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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책 10선

by 상담군

2023년보다 더 발전해 2024년에는 대략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작년에 읽은 책을 지면을 통해 기록하고자 한다.


10. 분자 조각가들 - 백승만


'분자 조각가들'은 신약 개발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약이란 인간의 몸에 들어와 균을 처치하고 유해물질을 정화하며 호르몬과 효소의 농도를 조절하여 생체시스템의 작동을 회복시키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하는 알갱이이다. 우리는 아프면 약을 먹는 것에 익숙하여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단지 분자일 뿐인 약물이 어떻게 복잡한 유기체의 신체에 들어와서 제작자가 기대하는 작용만 초래하고 사라지는가? 그것은 이 엄격한 확률의 세계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병원과 약국에서 매일같이 이뤄내고 있는 기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단백질로 빚어낸 건축물이며, 이 재료들은 또 수만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효소도 호르몬도 기본적으로 단백질이다. 그래서 결국 약을 만드는 과정도 분자를 조각해 그 양이 아주 많은(수백 ~ 수천개의 원자가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는) 덩어리를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자는 너무 작아 레고를 조립하듯이 원하는 원자를 지정된 위치에 배치하는 공정을 할 수 없으며, 다른 생물의 효소를 추출하거나 화학 반응을 발생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이 책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 실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생물학과 화학의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하며 안내한다. 마법의 원리를 아는 것은 특별한 기쁨이 있다. 특히 문과로서 내가 익힌 지식이 자연과학적인 것이었다면 그 감정은 두배로 늘어난다. 책의 말미에 이제는 기계를 이용하여 동시에 수백만개의 가장 단순한 분자조립을 시험하고 그 중에 신약이 될 수 있는걸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기술이 지식축척의 속도를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앞당겼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전율을 느꼈다.


9. 수확자 - 닐 셔스터먼


인간이 영생을 누리게 되면 미래에는 인구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 '수확자'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 SF소설이다. 나노기술 덕에 인간은 몸에 어떤 손상이 생기건 다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높은 건물 위에 떨어져서 임사체험을 하는 '철퍽'이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새로 태어나야 하고, 그러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인류는 그들의 구성원 중 일부를 말 그대로 저승사자로 뽑았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제거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철저하게 수확자의 자의에 있다. 말하자면 신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수확자가 되는 수련을 받게 되며 그들만의 리그로 진입한다. 어떤 수확자는 철저하게 과거 사망시대 - 수명이 다하거나 사고가 나면 사망했던 - 의 통계에 따라 거둘 사람을 정한다. 다른 수확자는 사람을 거두는 일을 일종의 종교 의식을 치루듯 신성히 한다. 그들에게는 수확을 유예할 권한 또한 주어져 있기에 수확한 사람의 가족들에게 일년의 유예 기간을 제공한다. 역시 이 권한 마저도 임의이므로 수확자는 언제든 신을 꿈꿀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실제로 이 권한을 이용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수확자도 있다. 죽이겠다는 채찍과 불사의 기간을 일년 주겠다는 당근을 이용하여 부와 권세와 말초적 쾌락마저 누리는 수확자들의 존재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면서 주인공과 함께 공분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수확자가 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모든 과정에 마치 보드게임 규칙같은 제약의 원리가 있어서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등장인물들을 볼 때는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할 때는 마치 이 책을 통해 진중한 사색을 한다는 느낌도 있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문체와 쉬운 내용과 현실적인 미래사회의 묘사덕에 처음에 킬링타임용을 기대했다 묘한 여운마저도 얻게 된다. 여기서 소개하는 목록 중 유일하게 입문자도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8. 새벽의 약속 - 로맹 가리


작년 독서모임에서 다룬 책이다. 로맹 가리는 문장 때문에 찾게 되는 작가이다. 나는 이 작가를 '뜨거운' 문장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꼽는다. 같은 장면을 가장 감정 동요를 일으키도록 묘사하는 것이 문학의 묘미라고 보는데, 로맹가리는 대놓고 그런 의도를 보인다.

