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문자를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차차! 얼른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어머님의 메시지 내용은 이러했다. "이번 원고가 마지막일 것 같아. 시간이 나면 교정 좀 부탁해." 어머님께 원교 교정을 부탁받은 지 벌써 이 주가 지났다. 한글 프로그램이 없어서 '나중에 해야지' 하고선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신 메일은 총 두 건이었다. 첫 번째 메일에는상담 내용이 빼곡히 적힌 다섯 장의 문서가 첨부 됐다. 어머님은 오랜 기간 동안 청소년 상담 봉사를 해 오셨다. 촉법 청소년을 비롯해 아픔이 있는 청소년들을 만나 수차례 무료 상담을 진행하시고 이에 관한 원고를 작성하여 학교 및 정부 기관에 전달하는 일을 하신다. 둘째 며느리인 나는 어머니의 상담 일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바꾸는 원고 교정을 돕고 있다.
"네가 글을 잘 쓰니까 내 원고 좀 봐주면 좋겠는데."
"네. 파일 보내 주세요."
가볍게 시작한 원고 교정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수고를 요했다. 어머님 나이에 컴퓨터를 사용하시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지라 야생(?)의 원고를 받은 데다가 이왕이면 잘 쓰고 싶단 욕심이 들었다. 받은 원고를 세 번가량 회독한 후에 상담자와 내담자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글을 썼다. 결과물은 예상대로 엄지 척이었다. (훗...) 주변 분들께서 누가 이렇게 글을 잘 쓰냐고, 보석 같은 재주를 가졌다며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단다. 책에 실린 글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어머님의 후기는 이러했다. "다음번에도 또 부탁해."
오랜만에 다시 시어머니의 이메일을 열었다. 이번엔 가족과 친구 문제로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를 접했다. 글을 교정하는 내내 내담자가 이제 그만 덜 아팠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상담을 진행하셨을지 알 것 같았다. 민감한 내용은 덜고 모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강조하면서 내담자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상담 내용을 정리했다. 그날 밤 어머님께 메일을 보내고 깊은 잠을 잤다. 의미 있는 일에 조금은 보탬이 됐다고 생각하니 보람찼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메일을 확인하신 어머니께서는 "아주 좋아. 수고했어. 맛있는 밥과 선물 사 줄게."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나는 괜찮다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썼다가 지우고선 "감사해요!" 하고 답했다.
원고를 교정하며 이번이 마지막 부탁이 될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내심 섭섭하게 느껴졌다. 나이와 체력 문제로 학교 봉사를 내려놓으실 예정이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부모님의 육체적 한계를 체감할 때면 참으로 세월이 야속하다. 원교 교정이라면 글수저를 타고난 며느리가 언제든 해결해 드릴 테니 좋은 일을 오래오래 즐기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젠가 시어머니께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선물드린 적이 있다. 어머님은 책을 읽으신 후에 "내용이 좋아서 선물해 주고 싶은 학생이 있는데 이걸 줘도 될까?" 하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그럼요."였다.
언제고 시련은 불어오고 세월은 살처럼 바삐 흐르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약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책 제목처럼 말이다. 앞으로 몇 차례 더 어머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이어지면 좋겠다. 맛있는 식사까지 대접해 주시겠다니 이거야 말로 글도 쓰고 칭찬도 받고, 시어머니 좋고 며느리 좋고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