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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큐레이터 Dec 07. 2022

방황의 역사

Chapter 3. 20살 벚꽃이 필 무렵 재수하기

그렇게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재수학원을 포기하고 독학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말이 독학 재수이지. 혼자 스케줄을 관리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재수학원은 학교처럼 수업시간, 쉬는 시간, 식사시간, 자습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해주는 반면 나는 자율적으로 내가 시간을 정하고 공부해야만 했다. 처음에 정말 막막했다. 놓았던 수능 공부를 다시 하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그 시절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따뜻한 날씨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친구들을 보는 것이었다. 


물론 같이 재수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가끔 연락을 하면 새내기가 되어 MT를 갔다거나, 학교 동기와 썸을 탄다거나 연애를 시작했다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그 당시 난 매일 시립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문제를 풀며 점심시간 잠깐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때 그 도서관 산책로에 벚꽃이 즐비하게 피어있던 게 기억이 난다. 꽃은 예뻤지만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지만 가끔 도서관 화장실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운동복 차림에 화장기 없는 무표정한 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왔다. '나 왜 이러고 살까?'


내 인생에서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이때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내 성적도 바닥을 쳤다. 다행히 6월 모의고사 때 점수가 잘 나와 '이러다 서울에 있는 대학 가겠는데?'라는 희망도 있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하던 친구에게 수줍게 호두과자와 쪽지를 건넸다. '우리 같이 파이팅해요!'


하루 12시간 한 마디도 안 하던 내게 학교 밖 세상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지루하던 재수생활도 그 친구와 서로 격려하며 최선을 다했다.

(여담, 그 친구와는 현재도 연락을 하며 지내고,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갈 만큼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낙담의 시간을 버티다 두 번째 수능날이 밝았다.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와 같은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우리 부모님은 나를 다시 한번 더 응원하며 학교까지 바래다주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면목이 없다. 1년 사이에 나는 많이 성장해 있었다. 차분히 문제를 풀었고, 19살 때와 달리 20살의 수능은 그래도 아는 문제가 많았던 시험이었다.


시험을 모두 마치고 교문 앞을 나서니 엄마가 마중 나오셨었다. 고생했다고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며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근처 뷔페식당으로 향했다. 6시 무렵 답안이 공개되었고, 나는 가채점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언어는 4개를 틀렸었고 사회 탐구 두 과목은 각각 1개, 2개만 틀렸었다.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말도 안 될 정도로 점수가 잘 나왔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해 물수능이란 평가도 있었고, 다음 해부터 입시가 바뀐다며 모두 하향 지원하는 추세였다. 도대체 어디를 써야 할까 고민을 했다. 대학 박람회에 가서 여러 정보를 얻기도 했다.


난 진작에 수포자였기에 언외탐으로 학교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여대 중에 언외탐으로 지원 가능한 학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 여대에서 내 점수를 보더니 '여기 말고 수도권에 다른 학교는 충분히 합격할 거예요'라는 말을 들었고, 한 수도권 대학에서는 '이 점수로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실 거죠?'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딱 서울 가긴 애매하고 수도권 낮은 대학 가기에 높은 점수였다. 


어쨌든 대학은 가야 했기에 1,2 지망은 내가 원하는 서울의 학교에 지원했고 3 지망은 진짜 안정적으로 합격할만한 학교에 지원을 했다. 


과연 결과는...?


1,2 지망 학교는 예비 9번에서 결국 최종 탈락하였고, 안정적이었던 3 지망 학교에 전체 수석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이때도 많이 낙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고작 결과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신입생 대상 OT에 참석하였고, 나와 같은 나이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게 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노량진 재수학원에서 1년 동안 고생한 친구도 있었고, 1년 전에도 지금 학교에 합격했으나 결국 1년 후에도 이 학교에 합격해 결국 다니게 됐다는 친구도 있었다. 


재수를 하고 그 학교에 간 나를 보고 같은 학과 선배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니?'라며 걱정의 눈길로 쳐다보기도 했다. 난 재수를 하며 자존감이 많이 낮아있었고, 멘털도 많이 약했었다. 


그렇게 1박 2일 OT를 마치고 집 앞 놀이터에서 펑펑 운 기억이 난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집에 가 엄마와 마주했다. '해도 안되는데 어떻게 하니? 삼수는 안돼!' 


맞다. 난 그렇게 1년을 더 버릴 순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이제 막 입학한 학교에 정을 주지 않고 오직 공부만 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MT라던가 학과 행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학생회비도 낸 적이 없다. 철저히 스스로 고립시켰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 스스로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교내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교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도 했었고, 밤을 지새우며 전공 공부를 해 전 과목 A+로 과 수석을 한 적도 있다. 중국어로 면접을 보고 중국 교환학생으로 발탁되어 한 학기 동안 광저우에 있었고 교내 면접 대회에서 수상을 한 적도 있다.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길 자청했으나, 열심히 하다 보니 교수님들에게 각인이 되었고, 내 도움을 받는 동기나 선배들도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학교에 입학하길 잘했구나 싶다. 아마 서울에 낮은 학교에 입학했다면, 통학하느라 고생했을 거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지 못해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을 터였다. (당시 수석 장학생으로 입학하였고, 과 수석을 한 경험도 있었기에 실제로 대학 등록금을 얼마 내지 않았다. 국가장학금 수혜자이기도 했으며, 학교 재단이 워낙 돈이 많아 장학금을 받을 기회도 많았다. 거의 돈 벌면서 학교 다닌 셈이었다.)


물론, 난 내 전공을 살린 직업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하여 단 한 푼도 벌지 못했다. 가끔 이럴 거면 왜 재수를 했고, 대학을 왜 나왔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대학이란 비단 취업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사회로의 첫걸음을 잘하기 위한 디딤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정해진 루틴대로 정해진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 '강제성'이 두드러지는 반면, 대학교에서는 스스로 과목을 선택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하는 '자립성'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아마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난 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고,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여전히 인내하며 해야만 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 공부하기 싫은데 대학을 꼭 가야 하나요?라고 물어본다면, 취업을 잘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경험을 위해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난 아싸였지만 높은 성적을 유지해 '교수님들에게 주목받는 아싸'가 되었고, 다시 전공과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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