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주는 위로
L누나와 미술관 몇 군데를 돌아보고나서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어제 만난 K친구도 합류했다. L누나와 친구 K, 둘은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전공 분야가 같고 파리에서 수년간 여러 고생을 한 탓에 막힘없는 대화가 가능했다. 난 이야기를 들으며 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손님들로 꽉 찬 가게 안의 분위기를 구경하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식사가 올라왔다. 꽃 모양의 튀김? 벌레 모양의 파스타?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이런 꽃음식이 있다니?... 프랑스 사람들은 음식도 이쁘게 먹네', '이건 한국의 번데기 같은 요리인가?' 혼자 음식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맛은 아주 좋았다. 상상했던 맛과 달라서 더 즐거웠다. 이런 게 바로 무지한 여행자만의 특권이라면 특권이겠지- 생각했다.
점심식사를 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L누나는 저녁에 다시 만나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갈 예정이었다. 생각해보면 K친구와 L누나 둘 다 갑자기 파리에 놀러 온 이 백수를 위해 많은 부분 배려를 해주었다는 사실이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각자의 일상생활이 있음에도 짬을 내서 내게 다양한 파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탁구공처럼 둘 사이를 신나게 왔다 갔다 하며 파리를 경험했다. 그 날은 오후에 두 사람 모두 일정이 있어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파리 시내를 천천히 구경하다가 개선문에 올라가자는 생각을 했다. 여행지에 가면 항상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기를 좋아한다. 낮엔 도시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가까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해가 떨어지면 높은 곳에 올라가 밤의 얼굴을 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정적이면서도 화려한 모습은 밤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여러 복잡한 일들을 잠시나마 나와 분리시켜준다. 어스름한 저녁과 화려해진 야경을 사진기에 담는 것도 내겐 중요한 일이다.
저녁노을을 보고 싶어 일찍 움직였지만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기온은 낮보다 떨어져 매우 추웠다. '그래도 파리의 야경은 봐야지' 생각하며 개선문을 올랐다. 빙글빙글 계단을 밟고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 개선문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니 어김없이 찬 바람이 강하게 나를 반겼다. 동서남북 분주히 방향을 바꿔가며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왼쪽으로는 노랑 불빛의 차 앞모습이, 오른쪽으로는 빨간빛의 차 뒷모습이 보였다. 가운데 먼 곳에는 관람차가 반짝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잘 균형 잡힌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에펠타워에 주황 불빛이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아직 도시 전체는 어둑한 시간이었기에 더욱 그 모습이 듬직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머리 꼭대기에서 사선으로 얇게 퍼져나가는 푸른 불빛은 등대처럼 360도 천천히 돌며 시내 여기저기를 비췄다. 에펠탑은 파리 시민들의 등대처럼 여겨졌고 그 안에 나는 위태로운 쪽배로 낯선 도시 위를 표류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등대라는 단어, 그 존재와 어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내 인생의 항로와 그 책임이 온전히 내 몫이라는 사실이 정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두렵고 유감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개선문 위에서의 나는 아직 그 어둠의 터널을 꾸역꾸역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나를 살게 했던 작은 빛들이 등대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노를 저을 수 있었다. 따뜻한 내 사람들, 문학, 예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글을 적어 내려 가는 이 순간. 2년 전 개선문 위에서 벌벌 떨며 에펠탑을 바라보던 나를 타인처럼 회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