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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Apr 25. 2024

해외여행 마지막 날 따로 다닌 부부

잘 가. 가지 마. 행복해. 떠나지 마.

 빨간 불빛을 깜박밤하늘을 노 젓는 비행기를 보니 여행 생각이 났다. "여보. 우리 언제 또 비행기 타고 여행 갈 수 있지?" 아내의 물음에 남편은 "구 월"이라고 답했다. 그랬던 그가 삼 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냐짱으로 떠날 채비를 하란다.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비행기 표까지 예약 완료.


 갑자기 떠나는 여행, 이젠 놀랍지도 않다. 쌀쌀하던 한국 날씨와 달리 나쨩은 초여름의 기온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겨울 옷을 정리하고 여름철 옷을 꺼내야 했다. 마의 고비였다. 꽁꽁 싸매 두었던 여름옷을 세탁한 후 짐을 챙기는 과정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또한 여행의 과정이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렘의 꼭대기에 있다. 온갖 상상과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마법의 도로를 음악을 들으며 행진했다. 공항에서의 시간은 멀리뛰기하듯 훌쩍 지나가 버렸다. 탑승 직전에 삼십 분 가량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방송이 울렸다. 오히려 좋았다. 분주한 일정으로 하루 내내 참았던 커피 한 잔을 음미할 시간이 생겼으니. 고소하고 풍미 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남편과 싱글벙글 대화를 나눴다. 은은한 커피 향을 즐기 곧 이륙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비행기에 올라 기쁜 소식을 하나 더 발견했다. 옆자리가 비어서 편안하게 화장실도 가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전자책을 읽으며 평소 듣고 싶었던 노래까지 실컷 들었다.


 냐짱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신속하게 캐리어를 찾고, 핸드폰 유심칩을 받아 교체하고, 예약한 택시를 익숙하게 잡아 타는 남편을 나는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남편이 없으면 국제 미아 신세를 면치 못할 나였다. 그런 내가 남편에게 하루 종일 혼자 있겠다고, 혼자 여행을 즐기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바야흐로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잠깐 그러고 말겠거니 생각했다. 점심때가 되니 약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 다. 그러나 약효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함께 그리스 음식을 먹고 마사지를 받기로 약속했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여보. 미안한데 나 얼른 누워야겠어." 올라오는 구토를 꾸역꾸역 참으며 손에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서 겨우 호텔로 이동했다. 아까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내 마음처럼 하늘도 우중충했다. 곁에서 먹구름 낀 얼굴로 걱정하는 남편에게 혼자서 여행을 즐기라 권했다. 마사지도 받고 내 몫까지 그리스 음식을 먹고 오라 했더니 남편은 나를 호텔에 혼자 둘 수 없다며 음식을 포장해 오겠다 했다. 음식 냄새조차 맡기 힘든 상태인지라 손사래를 쳤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던 그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하며 내게 돈과 핸드폰을 쥐어줬다. 걱정하지 마라고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딸깍." 호텔 문이 닫힘과 동시에 너무나 외롭고 무서웠다. '잘 가. 가지 마. 행복해. 떠나지 마.' 곧 공항까지 사십 분이나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막막함에 눈물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있는 두 가지. 가만히 것, 한국에서 챙겨 약을 복용하는 것뿐이었다. 여동생이 챙겨 준 복통약 세 포와 내가 챙겨 간 타이레놀 네 알이 어찌나 귀하던지.


 침대에 누워 커튼 사이로 펼쳐진 타국의 풍경을 구경했다. 푸른 바다가 까맣게 변할 때까지 밖을 바라보았다. 꼬마아이들이 복도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두어 시간가량 지속 됐다. 귀에 에어팟 낄 힘도 없어 그 상태로 남편을 기다렸다. 너무 시끄러워서 괴로웠지만 한편으론 사람 소리가 들려서 위안이 됐다.


 남편은 마사지를 구십 분이나 예약했더랬다. 그 구십 분이 내겐 구만 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워서 제발 무사히 입국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타국에서 아프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주 격하게 체험하면서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 아픈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 나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의 여행 가이드이자 든든한 보호자이니까. 나는 여행 마지막 일정을 통으로 날렸지만 남편 혼자라도 돌아다닐 수 있어서 그 또한 다행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차를 타기 직전에 또 화장실에 달려가 구토를 했다. 내 상태를 본 공항 직원은 약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걱정해 주는 줄 알고 약을 보여 줬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당장 서명하란다. 뻗을 것 같은 몰골의 환자를 비행기에 태우기 불안했나 보다. 역시 아프면 본인만 손해. 냐짱에서의 마지막 구토가 오히려 나를 살렸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그토록 염원하던 대한민국 이었다. 포근한 집에서 따뜻한 죽을 먹으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그토록 심하게 앓았던 것일까. 곰곰이 원인을 따진 결과 두 가지 음식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나 혼자 먹었던 시큼한 코코넛 워터와 새콤한 사탕수수! 나는 얼른 엄마께 전화를 걸어 여쭸다.

 "엄마. 사탕수수 음료 마실 때 신 맛이 나던데 상한 거였을까?"

 "사탕수수는 신 맛이 안 나지. 다음엔 그런 거 사 먹지 마.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한입 먹어 보라던 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남편의 결정을 열렬히 칭찬해 주고 싶다. 다음 여행에서는 마지막 날까지 낙오하지 않고 꽉꽉 채운 여행을 즐겨야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며 질질 짜던 여자는 벌써 다음 여행을 꿈꾸는 중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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