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먹고, 만나고 발견하라.
다만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다 보면 그 장소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그 풍경과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짐을 찾아서 공항철도 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몸 앞뒤로 백팩을 멘 아담한 체구에 야무진 얼굴을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같은 비행기였는지 짐을 찾을 때부터 한국인인가 했던 사람이었다. 회사에 열흘 휴가를 내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중간 환승역까지 가는 방향이 마침 같아서 길동무가 되기로 한다. 서로 지난 여행에서 좋았던 곳을 이야기하다 보니 부쩍 편하게 느껴졌다. 대학생 때도 아빠 찬스로 유럽을 여행했었던 나름 베테랑이다. 이번 여행은 일정을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볼거리가 많아서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데이투어를 신청했다며 나에게도 권했다. 그 청년의 권유로 바르셀로나 일정 마지막 날 가우디 투어를 예약했다.
어쩌다 얘기가 흘러나온 것일까. 그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지금의 여자 친구와 오랜 시간 만났던 바로 전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민에 대해 털어놓고 있었다. 본인은 헷갈린다고 말했지만 전 여자 친구에 대한 미련이 잔뜩 묻어있었다. 마치 새 옷을 입고도 오랜 시간 입어서 내 몸에 딱 맞춘 듯 익숙하고 편안한 그 옷에 손이 가는 듯한 모습.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옆에서는 나를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사람.
남녀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말투가, 습관이, 일상이 나에게로 스며든다.
"도저히 바뀔 수 없고 안 맞는 걸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면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붙잡아요. 관계도 어느 시점이 지나버리면 빛이 바래서 되돌리기 힘들어지니까요. 전하지 못한 마음을 마음에만 담고, 하지 못한 말을 혀끝에만 맴돌게 오랜 시간을 보내기엔 아깝잖아요. 그 마음이. "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가만히 고민에 빠진 얼굴에서 떠오르는 노래 한 소절.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우리는 서로의 여행에 힘을 실어주며 환승역에서 헤어졌다. 청년의 사랑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노래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기를 바라며.
환승역에서 line 3을 찾고 있는 내게 바르셀로나 시민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다가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돌아서는 내게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가방이랑 핸드폰 조심해서 다녀요, 어떤 사람들이 훔쳐가기도 하니까요." 방금까지 모르던 사람, 지금도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인 나에게 앞으로의 일정까지 걱정해주는 따뜻한 마음에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에게 언젠가 꼭 이 마음을 보답해야겠다.
여행 여덟 번째 날 아침.
오랜만에 쓰는 일층 침대 인데다가 침대가 깨끗하고 얇은 극세사 이불이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맞은편 침대에서 일어난 영국 악센트를 쓰는 여자분도 여기 너무 좋지 않냐며 감탄했다. 느지막이 준비를 마치고 1층 카페테리아로 아침 먹으러 내려가는데 마드리드의 그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행은 어떻게 되고 있어?"
"여행 오기 전엔 네가 유일한 친구였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스페인 친구가 더 늘었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돌아온 그의 답장 혹은 확인 질문.
"그래도 내가 best 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피식 웃음 짓게 하는 능력은 타고났다. 여러모로 낯선 나라인데 아는 얼굴 하나 있다는 것뿐만으로 낯설지가 않다. 적당히 어두운 인테리어에 노란 조명이 더욱 반짝거리는 1층 카페테리아로 들어섰다. 바 테이블에 올라앉아 조식쿠폰을 제시하니 카페라테-오렌지주스-요거트-샌드위치 또는 크로와상이 한상 차려졌다. 카페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배를 든든히 채웠다.
리셉션에서 지도를 하나 받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지난밤 확인한 강수확률 40%라는 일기예보 무색하게 하늘은 청명하고, 햇살이 눈부셨다.
어제 잠자리가 편했던 덕에 발걸음이 더 가볍다. 눈 앞으로 예술작품 같은 건물들이 줄을 지어있고 바로 옆으로 초록색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바람에 살랑거리며 그야말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갔을까.