로맹가리의 '엄마'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를 고통스러운 감정 안에 가두어둔 사람이기도 하다. 생계를 유지하고 교육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갈아내어 아들을 키우는 그녀의 모성은 눈물겹다. 그리고 섬뜩하다. 그녀는 자신이 기대하는 특정한 모양으로 자녀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린애같은 떼와 구슬픈 눈물과 반복된 잔소리는 제 3자의 입장에서 히스테리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주인공은 매번 엄마의 행동에 굴복하게 된다. 종종 그녀의 아들에 대한 분별없는 이상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들을 역사적 위인이라고 떠드는 그녀의 태도에 주인공은 죽음과 같은 수치심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은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감시와 괴상한 행동을 일삼는 모자(母子)에 대한 주변의 시선 모두에 있다. 그는 이러한 기괴한 사랑 안에서 마치 트라우마 생존자 같은 삶을 살며 결국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로맹가리는 형용사와 부사가 가득한 화려한 문장을 씀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이러한 문체에 버릴게 없다는 것이 신기해서 나는 작가가 어디까지 이 곡예가 이어지는지 시험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식을줄 모르는 지면의 온도가 위대한 작가의 기술적 능력인지 아니면 모성에 대한 자서전적 체험에서 비롯된 특별한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7. 이성적 낙관주의자 - 매트 리들리


매트 리들리는 이성이 낙관주의를 선택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미 『지금 다시 계몽』, 『휴먼카인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팩트풀니스』에서 만난 과학적 낙관론 책이다. 이 저자는 내 입장에서 좀 너무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이다. 그는 기술 혁신이 종래에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한다. 이전의 책들보다 이 저자의 시선은 더 노골적이고 더 낙관주의적이다. 책을 덮을 때 마치 내가 천국 - 죽어서 가는 곳 말고 이 세상에 펼쳐질 유토피아 - 으로 가는 열차를 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통계를 사용하지만, 우리의 인식을 바로잡는 기술이 더 절묘하게 느껴진다. 하루 여덟시간만 일하면 야채와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자녀들은 20살까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나무를 베러 가지 않아도 집을 데울 수 있고, 밸브를 돌리면 물이 원하는 만큼 쏟아져 나오는 곳. 이곳은 현대이다. 이런 삶이 선택가능하다고 하면 1800년대 이전의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것이다. 이처럼 저자가 구사하는 통시적 비교는 내가 가지고 있는 혜택을 손에 잡힐듯 묘사한다.

자동차가 없는 시대에는 유일한 자가용이 말이다. 말을 타고 다니느라 일년에 말똥이 5cm씩 쌓인다면? 우리는 20년 뒤에 1m의 말똥 속을 헤엄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금방 하수도가 건설되고 기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술 혁신'으로 저자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마술의 원리이다. 이 논법은 현대의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 공기가 오염되고 쓰레기가 가득 차고 지구가 더워지는 이런 일들이 종래에는 종말을 초래할 거라는 주장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미래에 무리하게 외삽하기 때문에 내놓는 결론이다. 기술 혁신은 이미 여러 환경오염의 고비를 넘기도록 도왔고 앞으로는 그 힘이 더 강력하게 발휘될 것이라는 예측을 저자는 하고 있다.

저자는 기술혁신 대신 규제를 선택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자유무역과 확장된 의사소통은 혁신의 속도를 더 높일 것이고 우리를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할 것이며, 이러한 지적 물적 풍요가 세상 사람들을 더 환경에 대한 고려로 이끌 것이다. 오직 앞으로 가는 것만이 해답이라는 이 주장은 너무 단순 명쾌하여 반박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하지 못했다. 이 책이 그리는 밝은 미래의 상은 더욱 대담하고 근거도 많아서 확실히 더 새로웠다.


