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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이랑 Mar 30. 2024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 수메르

feat. 아카드 왕국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 체계의 많은 것들은 약 6,000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에서 발원했습니다. 문자와 바퀴, 최초의 학교, 촌지, 의회, 법전, 건축, 의학서, 비행 청소년 등등 별의 별 게 다 있었죠. 또 당시 쓰여진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서는 명예, 우정, 생로병사 등 고차원적 사유가 흥미진진한 서사에 담겨 전개됐는데요. 이처럼 단번에 높은 수준의 문명이 뚝딱하고 나타나다 보니 많은 이들이 수메르의 외계 문명설을 주장하기도 하죠. 도대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길래 수메르에서 이렇게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이 뚝딱하고 생겨나게 된 걸까요?



일단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이죠. 메소포타미아는 우리가 학창 시절 지겹게 들었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해 있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땅을 말하는데요. 이곳 땅은 두 강이 상류에서 실어온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충적토이자 비옥토였어요.


여기에 기원전 6,500년경부터 지금의 오우에일리(’Oueili)에 사람들이 들어와 최초로 마을을 이루고 보리와 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겁니다. 이때 이 수메르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수메르인'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기원은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수메르인들이 정착한 후 천 년이 흐른 기원 전 5,400년 경, 바다에 인접한 곳에서 마을 규모를 벗어난 최초의 도시가 생겨나요. 바로 '에리두Eridu'라는 도시죠. 에리두는 풍요로운 땅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토기를 만들어 적극적 상업과 교역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에리두를 필두로 북서쪽의 우루크Uruk나 그 아래 우바이드Tell al-’Ubaid같은 도시 국가들이 하나둘 추가되기 시작하죠.



그렇게 여러 도시들이 생겨난 후 천 년이 지나자 에리두의 전성기가 지나고 키시와 우루크라는 두 도시가 수메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 끝에 우루크가 키시를 누르고 수메르의 패자가 되죠. 이 때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이 바로 우루크 5대 왕 길가메시였어요. 그렇습니다. 길가메시는 단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던 걸로 추정돼요. 그의 영웅담이 오랫동안 수메르 지역에서 전승되면서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길가메시가 탄생하게 된 거죠.



우루크, 자연을 극복한 최초의 도시


그렇게 길가메시 이후로 기원전 4,000년 경 우루크가 수메르 지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수메르 문명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성기는 풍요로움이 아닌 치명적인 위기로부터 시작했는데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인구가 증가해 경작지가 부족해진 겁니다.


그래서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농토를 넓히기 위한 관개 시설 구축이었어요. 수메르인들은 각자 마을에서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물길을 내 농경지에 물을 댔습니다. 그러나 이 소규모 관개 시설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여러 촌락이 연합해 대규모 운하를 만들게 돼요. 본격적으로 천수에 의존하지 않는 인공 농업이 시작된 거죠. 그렇게 수메르는 협력을 통해 식량 위기를 극복한 최초의 문명이 됩니다.


그러나 대규모 관개 시설을 구축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거예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하고, 운하로 끌어들인 물을 아무 잡음 없이 골고루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단순 왕이나 대사제 뿐 아니라 그들을 중심으로 한 행정 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관리형 엘리트가 출현하게 된 거죠.


이렇게 체계화에 돌입한 수메르 도시들은 인구 집중과 도시 특유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급격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괭이로 땅을 파다가 소를 이용한 쟁기로 땅을 쉽게 갚아 엎을 수 있었고요. 인공 경작지가 넓어지고 농업 기구가 발달하니 수확물이 늘어났으며, 이를 손쉽게 옮기기 위해 바퀴가 동원되었고, 소를 이용한 짐수레가 만들어졌죠. 또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니 그것을 썩히기 보다 다른 도시와 물물 교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먼 곳까지 많은 물자를 나르기 위해 돛을 발명해 범선을 만들어 바닷길을 열었고요. 이왕 바닷길이 열렸으니 물레를 이용해 대량으로 도기를 제작해 내다 팔고 수메르 지역에 모자란 나무와 광석을 들여오기 시작했죠. 특히 구리와 주석을 들여와 청동기를 만들었으니. 이때부터 청동기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전쟁의 시작


우루크에서 도시화의 물꼬가 터진 이래로 기원 전 3,000년 경에서 2,500년 경 사이 수메르 지역의 80퍼센트 이상이 도시가 됩니다. 여기서 도시란 직업의 종류가 농민에 국한된 것이 아닌 수십 수백 개로 다양해지고, 단순 친족 집단을 넘어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생존을 맡기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당시 가장 큰 도시 우루크에는 마을의 수가 10배 이상 늘어났다고 하죠.


