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쉼표

<소설의 첫 문장> 묵상

by 하일우
심야에 당도했어요. 저기 17층에 짐 풉니다.
아내랑 메일 주고받았던 라이언이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파란 상자 여니 수제 메뚜기. 하조안 잠시 허걱!
푸꾸옥 인터컨티넨탈.

9월을 열자마자 푸꾸옥(富國)으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고추가 맵고, 작은 바나나가 달달합니다.
안부 묻는 직원 이름이 도리. 명곡 <To Dori>가 떠오릅니다.
나의 여인들, 늠름한 뒤태.
조식 후 산책. 풀장 너머 너른 바다.

1년에 한 번 떠나는 피서避暑, 아니 피인避人.


아내가 최애하는 도마뱀과 숙소에서 구출한 아기새.
비 맞으며 느긋하게 산책하는 달팽이.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사람 성긴 틈으로 자연이 스밉니다.


연못 옆 스파와 인어공주 뒤집어쓴 아해.
세심한 힐러가 금기운 머금은 차를 권합니다.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가 故 최인훈 선생의 <광장> 첫 문장을 실어 나릅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해조음海潮音에 잡념이 잦아듭니다. 잔잔한 ASMR이 명상을 돕네요.
꽃보다 조안. 베트남 커피에 흠뻑 빠진 아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애프터눈에는 티.


<소설의 첫 문장: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의 저자 김정선은 한국 소설 첫 문장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명한 문구에 딴지를 겁니다. 모두 세 개의 쉼표가 전체 문장을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각각의 성분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는 거죠.


19층 루프탑바 <INK 360>. 4일 전에 오픈했더군요.
때때로 때깔이 바뀝니다.
최애하는 문어 안주가 바를 휘감고 있습니다.
이태리 바텐더가 ‘엉클 호 페니실린’ 칵테일 만들어줬어요.

“바다는”과 “크레파스보다 진한” 그리고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와 “숨을 쉰다”를 따로따로 늘어놓고 보면, 마치 각자 다른 문장에서 뽑혀 오기라도 한 듯 서로를 철저히 외면하는 형국이랍니다.


오징어랑 새우가 어우러진 피자가 비비나 맥주랑 어울립니다.
베트남 맥주 사이공 스페셜이 가장 맘에 든다는 가장.

바다와 크레파스도 연관이 없지만 육중한 비늘 또한 크레파스와 관련이 없는 데다 마지막의 “숨을 쉰다”도 앞의 어떤 부분과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푸꾸옥 유일한 극장 독점하고 <분노의 질주> 4편 즐깁니다.

그런데 몇 번을 읽다 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것들이, 쉼표를 통해, 묘하게 스며드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교정의 숙수가 고백합니다. 쉼표에 충분히 머물며 다시 읽어보세요. 그러고 보니 그렇죠?


든든한 모녀. 모처럼 깔맞춤.

쉬고 보니 그렇습니다. 최고존엄 쉼표의 위격에 새삼스레 눈 뜹니다. 어우러지지 않을 것들이 쉼표 하나로 하나 되네요.



어린이 수영장 독차지.
미끄러지는데 기분 좋은, 거의 유일한 사건.
엄마랑 첨벙첨벙.
죠, 죠스가 나타났다!
아빠와도 첨벙첨벙.
Gym에서 빨갱이 두드리니, 마음의 짐이 사그라듭니다.

무술년이 부추긴 일상의 모순을 富國의 쉼표로 호이짜 뛰어넘습니다.


Comma, 깜언(cám ơn, 感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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