6.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참사들에 대한 변명을 하는 책인 줄 알았다. 전쟁은 다 남자가 일으킨 거고 여자들은 책임 없다고, 그저 가련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저 그런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 책은 일종의 전쟁 체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한 러시아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모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도 하고 있다'로 제목을 바꾸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참전하게 된 계기에 관해 구술되어 있다. 조국이 나치들의 침략에 신음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두고 볼 수 없어서 분연히 일어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전쟁에 참여하면 다치거나 죽을 수 있으니 당연히 누구나 피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징집 대상이 아니라서 계속 반려하는 모병사무소를 상대로 끝끝내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여 전쟁터에 나가는 여성들을 보며 인간의 동료애와 애국심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것보다 숭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들에 못지 않은 활약을 하고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러시아 조국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총을 쏘고 시체의 산을 넘어 돌아온 그녀들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었던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체 이 시대 - 1950년대 - 는 여성성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분노 어린 의문이 들기도 했다.

'땔감보다 시체가 많았다'라는 표현이 이 책에 등장하는데 나는 다큐멘터리로서의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팔다리가 제거되거나 얼굴이 깨지거나 장기가 파손되거나 온갖 방법으로 다친 사람들과 피와 총성과 인간 이하의 비참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기억도 묘사도 잘하는구나 싶었고 전쟁의 참상을 배우는 목적으로도 이 책이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은 책장을 덮고 나서 다르게 읽혔다. 전쟁은 여자와 남자 모두가 참여한 재난이지만 그동안 전쟁에서 여성의 공과 고통을 지워냈다는 의미로 말이다.


5. 물질의 세계 - 에드 콘웨이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이 여섯가지 물질을 다룬다. 익숙한 이름들이지만 어디서 구할 수 있고 무엇에 쓰이는지는 잘 설명하기 어렵다. 이 책은 첫부분에 지금이 철기시대, 구리시대, 소금시대, 석유시대, 리튬시대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며 시작되는데 책을 계속 읽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모래로 유리를 만드는 줄은 다 알고 있지만 특별한 유리는 원료로 쓸 수 있는 모래가 정해져 있다는 건 잘 모른다. 아주 투명한 유리, 그러니까 전자제품이나 현미경에 써야 하는 유리는 순도가 높은 실리카 모래인 백사로만 만들며 이는 구할 수 있는 곳에 정해져 있다. 휴대폰과 전기차에 쓰이는 배터리는 리튬으로 만드는데, 가장 좋은 리튬은 칠레의 소금 사막에서만 구할 수 있다. 대량으로 저가로 이러한 물질을 채취하면서 대규모의 정제시설까지 설치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만일 칠레의 리튬 채취시설에 테러가 가해진다면 전 세계의 전자제품 공정은 멈출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원리를 설명하는 '물질의 세계' 를 읽고 나면 왜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핵심 공정에 대해 그동안 이렇게 무지했나 무릎을 치게 된다.


4. 읽지 못하는 사람들 - 매슈 리버리


이 책은 '읽기차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소개한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읽는다는 것이다. 제목은 '읽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다르게 읽는다니? 난독증, 자폐증, 실독증, 조현병, 공감각자, 치매라는 여섯 가지 사례가 등장하며 이들은 이 특성이 없는 사람들과 다르게 읽는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책을 통째로 외우기도 하며, 공감각자는 문단에서 치킨맛을 느낀다. 조현병이 있으면 글에서 환각을 볼 수 있고, 치매 환자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난독증의 사례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별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단지 읽지 못할 뿐인데, 그러니까 다른 생각하는 힘에는 문제가 없는데 바보 취급을 당하고 낭독할 차례가 오는게 싫어 학교를 그만두거나 비행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창피당하는게 싫어 책을 통째로 외워서 낭독을 하는 척 하면서 외운 내용을 읊기도 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제를 우회하기 위해 이들이 어떤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를 보면 난독증이 게으른 것도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반면 실독증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후천적으로 잃게 되는 사태인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쓰기 능력은 여전히 발휘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편지를 다 써 놓고, 그 내용을 다시 읽어 이해하지 못히는 사례에서 우리의 언어능력이라는게 얼마나 세밀하게 쪼개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읽는 행위에 대해 생소한 신기함을 느끼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읽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는 '신경전형인'이라고 부른다. 다른 방법으로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글의 지면에 눈을 조준하고 이를 일종의 메아리로 바꾸어 나의 장기기억과 대조하는 이 활동이 새롭게 보인다. 보기부터 해석하고 기억하기까지 수많은 깨지기 쉬운 세밀한 과업들을 아직까지 무사히 해냈다고 해서 이것을 당연하다고 그리고 내 방법이 정상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작가의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3. 흰 - 한강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 두 달에 걸쳐 『흰』,『희랍어 시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두께로도 서사로도 『흰』은 이중 가장 얇은 책이다. 제목을 보고 고통스러운 내용은 없겠거니 해서 가장 먼저 고른 것도 있다.