한 편 이렇게 도시 내부적으로는 네트워크의 안정화로 나아갔다면 반대로 도시 외부적으로는 묘한 긴장감이 일기 시작하는데요. 이를테면 청동을 재료로 '검'이라는 발명품이 생겨나요.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 마디로 오로지 싸움을 위한 고급 살인 도구가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검의 발명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이후 물레와 짐수레에 쓰였던 바퀴가 군사용 전차에 이용되었고요. 통나무를 둥그렇게 잘라 사용했던 바퀴에 바퀴 살이 추가됨으로써 사륜전차에서 기동성 좋은 이륜전차로 개량이 이루어졌죠. 한 마디로 도시 간 치열한 군비 경쟁이 시작된 겁니다. 그렇게 전쟁 준비는 기계 문명을 더욱 가속화시켰어요.


도시들은 너도나도 성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피땀 흘려 일하는 것보다 다른 지역에 침입해 물자를 빼앗는 것이 다른 공동체보다 앞서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한 개인의 용기와 리더십을 시험할 기회였으며, 이 때 두각을 나타낸 자는 다른 이들보다 권력의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세습 왕조의 왕이 될 수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작은 도시들은 점점 큰 도시로 병합되면서 전쟁 포로가 생겨났고 노예를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노예 경제가 시작되었죠.


정리하면, 이처럼 도시는 공동으로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제도와 기술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장場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나 기술은 소수 지배 계급의 효과적 통치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피지배 계급의 강제 노동과 전쟁 동원 그리고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주지는 못했어요. 도시 생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이들이 현실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데올로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였죠.



수메르의 종교


서로 모르는 대규모의 사람들을 매일매일 관개 시설을 구축하는 데 동원하고,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나가게 하며,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은 단 몇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시스템에 복종하게 할 세련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죠. 수메르 문명에서는 종교가 그 역할을 했어요. 한 편 종교는 통치 세력에게도 필요했지만, 공동체 구성원끼리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자신의 생존을 친족이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만큼 최소한의 연결고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바로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었죠. 서로의 믿음을 져버렸을 시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도덕의 강제력을 믿는 겁니다. 여태껏 실현된 적 없던 광범위한 협력 네트워크는 그렇게 종교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상이 실재를 만든 거죠. 물론 이는 역사적·사회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고, 철학이나 종교적 관점에서는 애초에 인간이 세속적인 것 이전에 초월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형이상학적 동물이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쨌건 수메르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연에는 인간을 넘어선 위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그 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죠.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도 그럴 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홍수와 가뭄이 인간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좌우 했기에 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공포심이 자연 숭배 사상을 낳았고 특히 농사와 관련된 여러 신들이 하나하나 생겨나기 시작하죠. 그렇게 신이 하나하나 늘어가다 보니 어느새 2~3천 명 정도의 신이 생겨 다신교 체계가 잡히게 돼요.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45만 년 전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왔는데 이들을 아눈나키Anunaki라고 불렀습니다. 주신은 아누Anu로 그는 하늘An에 머물렀죠. 그리고 아누의 두 아들 엔릴Enlil과 엔키Enki가 아눈나키들과 내려와 지상에 문명을 건설했는데요. 아눈나키들이 문명을 건설하는 도중 그만 과도한 노동에 불만을 품어 반역을 일으키고 맙니다. 이에 엔릴과 엔키는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를 재료로 흙을 섞어 인간을 창조하게 되죠. 신들 대신 노동에 활용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인간의 수가 너무 많아지는 게 문제가 됩니다.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눠 반신반인이 태어나기도 하고요. 신들의 기술을 인간이 알아내는 사고마저 생기게 되죠. 결국 엔릴은 인류의 수를 줄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는 기근을 일으켰고요. 그 다음으로 대홍수를 일으킵니다. 그 때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오랜 기간 다시 인류를 재건해 수메르 문명을 일으켜 우루크 시대까지 오게 된 거죠. 수메르인들은 이 신화를 실제 역사라고 생각했어요.



