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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품은 낙선재

창덕궁 2

by 남궁인숙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덕궁을 찾았기에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창덕궁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기운에 압도당했다.

거대한 전각들이 품고 있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느껴져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풍경보다도 더 아름답고 장엄했다.

대한민국 정말 멋지고, 좋은 나라다.

난 참으로 단순하게 좋은 것을 보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너무 좋다.

창덕궁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롭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낙선재'였다.

화려한 궁궐 안에서도 단아하고 조용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은 다른 곳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낙선재'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그곳에는 왕실의 일상과 사랑, 그리고 숨겨진 역사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닌, 시간이 멈춰있는 듯했다.

낙선(樂善)'의 뜻은 '선을 즐긴다'이다.

맹자에 나오는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기며(樂善), 게으르지 않은 것(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낙선재가 지어진 시기는 1847년 (헌종 13년)에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특히 왕비나 대비,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조용하고 단아한 형태의 건물로, 사대부 가옥과 유사한 분위기를 지녔다.



낙선재(樂善齋)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이곳에서 거주했던 인물 중에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 씨'가 있었다.

헌종은 조선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조선의 24대 왕이었다.

헌종의 중전 간택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헌종은 중전을 간택하는 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었으나, 왕의 뜻대로 간택을 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여성과 혼인하게 된다.

헌종은 중전 간택자리에서 다른 여인과 혼인을 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자, 나중에 경빈 김 씨를 다시 후궁으로 책봉하게 된다.

헌종이 선택하지 못한 그 여성은 2년 후에 다시 만나 '경빈 김 씨'가 되었다.

헌종은 특히 경빈 김 씨와의 관계에서 더 깊은 애정을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빈 김 씨는 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후궁으로서 후사를 남기지는 못했고, 헌종 역시 후사 없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헌종의 안타까운 사연과, 궁중 혼사에서 왕조의 정치적 압력과 개인적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한 역사를 보여주었다.

헌종의 후궁 경빈 김 씨는 낙선재에서 기거하며 삶을 보냈으나, 헌종의 사후, 경빈 김 씨는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낙선재에서 이주하여 안국동으로 나와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낙선재는 그 자체로도 소박하고 정적인 공간이었으며, 경빈 김 씨의 삶이 담긴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낙선재의 고요한 정원은 헌종과 경빈 김 씨의 사랑이 담겨 있는 곳,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한 궁중의 이면에서 피어난 조용하고 진실한 감정의 꽃이었다.

작고 소박한 낙선재 안에서 헌종은 왕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고, 경빈 김 씨와의 시간을 보내곤 했을 것이다.

그들은 복잡한 궁궐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낙선재의 정원을 산책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눴을 것이고, 그런 김 씨는 헌종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그의 고뇌를 이해했고, 헌종은 경빈 김 씨의 단아한 모습과 지혜로움을 사랑했을 것 같다.

그들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사랑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궁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낙선재는 그들에게 작은 피난처가 되었다.

이곳에서 나눈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궁궐의 벽 속에 은밀히 새겨진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낙선재는 이후에도 여러 왕실 인물들이 거처한 장소로, 궁궐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간으로 남아 조선 후기 왕실 여성들이 자발적 은거 또는 예우의 의미로 별당에 머무는 전통의 일환이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순종 황제의 숙소로 사용했으며, 해방 이후엔 문화재 연구소로도 활용되었다.

낙선재는 전통적인 궁궐의 권위보다는 여성적이고 정서적인 공간으로 평가되며, 왕실 여성의 삶과 정치적 위상, 궁궐 내부의 권력 분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였다.

뒤뜰로 나오니 '運妃玉立(운비옥립)'이라고 새겨진 돌이 있었다.

해설사는 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하였다.

運(운): 운명, 천운, 혹은 흐르다.

妃(비): 왕비, 후궁 등의 뜻. 이 경우 후궁 ‘妃’로 해석

玉(옥): 고귀함, 순결함, 아름다움의 상징

立(립): 서다, 우뚝 솟다, 존재하다의 뜻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후궁이 옥처럼 우뚝 서 있다.' 혹은 '천운을 타고난 빈이 옥같이 고고하게 서 있다'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런 문구는 궁중 여인, 특히 후궁이지만 인품과 품위가 뛰어난 인물에게 바치는 찬사로 해석될 수 있다.

‘옥립(玉立)’은 예로부터 여인의 기품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시문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다.

玉立亭亭(옥립정정): 늘씬하고 곧은 모습

妃玉之容: 고귀하고 단정한 용모를 표현하였다.

여기서 '운기옥립(運妃玉立)'은 ‘경빈 김 씨’를 기리며, 그녀의 운명, 기품, 그리고 아름다움을 암석에 새겨 영원히 기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설명하였다.



이후에 낙선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李垠)과 그의 아내 이방자 여사(李方子)의 비극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귀국 이야기가 있다.

영친왕(李垠, 1897~1970)은 고종의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다.

1907년 일본에 강제 유학 후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며, 1920년에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한다.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에서 살았고, 해방 후에도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였으며, 1945년 해방 이후, 영친왕은 귀국을 원했지만, 당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영친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며, 일제에 협력했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승만은 왕정복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왕족은 새로운 정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 측 입장이었다고 전해진다.

남편과는 달리, 이방자 여사는 1963년 박정희 정권 때 귀국을 허락받아 이후 서울 창덕궁 낙선재 권역에 머물며, 장애아동 교육 및 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혜천학교를 설립하여 장애아 교육을 하였으며,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하였다.

자서전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입니다.(1981)'를 집필하였다.


"내가 조선의 며느리가 된 이후, 이 나라는 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 이방자 여사 -


영친왕은 결국 1963년 박정희 정권의 특별 조치로 귀국하였으나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으며, 1970년 서울에서 사망하였으며, 이 부부는 모두 서울 홍릉(洪陵)에 안장되어 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의 나의 의미 있는 하루가 지고, 그곳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쌓인 벽과 웅장한 고목의 고요함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걱정과 번뇌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저 그 공간에만 갇히지 않았고, 창덕궁 나들이는 단순한 역사 체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특히 낙선재에서 느낀 감동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작은 깨달음들이 마음속 깊이 남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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