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핑퐁>과 도해 단군의 <염표문>
작곡가 꿈나무, 트럼본 롬바가 물어물어 산타 마을을 찾아간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마을은 축제 분위기. 불쑥 악당 블랙이 침입해 산통을 깬다. 어둠의 무리가 스노우볼을 훔쳐 달아나자, 파라다이스는 생기를 잃는다. 클럽에 미러볼이 없으면 어쩌누. 김 빠진 콜라, 코 없는 코끼리지. 마을의 에너지원이 사라지면서 내 의식도 사르르 흐려졌다. 나만의 판타지아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눈꺼풀 장막 걷어내니, 무대가 기울어져있다. 우측 흉쇄유돌근(sternocleidomastoid muscle)이 심하게 뻐근하다. 역시 나는 좌파. 좌뇌 컨텐츠가 훨씬 더 묵직하구나. 과신전된 우측 SCM 머슬을 잡아당겨 무대를 바로잡고, 스트레칭 삼아 고개를 좌로 돌린다. 시야에 한 사내의 정수리가 들어온다.
나랑 같은 처지의 애기 아빠다. N극과 S극 사이의 케미 같은 게 우리 둘 사이에 있었구나. 빈 좌석을 사이에 두고 두 대가리가 서로를 향해 입질을 움찔움찔. 둘 사이의 공기 어디쯤을 쫙 갈라 공간을 딱 접으면 정확하게 겹치는 구도다. 일종의 데칼코마니.
무대에선 롬바의 험난한 모험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노우볼을 되찾고자 블랙을 찾아가는 여정. 그 와중에 우연히 호린, 튜튜, 코코넷, 크랄라를 만나고, 함께 힘을 합쳐 난관을 돌파한다. 공공의 적, 블랙도 본래 산타 마을의 일원이었다고. 마릴린 맨슨 닮은 그로테스크한 취향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그녀가 삐딱선을 탄 것이다.
어딜 가나 왕따가 문제다. 소설 <핑퐁>의 두 주인공, 모아이와 못은 이렇게 자조한다. '너와 나는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이야.' 그사세,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깜빡하는가. '세계는 다수결이다. 말하자면 자동차를 만든 것도, 석유를 캐는 것도,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모두 다수가 원하고 정했기 때문이다. 따를 정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하나로 박민규 작가는 다수결을 거론한다.
민주주의는 그저 다수결 원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럴 리가.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인내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네 자랑찬 정치 시스템이 이 숭고한 정신을 깜빡하면, 보이는 폭력마저 정당화한다. 공인된 폭력, 정당방위를 넘어 정당공격! 뭐 이런 기발한 판타지가 작금의 현실에서 심심찮게 펼쳐지고 있다.
귀에 익은 캐롤과 명곡들로 짜여진 오페레타 뮤지컬, <판타지아>는 동심 저격 판타지답게 해피엔딩이다. 오뉴월 서리를 부르는 블랙의 한(恨), 왕따의 모진 마음을 롬바와 친구들-일명, 부니부니 음악탐험대-이 훈훈하게 다독여 모든 걸 되돌린다. 스노우볼 되찾은 산타 마을에 롬바가 작곡한 캐롤 신곡이 울려퍼지고, '겟올라잇' 클럽 모드. 흥 터진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관객석으로 난입해, 크게 하나 되는 대동사회(大同社會) 판타지를 실현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 대사가 이명처럼 웅웅거린다. 롬바가 블랙을 달래며 말한다. "모양새 달라도 함께 입 모아 한 목소리를 내면 한 마음이 될 수 있어." 오케스트라 조직론의 핵심 같은 멘트로, 고조선의 11세 단군 도해(道奚)께서 전수하신 염표문(念標文)의 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人(인)은
以知能爲大(이지능위대)하니
其道也擇圓(기도야택원)이요,
其事也協一(기사야협일)이니라.
사람은 천지의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사람의 도는 천지의 도를 선택하여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서로 협력하여 온 세계가 하나 되게 함이니라.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탁월한 선택과 탄탄한 협력. 잘 고르고 잘 뭉치는 게 사람 된 도리다. 그 도리에 삑사리 나면, 모든 게 삐걱댄다. 4,5년마다 주어지는 주권자의 특권을 어리석게 휘둘렀을 때, 어떤 참극이 어이없게 벌어지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협력은커녕 그 대척점으로 휩쓸려가는 작금의 작태도.
뭐, 그렇고 그런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회동, 그 선택은 탁월했다. 아내는 학부 후배님과 그간의 회포를 풀었고 그들의 미니미, 아인이와 조안이는 깡총깡총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가히 협일(協一)의 좋은 예다. 토끼띠 동갑내기 과외활동, 성공적. 새해에도 종종 뭉치기로. 다음엔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