무심하게 툭. 그분의 작품이 등장했다. 처음 가우디의 작품을 보고 관심도 없는 건축의 아름다움에 묘한 이끌림을 느꼈었다. 스페인에 가면 꼭 볼 거라고 기대가 컸던 그것이 갑자기 마음의 준비도 없이 툭 등장했다. '카사 밀라 Casa Mila' 가구점 이름이 연상되는 그 건물은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기 충분했다. 도시 한가운데 예술 작품과 다를바없는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점이다. 모레 가우디 투어에서 듣게 될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강아지와 산책 나와서 볕을 쬐고 있는 무심한 듯 멋들어진 패션감각을 지닌 중년 남성분을 지나 길가에 서점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카탈루냐 광장이 나왔다.
햇빛을 받아 부서지듯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에 기대앉아 볕을 쬐는 사람들, 장을 보러 나왔다가 간단히 요기를 하는 사람들, 산책 나온 사람들, 뛰어노는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광장의 분위기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광장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다가 또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
푸드 마켓을 찾아가는 길에 람블라스 거리가 나오자 관광객이 급격히 많아졌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인 가로수가 예쁜 이 길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마침 한국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한분이 눈에 띄었는데, 딸 나이 또래로 보이는 외국인과 함께 였다. 혹시 한국분이시냐는 내 질문에 소녀같이 환하게 웃으시며 "네~! 한국에서 오셨구나!"하고 반가워하셨다. 옆에 있던 그 외국인 여성이 내 사진을 찍어줬는데, 징그러울 정도로 한국말을 잘한다. 외국인이 잘하는 한국말 수준이 아닌 그냥 외모만 외국인인 한국인처럼 말을 했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나에게 "얘~ 청국장도 잘 먹어요."라는 말로 한국인 인증도장을 꽉 찍는다. 마침 푸드마켓 가시는 길이라 하셔서 가는 길을 동행했다.
그 중년의 여성분은 독일에서 거주 중이셨고, 남편분이 독일 사람이라고 하셨다.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에 대한 의문이 해제되었다. 어떻게 독일에 가게 되셨냐는 질문에 요즘 젊은 사람 같은 대답을 하셨다.
'아- 어릴 때 그냥 이대로 한국에서만 살기보다 나가고 싶었어. 그래서 대학 마치고 독일로 왔어. 나는 이상하게 독일이 좋아 보였어." 그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것 자체가 놀라웠다. 딸은 독일에서 의과 대학에 재학중이었고, 엄마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을 떠나 독일에 살아보고 싶었던 엄마, 독일을 떠나 엄마의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은 딸.
딸은 지난 시절 엄마의 나이가 되자 그 시절 엄마가 지나온 인생의 교차로에 섰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고 마켓에 도착했을 때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사람으로 북적북적한 시장에서 과일박스, 피쉬볼, 스페니쉬 만두를 사 먹었는데 과일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간이 짰다. 그래도 음식들을 예쁘게 담아놔서 먹음직스러웠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람브라스 거리가 끝날 즈음 우뚝 솟은 콜럼버스 동상이 보였다. 동상 너머로 파란 하늘과 맞닿은 더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햇살도 따사롭고 모든 것이 선명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수많은 보트가 정박되어 있는 항구가 보었다. 예상치 못한 바르셀로나의 풍경이었다.