지구라트


수메르인들은 각 도시마다 수호신을 섬겼고 도시 한 가운데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수메르 지역에는 나무나 금속이 모자란 대신 고운 점토가 넘쳐났거든요. 수메르인들은 이 흙을 가마에 구워 건축에 이용했어요. 특히 평평한 토단 위에 벽돌로 신전을 높게 세워 홍수에도 끄덕 없게 만들었죠. 이는 늘 변화하는 자연 현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이 신전을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불러요. 지구라트라는 '높은 봉우리'를 뜻하죠.



지구라트는 벽돌단 위에 벽돌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연결했으며 그 꼭대기에 사원을 올렸어요. 수메르인들은 마치 하늘에 닿는 것이 목표인 양 신전을 점점 높이 쌓아나갔습니다. 신화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아마도 이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을 거예요. 그 결과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30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죠. 이 지구라트는 일정 시기 한 도시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민족이 건조한 거예요. 그만큼 크기나 형태도 다양하고, 이 지구라트가 이후 피라미드 건축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도시 국가에서는 이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도시 생활 전체가 돌아갔어요. 지구라트의 사원에는 사제가 있었고, 사원에는 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도구와 악기가 있었었습니다. 또 지구라트에는 이러한 종교적 기능 뿐 아니라 행정 기능도 탑재해 있었는데요. 도시 전체의 식량 분배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죠. 모든 생산물은 신의 소유였기에 각 마을에서 추수한 곡식이 지구라트에 모였고요. 이 곡식은 각 도시의 원칙에 따라 분배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신분에 따라 분배가 됐을 거예요. 신분의 꼭대기는 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모든 토지를 관리했고, 그 아래 신관과 군인이 지배층을 형성했으며, 평민과 노예가 피지배층을 형성했어요. 이 계층 구성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의 전형이 됩니다.


또 지구라트에는 여러 전문직 사람들이 속해 있었는데요. 제빵사, 방직공, 이발사, 보석상, 세탁부, 화가 등이 있었죠. 무엇보다 손글씨를 직업으로 하는 필경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인 즉, 수메르 문명에 문자가 있었다는 의미겠죠.



인류 최초의 문자 등장


수메르 문명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자는 '수량'을 표시하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숫자가 없던 당시에는 자신이 수확한 곡물이나 가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진흙을 빚어 표시했는데요. 이것을 '물표'라고 합니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사용된 각기 다른 모양의 물표들은 농산물이나 가축과 대응됐죠. 가령 구 모양의 물표는 곡식, 세모는 동물, 원반은 하루 노동량을 의미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물표에 대응되는 생산물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직물이나 금속, 빵, 맥주 등이 발명될수록 물표도 따라 늘어갈 수밖에 없었죠. 처음엔 12개 정도에 불과했던 물표가 우루크 시대로 넘어가면 350종류가 돼요. 결국 수메르인들은 물표와 지시 대상의 일대일 대응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진흙 위에 복잡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토판을 보시죠.



이는 기원전 2천 6백년 경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보리를 신전에 맡기고 받은 영수증이에요. 29,086자루의 보리를 37개월에 걸쳐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쿠심'이라는 회계 담당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이름이 이 금융거래 영수증에 새겨져 있는 거죠.


이렇게 수메르인들은 점차 복잡한 상징 체계를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는 문자와 숫자 형성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특히 수메르 문명은 날카로운 갈대로 점토에 문자를 새기는 쐐기 문자를 발전시켰습니다. 설형문자라고도 하죠. 이제 수메르에서는 온갖 것들이 점토판 위에 새겨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대개 상업 거래, 토지 매매, 보수 지급 등 경제 행위를 다루는 문서가 주였어요. 그 증거로 우루크에서 점토판은 대부분 경제 행위가 이루어졌던 지구라트에서 발견되었죠. 수메르 전역에 학교가 있었고, 공식적으로 문자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때 생겨난 문자는 훗날 페니키아로 이어지고 페니키아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으로 이어지죠.