표지를 여는 순간부터 덮기까지 '쉼 있는 몰입' 상태를 경험했다. 책을 덮지 않은 상태로 여운에 잠기며, 생각을 마치면 즉시 다음 일화를 찾아가게 된다. 익숙한 흡인력이 없는데도 느슨하게 나는 빠져나가지 않고 이 책을 놓지 않게 되고 마지막장을 덮은 후에야 읽기를 그만둔다.

문장은 자연과 감정을 묘사하고 그것은 시종일관 차갑고 청명하며 감각적이다. 사람이 말하거나 생각하는 형태로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주변에 보이고 느껴지는 하얀 것들을 회화처럼 그리기만 한다. 한강의 문체로 이루어지는 붓질에 메시지는 은근하게 담긴다. 눈, 진눈깨비, 안개, 소복, 초 같은 것에 관해 이들이 존재하고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할 뿐인데 화자의 마음 속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게 투명하게 보인다.

그녀가 던지는 익숙한 주제인 죽음과 이별을 이 책에서는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만나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조용하게 이 고통을 삼키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 내막을 알게 된 화자가 마치 자신이 언니의 삶을 대신 살거나 혹은 언니가 살아있고 그 결과로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특한 세계관 안에서 모든 '하얀 것'들에 대해 쓴다.

하얀 것들에 대한 형상화로 단행본 한 권을 채우는 한강의 글쓰기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면서 두 번 읽은 이 책의 마지막 표지를 덮을 때마다 생각나는 글감과 표현들이 마치 글쓰기 교본을 공부한 듯 하다. 노벨문학상은 다른 문학을 태어나게 하는 힘을 준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작년 읽은 100권이 넘는 책 중 단연 가장 탐나는 문장이었고, 올해는 다른 책으로 더 자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다.


2. 욕구들 - 캐럴라인 냅


캐럴라인 냅은 세 가지 중독에 빠진 적이 있다. 굶기, 술, 강아지. 그녀는 자기 중독을 자선적으로 세 책에 각각 『욕구들』,『드링킹』,『개와 나』에 담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이 세 권의 단행본에서 독자는 마음이 어떤 원리로 작고 치명적인 것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는지 볼 수 있다.

특히나 거식증에 관해 다루는 이 책은 가장 나중에 쓰여서 그런지 사유의 깊이가 다른 두 책에 비해 깊고 마치 다큐멘터리나 자서전 같은 두 책에 비해 인문학 서적에 가깝다. 정신분석가 아버지를 두고 있어서 그런지 글이 전부 '정신분석적'이다. 컴플렉스와 욕망과 도덕감이 흔들리고 춤추고 요동쳐서 파괴적인 행동을 빚어내는 과정을 치밀하게 기술한다. 나는 캐럴라인 냅의 문장을 수집하듯 읽으며 언제든 나도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그녀처럼 언어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곤 한다.

정신병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거식증은 무서운 병이다. 사망률도 높고 우울증 등 다른 병이 동반되기도 쉽다. 생명 그 자체인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캐럴라인 냅은 사과를 아주 얇게 투명하게 잘라 그 위에 치즈를 얹어 먹는 자신만의 의식을 치르며 하루 200kcal로 살아가는데, 온 몸에 뼈만 남아 삐걱거릴 때까지 이 식습관을 반복한다.