2주동안 짬짬이 한달이 넘는 여행일정을 짜느라 바르셀로나는 가우디를 제외하고 잘 알아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도에 대놓고 바다를 끼고 있는 위치인데도 바다가 있는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 바다가 있었어?' 혼자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누군가에겐 '부산에 바다가 있었어?'라고 어이없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모르고 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모르고 가는 재미도 있다고 해야할까. 잘 알면 아는 데로 더 많이 보이고, 잘 모른다 해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작정하고 꾸며놓은 해상공원과 같은 풍경이다. 시장에서 다 채우지 못한 허기를 반가운 핫도그로 해결하기로 했다. 따뜻하게 데운 빵에 삶은 소시지를 넣고 고소한 마요네즈, 새콤한 케첩, 달콤 알싸한 머스터드까지 얹어 맛과 색을 다 잡고, 마무리로 튀긴 마늘 양파 가루를 솔솔 뿌려준 핫도그. 받아 드는 얼굴에 웃음을 감출 수 없다.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항구 계단에 털썩 앉아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내 앞에는 먼저와 앉아 있던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평범하지 않은 외모에 시선이 갔는데, 여자는 빡빡머리에 입술에 여러 개의 피어싱을 하고 있었고, 긴 파마머리의 남자는 오픈되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이따금 가볍게 입을 맞추곤 했다.
그 모습이 독립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내 기준에 다소 개성이 강한,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다. 다 안아 줄 것만 같은 바다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이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
얼마나 쉬운 말이면서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덕분에 바르셀로나 항구는 푸르른 바다도 근사하고, 정박된 보트와 하늘도 아름답지만
결국 그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시선만이 마음속에 처음 맡아보는 향기처럼 남았다.
어둑어둑해지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며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하루 종일 걷다가 호스텔로 돌아오니 서늘해진 날씨에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수프류를 먹어야겠다 싶어 호스텔 1층 카페테리아에서 직원이 추천해준 렌틸콩 스튜를 주문했다.
이윽고 손바닥만 한 작은 냄비에 스페니쉬 블랙 소시지(스페인식 순대라고 보면 되겠다), 베이컨 조각, 렌틸콩이 자박자박 끓여진 스튜가 나왔다. '제발 맛있기를' 기대하며 한 스푼 입에 넣었는데 맛은 나쁘지 않은데 강렬한 짠맛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다 먹으면 밤새 물을 찾을 거 같은 짠맛이라 얼마 먹지 못하고 방으로 왔다.
방엔 어젯밤 인사를 나눈 젊은 일본 여자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맞은편 침대의 여자분도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각자 오늘 산 물건들을 보여주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료코는 올해 28살이 된 직장인이었다. 체구가 정말 작고 여리여리해 보였는데, 그녀의 이야기 속에 료코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26살이 되던 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1년 동안 남미-미국-캐나다를 혼자서 여행했다고 한다. 외모에서 풍겼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신기해하며 그녀에게 혼자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다.
"응, 나도 무서웠어~"
그렇게 다녀왔다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용감해 보이는 비범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 오히려 솔직한 대답이 더 용기 있게 느껴졌다. 저 작은 체구로 어마어마하게 큰 가방을 메고 혼자 1년 동안 그 큰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정말 다르게 보였다. 이번 여행은 지난 여행 이후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1년 일하고 받은 열흘의 휴가였다. 그녀의 유일한 걱정은 진로도, 결혼도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계속 여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야."
듣고 있던 아일랜드 여자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략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였고, 친구 소개로 스페인에서 영어교사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여자 세명이 모인지라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같은 아시아권이 아닌 그 나라 사람들의 인식도 궁금했다.
"음.., 우리도 그 적령기라는 게 있어. 보통 30-35살까지 보는데, 나는 그때 내가 언제까지고 어릴 줄 알았던 거야. 그 시길 지나니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지더라고."
나라별로 다르겠지만 아일랜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의외였다. 물론 한 개인의 생각이다. 대다수가 하는 선택일 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자신의 인생의 대본은 스스로가 써가는 것일 뿐.
우리는 스페인에서 시작될 그녀의 새로운 삶을 응원했다. 한국, 일본, 아일랜드에서 온 여자 셋이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고 2시가 넘어서야 내일 아침 비행기로 귀국해야 하는 료코를 위해 잘 준비를 했다.
잠들기 전 공백인 내일의 일정을 고민했다. '내일은 뭘할까?'
그때까지만해도 내일의 만남을 결코 예상치 못했다.
기억에만 남아있는 그날의 시간들.
아무것도 모른채 아침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