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핀(KEEPIN), 그리고 함선영 시집.
키핀(KEEPIN). 메뉴가 매일 바뀌는 밥집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늘은 가츠동(カツどん).
요리하는 청년들의 손놀림을 더듬는다.
느려 터졌다. 충청도 아니랄까 봐.
속 터지기 전에 냉큼 시선 거두어
식탁 옆 책장에다 냅다 꽂는다.
메뉴 못 고른 한恨쯤이야 책 고르며 풀지 뭐.
그리하여 하나 뽑아 들었다. 함선영 시집.
그립감 좋다. 영단어 암기장 사이즈.
'눈물이 마르면 화분 하나를 사요.'
울보에 화분 덕후로구나. 틀림없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아, 저는 시인이니까요.'라고
말할 뻔했다니, 찐따스틱하기까지.
책날개엔 이렇게 써놨다.
'두 줄을 쓰다. 진공과 여백 사이에서.'
어딘가 공백이 많은, 그녀(혹은 그)의
두 줄 낙서장을 힐끔 훔쳐본다.
훔쳐낸 장물贓物 중
식감 좋은 문장 몇 가닥 곱씹는다.
심심한 입에 단침 고이도록 꼭꼭.
왜 손가락이 다섯 개지.
옛날에 우린 별이었기 때문이지.
고맙다. 별똥별이여.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허수아비는 십자가에 못 박혔네.
가난한 농부를 위해.
전단지를 받느냐, 안 받느냐.
오늘의 기분.
종이컵이 말한다.
내일 죽더라도 단 한 번의 키스를.
떨어지는 꽃잎은 바람의 유서.
에피타이저 시집 덕분일까.
흔하디흔한 돈가스덮밥인데 감이 다르다.
우리가 영롱한 스타였음을
입증하는 다섯 손가락으로
숟가락(이 연장도 북두칠성을 본뜬 거라지)
거머쥐고, 가난한 농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던 허수아비가
지켜낸 쌀알을 씹는다. 꼭꼭.
진부한 일상에
진지한 성찰이 덮인다.
시가 아니었으면 시시할 뻔.
전단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