먹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행위 중 하나일진데 왜 그걸 거부할까? 먹는 것은 욕망의 가장 일차원적인 충족이다. 그런데 삶은 어찌 보면 많은 측면에서 욕구와의 싸움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원하는 물건을 사는 것도 참고, 분노도 억눌러야 하니 어쩌면 인간에게 유일하게 중량감 있는 과업들은 욕구의 제한 뿐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여성은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사회적 예절을 지키기 위해서 빈번히 식욕을 억눌러야 한다.

잘 참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면 어쩌면 거식증 환자는 욕구와의 싸움에서 영원히 승리한 사람일 지 모른다. 저자는 또래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모두가 칼로리를 제한하면서도 동시에 다이어트에 관심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장면을 통해 이 화제거리 혹은 경쟁거리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거식증은 어머니에 대해 원망과 죄책감을 함께 처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여자는 항상 조신하고 으스대지 말고 사회적 성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해'라는 메시지로 가부장제의 억압을 상속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성에게 허용된 것이 많아짐으로서 훨씬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딸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어머니에게 복수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굶기의 클라이막스로 저자는 깡마른 어깨를 일부러 가족들에게 드러낸다.

한 권의 책 안에 애착과 사랑,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 가부장적 문화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일삼는 미디어까지 '굶기'를 중심으로 한 욕구의 세계에 관해 저자는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용보다 더 좋은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언어를 부여하는 그녀의 신기한 능력으로, 2024년 이후 캐럴라인 냅은 나의 글쓰기 선생님이 되었다.


1. 행동 - 로버트 M 셰폴스키


올해 최고의 책은 역시 과학책이다. 특히 이 '행동'이라는 책은 단순한 제목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정보를 축약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목차의 각 챕터 이름은 '1초 전', '몇 초 전부터 몇분 전', '몇분 전부터 몇 시간전', '몇 시간 전부터 며칠 전', '며칠 전부터 몇달 전'...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유년기, 청소년기 순으로 또 인생 역사가 행동에 끼치는 영향을 나열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진짜 인간 행동에 끼치는 모든 독립변수를 다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행동』은 1,040의 벽돌책이다.

인간 행동의 근연은 당연히 뇌세포 사이의 신경충동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경전달물질이, 호르몬이, 환경적 변인이, 유전자가, 양육과정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들은 각 챕터의 이름에 대응된다. 예를 들어 몇 초 전부터 몇 분 전에는 무의식적 자극이, 몇 분 전부터 몇 시간 전에는 호르몬이 주요한 작용 원인으로 기술된다.

책의 분량이 많은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가 모성애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옥시토신'은 대상과의 심리적 결속력을 증가시키는데 원래는 아기와 접촉할때 분비되는 이 호르몬이 인간-강아지 관계도 증진시킨다. 스트레스를 받았을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하면 실제로 스트레스가 풀린다(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든다). 청소년의 이마엽 겉질은 실제로 성인보다 기능이 덜 발휘되는데, 그 결과로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을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병적 도박에 더 잘 빠진다(그리고 모든 청소년 문제가 여기서 파생된다). 아동기에 학대를 당하면 해마(장기기억 전이를 담당)는 작아지고 편도체(분노와 불안 반응을 담당)는 더 예민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기억력 등 인지적 능력은 떨어지게 되고 충동을 잘 조절하지 못하게 된다. 저자가 인간 행동 원리의 기본 상식들을 뇌과학을 근거로 이야기하므로 이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 물리적 세계와 심리적 세계의 통섭을 자연스레 이루게 된다.

저자의 마지막 화두가 흥미롭다. 만일 이렇게 모든 행동이 유전 혹은 환경의 영향으로 발생한다면, 그러니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범죄행위를 그들이 '선택'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중세에 간질로 인해서 불수의적으로 움직여진 몸이 타인을 타격했을때 이를 응징의 대상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간질로 인한 움직임을 환자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를 처벌하지 않게 되었다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을 안내하며, 결국 지금 우리가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한 많은 악행들이 미래에는 용납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교정제도가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사실은 나는 그정도 이해에 도달하면 범죄가 없는 세상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신경활동이라는 자연현상으로 언젠가 인간 마음의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전에도 있었고 이 책을 통해 더 강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 별개로 인문학적 낭만은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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