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담화 단상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ER에서 종종 듣는 대사다. 내가 출동해야 한다는 큐사인이다. 조신하게 다가가서 안하무인 내원객의 막무가내 민원을 경청한다. 끄덕끄덕 공감하며 토닥토닥 다독인다. 불만사항 시정하고 어찌 됐든 죄송하다고 하면, 대부분 상황 종료. 흥분해서 소란 피웠다며, 자신들이 되려 죄송하다고 화답하는 장면이 쿠키 영상처럼 종종 뒤따른다.
굉장히 뻣뻣하고 뻑뻑한 인간이었는데, 능글맞게 이러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과연 그러하다. '신속한 사과 황급한 무릎' 전문가로서, 청와대 점거자의 대국민 담화를 지켜보다 깊이 탄식했다. '자리가 모든 생명체를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니구나. 응급실에서 저딴 식으로 사과했다간, 머리털 뽑히고 멱살 잡히기 딱 좋은데...'
떠돌이 노동자로 평생을 보낸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 막노동하면서 만난 세상 사람들을 통해 생생한 질문과 탄탄한 답을 얻은 '길 위의 철학자'다. 그의 사색을 모은 <영혼의 연금술> 한 토막을 엿보다 탄복했다.
"현대인은 죄의 무게보다도 책임의 무게에 더욱 짓눌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짊어져주는 사람보다 자신의 책임을 대신 짊어져주는 사람을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결단을 내리는 대신 단지 복종하고 자기 임무만 마쳐도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구원이라고 느낀다."
죄보단 책임이 무거운 현대인들. 책임을 대신 짊어지는 자를 구세주로 섬긴다. 결단은 그에게 맡기고, 복종을 택한다. 지금 우린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허황된 구원론의 사슬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지금의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잽싸게 도망간 선조의 행보에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을 깡그리 태워버렸다. 경복궁 뒤 푸른 기와 아래에 짱박힌 국정 농단 책임자는 왕조의 유물에 스민 민심의 엄정함에 눈 떠야 할 것이다. 모든 걸 책임질 듯 댓통령 취임 선서 읊조리던 구세주는 도대체 어디로 도망갔는가?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9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이렇게 회고하던 이가 푸른 기와 아래에 머문 적도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그 바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