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과 파일로 밴스의 고뇌
아이폰이 사진첩을 엮어서 동영상을 뽑아준다. 덕분에 유월의 한복판, 무척 유쾌했던 하루를 되짚는다. 문 닫고 떠나려는 KTX를 울산역에서 우당탕탕 겨우 붙잡아 경성 나들이. 상진이형, 아인이네랑 뭉쳐서 오붓하게 점심 먹고 코엑스에 갔더랬지.
당첨의 여왕께선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정유정 작가님의 eBook을 거머쥐었고,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님과 대면해 <내 멋대로 세계 서점X>에 사인도 받았더랬다. 더불어 난 휴대폰 충전기를 기차에 두고 내린 탓에 아내의 눈총과 구박을 받았다.
이때 입수한 <파일로 밴스의 고뇌>를 야식처럼 당직 중에 야금야금 삼킨다. 주교살인사건의 범인을 확인했고, 그레이시 앨런 살인사건을 쫓고 있다. 독자적인 심리학 기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파일로 밴스 탐정은 S. S. 밴 다인이 뽑아낸 독특한 캐릭터다. 밴 다인은 날카로운 안목의 예술 평론가 윌라드 헌팅턴 라이트의 필명이다.
끊임없는 집필로 심신을 혹사하다 신경 쇠약에 걸려 2년 넘게 병상에 드러누운 그는, 지루함을 달래고자 미스터리 및 호러 소설을 붙잡는다.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2천여 권의 소설만 탐독하다 그는 깨닫는다. 결점이 명백한 미스터리 작품들이 쇄를 거듭하며 팔리고 있다는 것.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미스터리를 많이 읽고 나만큼 주의 깊게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코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이지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미스터리 덕후의 당찬 고백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일반적이나, 병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폐소생술 끝에 대부분 숨을 거두나, 종종 심장이 다시 뜨거운 피를 뿜듯이. 윌라드 헌팅턴 라이트가 S. S. 밴 다인(Steam Ship의 머리글자)으로 태어나고, '증기선'이 파일로 밴스를 뿜어냈듯이.
그 밥에 그 나물. 진부한 컨텐츠에 질렸다면 파일로 밴스가 답이 될 수 있다. 그의 현학적 고뇌 쫓다가 나의 현실적 고뇌를 잠시나마 쫓아낼 수도 있다. 엄동설한에 엄한 곳 누비다 응급실의 초췌한 의사 만날 일 만들지 말고, 따스한 이불 덮고 일독을 권한다. 알맞은 두께의 양장본이다. 목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