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풍문여고 앞
풍문여고 앞. 카우보이 모자 아저씨가 밧줄 달린 채를 쥐고 있다. 교수형 집행할 때 쓸 법한 밧줄이다. 그걸 하얀 통에 잠시 담궜다가 꺼내서 휘두른다. 비눗방울이 촤르르. 우와, 초대형이다. 바람결대로 출렁인다. 용처럼 꿈틀댄다.
투명한 드래곤이 뭉게뭉게 모퉁이를 돈다. 우산을 쥔 청년에게 돌연 달려든다. 우산이 에페(epee)로 돌변한다. 살포시 펜싱 찌르기. 팡! 마른 하늘에 날벼락. 비 온다는 예보 듣고 들고 나온 우산일 텐데... 우산 '덕분에' 비 맞았다.
우산이 없었다면, 가만히 뒀더라면, 안 터질 일이다(우산을 그냥 펼쳤다면, 일타쌍피였겠지). 우리가 겪는 사건들 또한 그러하다. 있어서 터지고, 해서 당한다. 없었으면, 안 했으면 피했을 사고가 부지기수 아니던가. 순리를 거슬러 무모하게 행하는 것. 유위有爲가 유죄有罪다.
팡 터지는 물거품에 빵 터지는 순간, 금강경金剛經이 덥석! 상념의 꼬리를 문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허깨비, 물거품과 그림자. 이슬 같고 번개 같나니 이리 봐야 마땅하리.
꿈은 깨면 그만. 그림자는 해에 따라 있다 없다. 이슬은 금세 마르고 번개는 순식간이다. 우리가 집요하게 쫓는 것들은 모두 그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다. 끌어안고 엎치락뒤치락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 알아서 흘러간다.
자꾸 뭔가 저지르고 싶은가? 긁어 부스럼이다. 그럴 땐 비틀즈의 만트라가 약이다. 줄기차게 읊어라.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이 카드의 인물은 편안하다. 이완되어 있다. 강물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 그는 물을 믿는다. 물을 꽉 움켜쥐지 않고, 긴장하지 않는다. 경직되면, 물에 빠진다. 긴장을 풀면 강이 보살핀다.
살아 있는 사람은 강에 빠져 죽고, 죽은 사람은 수면으로 떠오른다. 살아 있는 자는 싸운다. 강은 그의 적이다. 죽은 자는 아무런 긴장 없이 완전히 이완한다. 강은 죽은 사람을 익사시킬 수 없다.
신뢰한다는 건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복종이란, 인생을 (적이 아닌) 친구로 여기는 것이다. 일단 강을 신뢰하면 당신은 즐기기 시작한다. 물장구 치고, 헤엄 치고 깊이 잠수한다. 강에서 수영하듯 살아가는 게 복종이다.
삶은 하나의 강이다. 강물에 맞설 수도 있고, 떠 있을 수도 있다. 강물을 밀치며 물살을 거스를 수도 있다. 어디로 이끌든지 강물과 함께 흘러갈 수도 있다. 물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도 자신의 길을 뚫는다. 전투 없이 승리하고, 복종으로 정복한다.
물은 항상 깊이를 향한다. 늘 가장 낮은 바닥을 찾는다. 첫째를 갈망하지 않는다. 맨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야망이 없다. 야망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다. 물은 아래로 간다. 아무것도 아니길 바란다. 자신이 비범하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물에겐 에고가 없다.
물은 묵묵히 흘러간다. 바위가 너무 크면 다른 길을 찾는다. 돌은 서서히 물에 녹아들어 모래가 된다. 바다의 모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산에서 왔다. 물은 결국 승리한다. 바위처럼 굴지 말라. 물처럼 부드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