문자의 발명은 수메르의 경제 체계를 더욱 고도화 했고, 이는 사유재산 확립과 계급화를 더욱 촉진해 복잡한 사회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보잘 것 없는 인간 기억 용량을 문자로 극복한 첫 번째 사례잖아요. 이제 수 만명의 세금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국가가 얼마 만큼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미래의 기대 자원 및 그에 따른 인구 증가를 예상할 수 있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 말인 즉, 도시 국가는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왕국 더 나아가 제국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가능성은 더욱 잦은 국가 간 전쟁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카드 왕국의 탄생


기원전 2,900년에서 2,800년 경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수메르 지역을 덮쳤습니다. 이에 에덴이라고 불리는 비옥토를 차지하기 위해 도시국가 간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우루크는 점차 쇠퇴하고 라가시와 움마라는 두 도시국가가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되죠. 그렇게 두 도시는 약 250년 간 엎치락 덮치락 전쟁을 이어갔고 마침내 루갈자게시의 활약으로 기원 전 2359년 움마가 수메르의 최종 패자가 됩니다.


한 편 움마의 속국 키시에 우르-자바바라는 왕이 있었어요. 그에게는 사르곤이라는 충직한 부하가 있었는데 사르곤은 북쪽에서 온 이방인이었습니다. 키시라는 도시 자체가 남북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수메르인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온 이주민이 섞여 살고 있었거든요. 이 이주민들을 셈족인 아카드인이라고 불렀어요. 셈족은 오늘날 아랍인이나 유대인처럼 셈어를 쓰는 민족을 가리킵니다. 사르곤 또한 이 셈어를 쓰는 아카드인이었는데요. 그런 그가 군주인 우르-자바바를 제거하고 키시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군해 루갈자게시를 죽이고 수메르 전 지역을 점령하죠.



그렇게 사르곤은 여러 도시국가를 하나로 묶어 기원 전 2334년 아카드 왕국이라는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합니다. 사르곤은 기존 수메르 통치자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의 자리를 보장해줬어요. 또 수메르인들의 종교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융화정책을 펼쳤죠. 다만 언어만은 수메르어가 아닌 아카드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그렇게 수메르 지역에 아카드어 문서가 점점 늘어나고 셈어인 아카드어 DNA는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면면히 이어지죠.


아카드 왕국은 약 200년 간 유지됐어요. 수시로 수메르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혹독한 가뭄이 또 한 번 찾아왔으며, 결정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동쪽 자그로스 산맥에서 온 구티족의 침입으로 기원 전 2154년 아카드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메르 지역은 자신들이 야만족이라고 부르던 구티족의 지배를 받게 돼요. 그러나 구티족은 딱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했을 뿐이죠.



수메르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2154년 쿠티가 아카드를 무너뜨린지 34년 만에 우루크의 왕 우투-헤갈이 구티족을 수메르에서 몰아냅니다. 아카드 왕국이 들어선 후 214년 만에 수메르가 해방을 맞은 것이죠.


그리고 2112년 수메르인들이 구티족을 몰아내고 다시 한 번 수메르 지역을 통일합니다. 이를 우르의 우르-남무가 개국한 우르 3왕조라고 불러요. 우르-남무는 최초로 사회에 '정의'라는 관념을 주입시킨 왕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최초의 법전 '우르-남무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한데요. 이 법전에서는 부패 관리를 단속하고, 공정한 도량형 제도를 관리하며, 고아나 과부를 보호하는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우르-남무 법전은 3백 년 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우르-남무가 사회 정의에 관한 관념을 닦았다면 그의 아들 슐기 왕 대에 수메르 문명은 문화적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는데요. 슐기 왕은 48년의 재위 기간 동안 학교를 세우고, 필경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수메르어로 전해지던 찬미가를 정리해 기록하죠. 수메르어 찬미가에는 길가메시라는 영웅을 슐기 왕과 연결하는 시도도 보입니다. 그 밖에 현재 가장 보전이 잘 되어 있는 달의 신 난나를 모시는 지구라트와 황금 투구, 악기, 보드 게임 등이 모두 우르에서 발굴되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우르의 깃발'이라는 장식품이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러나 우르 3왕조의 이러한 번영도 잠시 기원 전 2004년 엘람을 주축으로 한 '자그로스 종족 동맹군'의 공격으로 수메르인이 세운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수메르 지역에서 엘람인을 몰아낸 것은 유목민이자 셈어를 쓰는 아모리인들이었어요. 이들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시리아 제국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가게 되는데요. 이들은 물리적으로 수메르 지역을 차지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메르 문명의 전파자가 되고 맙니다. 다양한 종족들은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자, 관료제도, 종교, 법률, 건축 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수메르적 생활방식을 후대에 전해줬으니까요. 그렇게 수메르 문명은 최초이자 최고의 문명으로 인류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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