그러졌다. 해머라도 가져온 걸까? 난 급히 저놈을 찔러 죽일 부엌칼을 고르다가 갑자기 말이 없어진 소녀가 신경쓰여 흘끔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소녀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눈을 뜨고 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의문을 가져도 좋았겠지만, 거듭되는 굉음이 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혹시 짭새일까? 하지만 짭새가 이렇게 신속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이 동네의 짭새는 모두 아버지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에, 설령 내 작업의 정체를 눈치챘다 해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정년까지 무사히 자리 지키고 싶으면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야 할 테니까.

난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직통 번호를 급히 누르자 아버지의 비서가 연결되었다.


“도련님, 무슨 용무이십니까?”

“강도야! 내 집에 강도가 들어온 것 같아! 얼른 사람을 보내!”


당연하게도 비서는(물론 아버지도) 내가 지하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난 가장 단순한 핑계를 댔다. 이렇게 되면 서둘러야 한다. 어떻게든 저 문을 지키며 이곳을 사수하는 것과 동시에, 빨리 이 거지 소녀를 죽인 후 어딘가에 숨겨야 한다. 지금 문 앞에 있는 녀석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5분만 버틸 수 있다면 경호팀이 신속하게 도착해 저 녀석들을 제압……

쾅!

엄청난 폭음이 지하실을 강타했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의 폭음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고막이 찢어지는 느낌과 뱃속에 에밀레종이 땅땅 울리는 느낌을 동시에 받으며 난 뒤로 나가떨어졌다. 


“씨……씨발, 미친 새끼들이…… 폭탄을 쓰고 자빠졌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난 중얼거렸다.

희미한 의식 너머로, 내 몸에 누군가가 뭔가를 찔러넣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내가 깨어났을 때,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선 작업실에 쳐들어온 작자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경호팀과 충돌한 그자들이 의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작업실의 정체가 경호팀에게 까발려져 버렸다. 자기들이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함구해야 할 테지만, 정의감에 불타는 어떤 개새끼가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그 결과 난 의식불명인 상태로 신속하게 구치소에 직행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가 보낸 베테랑 변호사는 내 행적에 대해 듣더니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친 자들에 대한 건 증거가 별로 없으니 지금 생각할 사안은 아니고, 유일한 증언자가 될 그 소녀도 경호팀이 왔을 때 사라진 상태였다니 지금은 생각하지 맙시다. 지금 주목해야 할 건 도련님의 그 취미인데,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군요. 도련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무죄는 아닐 텐데?”

“무죄는 힘들지만, 일본의 그 자……사가와 잇세이라고 했던가요? 그 자가 좋은 선례를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변호사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자기가 이런 사건을 네 건 가량 맡았는데 모두 성공했다, 정신병에 걸린 행세를 하며 뒤로 끊임없이 압박을 가하면 부담을 느낀 재판부는 일단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으로 대충 때운다, 그렇게 되면 매스컴을 잠재우면서 몰래 협상해 형기를 줄인다, 이런 식이었다. 일단 이 위기를 탈출하는 게 급선무인 만큼, 난 변호사의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이런 사건을 네 건이나?”

“네. 요새 인육을 좋아하는 VIP들이 좀 많더군요. 여성을 산 채로 회를 치는 파티가 열렸을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내가 지금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나를 좌절시켰다.     


재판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난 아버지가 매수한 의사가 작성한 진단서를 손에 들고, 재판장에 입장하기 전 변호사에게 건네받은 약물의 힘을 빌려 제대로 정신병자 행세를 했다. 그건 마약의 일종이었는지 내 입에선 내가 생각지도 않은 헛소리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걸 모두 기억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맨정신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거기에 덤으로, 난 옆에서 날 지키고 서 있는 경찰관의 팔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살점이 뜯어져나갈 만큼 제대로 깨물어야 재판부에서 정상참작이 될 거라고 말했던 변호사는 그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씩 웃어 보였다.

상당한 소란이 겨우 진정되고 재판은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역시나 정신병원행. 로마네 콩티로 축배를 들지 못하는 게 유감스럽다. 재판정을 빠져나가면서, 난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아버지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만약 내가 외동아들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기를 쓰고 날 구하려 들진 않았을 테니까. 누가 뭐래도 난 한국에서 가장 큰 그룹의 회장의 아들인 것이다. 나를 건드리려는 자는 먼저 내 아버지부터 밟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그럴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문을 나서기 전 흘끔 뒤를 바라보자, 법관들이 아버지 주위에 몰려 담소를 나누며 악수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차에 올라타자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아까 약물의 기운은 빠지는 중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 듯했다.


“실컷 자 두라구. 이제 맘 편히 잘 시간은 없을 테니.”


운전사가 어쩐지 측은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내게 동정하는 말투를 썼지만, 지금의 난 최소한 정신병원의 병실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신병자 행세를 할 필요가 있기에 꾹 참았다. 아니, 사실 참기 싫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온몸에 구속복이 입혀진 데다 입에는 재갈이, 눈에는 눈가리개가 착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게 없어졌지만 굳이 자고 싶지도 않았던 터라 난 그동안 내가 먹어온 다섯 명의 소녀들,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노숙자 소녀를 떠올려 보았다. 그래도 인육을 먹었다는 VIP중에선 내가 가장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되었다.

