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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Feb 22. 2024

며느리들의 중간고사 설 그리고 배움

중간고사 끝나고 곧 기말고사 추석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명절을 어린이날만큼이나 좋아했던 사람이 정녕 나였던가. 나이와 명절의 무게는 정비례한다. 다가오는 명절이 설레 잠 못 들었던 소녀는 연휴 중 명절을 가장 싫어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 년 전쯤의 설날이었나.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던 나는 핫팩을 무려 여덟 개나 붙이고서 힘든 명절을 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일러까지 고장 나는 바람에 갈비 기름을 찬물로 씻어야 했는데... 설거지를 해도 해도 미끄덩거리는 그릇들 앞에서 나 좀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고 싶은 지경이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해 모든 시어른들께서는 내 어설픈 노력을 우쭈쭈 치하해 주시는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내가 직접 해내고 싶었다. 그나마 설거지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온수 보일러가 그렇게나 세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남편은 고생하는 아내를 돕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일에 가담했고 어찌어찌 저녁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필름이 끊겼을 정도로 힘든 설이었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는 내겐 집을 떠나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제이다. 올해의 설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못 긴장이 됐다. 까치 까치설날아 오지 마라. 우리 우리 설날아 얼른 지나가라. 그렇게 설 명절이 도래했다.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날.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고작 세 시간을 자고 알람도 없이 일어났다. 모닝커피도 건너뛰어야 하는 명절. 무사히 하루를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상차림 돕기에 나셨다. 작은어머니 두 분과 우리 시어머님 세 분은 베테랑 며느리 군단이다. 온실 속의 주부 일 단인 내가 도대체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저 해나 끼치지 말 시종일관 밝은 미소로 주변을 살피자 다짐했다.


 눈치와 센스만이 살 길. 뭔가 부족해 보이면 얼른 갖다 드리고 주변이 어질러지면 빠르게 치웠다. 막내 작은어머니께서는 또 어찌나 심정이 고우신지 내 옆에 있는 양념통 하나 쉽사리 달라하시지 못하셨다. 계란 깨서 섞기, 산적 만들기, 설거지하기, 음식쓰레기 처리하기, 커피 타 드리기, 물건 전달 등. 아주 소소한 심부름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뭐든 하명해 주실 것을 요청했더니 어르신들께서는 이런 덕담까지 건네셨다.


 네가 있으니까 참 좋다.

 네가 함께하니 든든하구나.

 너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어르신들의 칭찬에 힘입어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해내고 싶었다. 생애 첫 청양고추씨 빼기와 간 마늘 만들기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런데 청양고추 이놈 자식이 어찌나 울퉁불퉁 굽은 몸을 가졌는지. 세로 썰기가 영 쉽지 않았다. 뾰족한 칼 끝으로 찔러도 보고 비스듬히 눕혀 옆구리를 공략해 봐도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갔다. 쯧쯧.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리숙한 초짜 주부의 모습을 목격하신 어르신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아닙니다. 이럴 순 없는 것이지요. 고추를 곧게 세워서 세로로 써는 방법을 배웠다. 이번엔 길쭉하게 썰린 고추의 속을 파내고자 포크를 들고 덤볐다. 한 땀 한 땀 씨를 빼내는 나를 보시고 얼른 티스푼을 쥐어주셨다. "물속에 담그고 티스푼으로 쓱쓱 긁어내면 된단다." 아하. 민망하고 감사했다.


 내 손이 너무 무디고 느린 것 같아서 장갑까지 훌러덩 벗고 마늘 까기에 돌진했다. 몇 쪽을 까다 보니 손이 너무 매웠다. 내가 만진 건 분명 마늘인데 불을 만진 듯 손끝이 뜨거웠다. "꺅." 결국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후. 나 정말 가지가지한다. 베테랑 며느리 군단 모두가 입을 모아 얼른 찬물에 손을 담그라고 하셨다. "이건 우리가 할 테니 너는 마늘 만지지 마렴." 손은 밤이 깊도록 쿡쿡 쑤셨다.


 부족한 내가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예뻐해 주시는 어른들의 마음에 보답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분위기라도 한층 밝히는 아랫사람이 돼야. 작은 일에도 고맙다, 애썼다 하시는 웃어른들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감사히 명절을 보냈다. 명절의 순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오색찬란한 음식보다는 존중과 배려가 답이다.

 이번 명절은 내게 좋은 수업이 되었다. 마늘과 청양고추는 맨손으로 만지지 말 것. 좋은 감정은 말로 부지런히 표현할 것. 미리 앞서서 걱정 않기. 몸이 고된 건 별 수 없지만 조금은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다음 추석엔 또 무얼 배울 수 있을지 기대해 봐도 좋겠다.

어느 분의 신발인지 모르겠지만 훔쳐 신었다. 크록스를 신고 가면 만인의 신발이 된다.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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