한참을 달린 끝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속복을 이제 풀어주려나 했지만, 그 대신 몇 사람이 나를 차에서 들어 휠체어에 앉혔다. 약기운이 아직 꽤나 돌고 있었기에 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에게 몸을 맡겼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메마른 복도의 냄새를 깊이 들이킬 때,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너도 참 불쌍한 놈이야. 따지고 보면 네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었으니.”


너무 동정적인 어투라, 잠깐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도망쳤던 실험체는 무사히 잡을 수 있었어. 한 장소에 절대 두 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던 실험체가 네 덕에 자리를 잡았지. 지하실이었지만 전파가 터져서 정말 다행이야. 그 아이 몸에 주사한 발신기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몰라. 각성이 코앞이었던 터였으니까. 실제로 여기 데려오자마자 바로 각성해 버렸으니 원. 너희 같은 녀석들이 설치고 다니면 사회가 난리가 나니까 우리 같은 비밀 기관이 있는 건데, 잘못하면 우리 다 모가지 될 뻔 했잖냐."


실험체? 무슨 말이지? 한참 고민하다, 겨우 노숙자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실험체라고? 몸에 발신기를 주사했다고?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주사를 맞은 것도 설마 그거란 말인가?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너도 사람을 먹은 데다 공개적인 장소에서까지 사람을 깨물었다니 이제 늦었어. 그러니 우리 기관 사람들이 널 이쪽으로 격리시켰지. 그나저나 요새 너처럼 재판을 거쳐서 오는 놈들이 많아 귀찮다니까.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는 놈들이 현행범으로 잡혔으면 그냥 말없이 이리 데려오면 될 텐데, 그놈의 절차니 서류작성이니 뭐니 해서 귀찮은 게 너무 많다고. 그러니 그때도 널 놔두고 그냥 돌아갔지. 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냥 요양원 왔다고 생각해. 너랑 비슷한 녀석들이 득실거리니까 친하게 지낼 수 있겠지.”


얘기를 들어보니 변호사가 말했던 VIP들도 이곳으로 직행한 것 같다. 같은 변호사를 뒀던 만큼 나와 같은 짓을 했을 테니 말이다. 그놈들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갔을까? 변호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불길한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친다. 게다가 이것들이 지금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난 정신병자도 아니고, 네놈들이 말하는 실험체도 아니다! 분노와 굴욕감이 전신을 뒤덮는 것을 느끼며 난 구속복 안에서 몸부림쳤다. 재갈만 없었어도 제대로 놈들에게 소리쳤을 텐데, 빌어먹을 재갈은 내 입에서 ‘우어어……’하는 소리만 새어나가게 만들었다.


“이거, 각성이 빨라진 거 아냐? 어서 방에 넣어야겠군.”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태운 휠체어가 잠시 후 멈췄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내 구속복을 벗기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의 냉기를 느끼며 난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장시간 구속복 안에 있었던 터라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움직이기 힘들었다.


“안심하라구. 이 녀석들은 같은 편은 먹지 않아.”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몸만 움직이면 이 빌어먹을 녀석들을 패 주고 싶지만, 지금의 난 내 입에 물린 재갈을 스스로 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이 약기운은 대체 언제쯤 빠지는 거야? 결국 난 재갈을 푸는 걸 포기하고 눈가리개부터 풀었다.

순간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씨발, 여기 어디야?

눈부시게 빛나는 흰 백열등이 사납게 눈에 파고들었다. 장기간 눈가리개를 한 후라 눈이 밝은 빛에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면서 난 본능적으로 출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들어왔을 철문은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새끼들, 날 이런 데 처넣으면서 설명 한마디 안해주고 나갔단 말이야? 열어달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내 입에는 여전히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때 구석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에 난 그 형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된 누런 셔츠와 거지 같은 청바지, 여전히 떡진 머리. 이것만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지난번에 봤던 노숙자 소녀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목 위를 본 순간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지난번에 봤던 그 여자애라고?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우습게 느껴질 만큼, 그녀의 얼굴은 끔찍했다. 이지를 잃고 흰 눈자위를 희번덕거리는 것까진 용납할 수 있다. 감히 날 알아보지 못하고 이를 드러내는 것도 어느 정도 선까진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머리가 반쯤 날아갔는데 어째서 나를 향해 다가올 수 있는 거야?


- 제 몸에는 세균이 있어요! 날 먹으면 당신도 병에 걸려요!

- 같은 편은 먹지 않아.


아아, 그런 것이었나?

그녀의 입냄새가 훅 끼칠 만큼 그녀가 근접했을 때, 비로소 난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이 공간 안에서 그녀에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도움을 요청할 길이 없다는 것도 확실하게 이해했다.

제기랄, 똥 밟았구나.

입을 벌리고 날 향해 쇄도하는 그녀를 보며 난 체념했다. 별로 원하진 않았지만 최초로 좀비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내가 마지막으로 유감스러웠던 것은, 이 재갈만 없었다면 좀비의 고기 맛이란 걸 조금은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