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학교 시절에 관한 자서전적 이야기
“선생님, 저 자퇴하고 싶어요.”
한 고등학교의 학교상담실에서 종종 나는 이렇게 기습과 같은 주문을 듣는다. 보통 자퇴를 고민하는 친구는 이 묵직한 바램을 서두에서부터 얼른 꺼낸다. 엄마나 담임선생님에게는 쉽게 하지 못했을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듣지 않더라도 나는 안다. 이 문제를 어른과 함께 다루지 못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으로 혼자만의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묵혔는지. 그렇게 아이들은 천진하게 자신의 인생의 궤도를 크게 흔들고 싶다는 이야기로 진로상담을 시작한다.
‘자퇴’라는 단어는 상담교사인 나의 마음 속 빨간불을 울린다. 그 선택이 가지는 무게 때문이다. 학교는 어쨌든 잠자는 시간을 빼고 이 아이가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며 성장과 발달을, 학습과 여가를, 심지어 인간관계마저도 떠맡는 곳이니까.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인지적, 관계적 양분을 자신이 스스로 구할 것이며 심지어 공교육이 제공하는 것 보다 더 누릴 수 있으리라는 선언, 이 어마어마한 모험 앞에 어떻게든 나는 말리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곤 한다.
하지만 교사로서 나는 현실을 말하고, 아이들은 가능성을 말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포장이든 가능하다. 그들은 잘 정리된 계획, 지금과는 달리 부지런하겠다는 약속, 여러 변수들이 원하는 대로 풀릴 것의 기정사실화를 근거로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청산유수로 얘기한다. 이 주장에는 섣불리 초를 칠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처해있는 지금의 지지부진함을 자퇴로서 극복하고 자유와 책임을 구현하여 원하는 인생을 살 운명이라면 어떨까. 기성세대의 단견으로 말리는 것 자체가 이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 나도 홈스쿨러 출신이니, 자퇴 후의 삶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터놓고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신분상 부적절할 것 같아 노출할 수는 없었지만.
2002년 7월 나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집 앞의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순식간의 결정이었다. 입학한지 고작 4개월만이었으니. 이유는 명백했다. 나의 17살은 소중했으나 삶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공부에 매진하지도, 친구를 많이 사귀지도 않았다. 편안하고 무료하다는 감각이 불편했다. 이건 분명 부적절했고 무언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자퇴를 하자마자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학교를 다닐 때보다 더 시간은 아무렇게나 흘러갔다. 게을렀던 건 아니었다. 운동도 하고 책도 읽었다. 그러나 내가 투자한 시간만큼 성장했다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했지만 침체되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내 선택을 가장 앞서 응원했던 아버지는 방법을 찾아보다 어디선가 스크랩한 기사 한 조각을 나에게 주었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라는 전국을 도는 한 소규모 행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대안교육’이라는 다른 평행우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당시는 8월 말 폭염이 거의 물러간 시기였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시작한 행진은 이미 50일이 지났고 구불구불 남쪽지방을 돌아 경상북도 안동쯤에 와 있었다. 놀랍게도 구성원의 절반이 어린이 청소년이었다. 초등학생 대여섯 명과 중학생 두엇, 그리고 ‘새샘터’라는 약물청소년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또래의 형들이 열 명 가까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행진을 지휘하는 농민들은 그들이 대안교육의 첨단에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따로 어디 앉아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그냥 아침을 먹고 체조하고 걸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여정이 20km정도였다. 여섯 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여가시간이었다. 모여서 노래를 하고 책을 읽고 동네 견학도 했다. 밤은 시민단체 사무실, 교회, 원불교 교당 등에 스티로폼을 깔고 보냈다. 세월은 그전과 같은 속도로 흘러갔지만 이번에는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었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손빨래도 할 줄 알게 되고, 아무 바닥에서나 잘 수 있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강원도로 경기도로 국토를 종으로 횡으로 돌며 매일 머무르는 지역을 바꾸었다. 그때마다 새로 집회를 했고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던 선전물을 마치 교과서를 대하듯 꼼꼼히 읽었다. 관세 없는 쌀수입이 어째서 농민에게 해로운지, 농지를 갈아엎는 것이 왜 환경파괴인지, 우리쌀이 얼마나 소중한지 대본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장장 50일 800km의 행진을 마칠 즈음에는 비염과 멀미, 소화불량이 사라졌고 수 십 km 정도는 너끈히 내 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민들레의 지면을 통해서도 두 번 정도 이 행진의 교육적 의미에 관해 기고가 된 것을 보았다. 나도 대안적 삶에 관해 소통하던 행진 동료들과 같은 취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건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가 성공한 대안학교라는 것이다.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대신에 몸을 움직여 활동했고, 틀에 박힌 교과서를 읊조리는 대신에 현장에서 배웠으며, 건강해지고 자립심이 생겼고, 불평등문제와 환경문제를 의제로 다룰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성취와 무관하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더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이제 곧 열여덟이고 무얼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계획이 있어야 했다. 집회현장에서는 그렇게 멋지게 활약했지만 정작 내 미래에 관해서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주관도 지식도 없었다. 문명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든 걸 자급자족하는 생태주의적 삶은 상상만으로도 버거웠고, 다른 진로는 전부 내 신념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입시경쟁에 뛰어들 수도 없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는 체제로 들어가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였다. 내가 선택한 ‘대안교육’은 시작뿐 아니라 맺음까지 순수해야 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걷기를 더 하기로 했다. ‘새만금 사업에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에 함께해 짱뚱어 솟대를 끌고 부안에서 서울까지 행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만금 삼보일배’에도 한 달 넘게 합류했다. 닮고 싶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고, 사회 문제에 배우며 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멈출 때마다 스며드는 ‘무얼 하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유예할 수 있었다. 당시 문화일보에 『학교 다니기를 거부하고 길 위에서 배움을 찾는 OO군』이라는 제목으로 내 이야기가 기사 한 꼭지 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선명한 의지가 있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혼란이 가득했던 시기에 잠시 더 나아갈 힘을 주었던 응원이었다.
2003년 초 잠깐 학교에 몸담은 적도 있다. 경남 함양의 ‘녹색대학’이 설립될 무렵 입시경쟁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대안대학을 다니리라는 생각으로 견학 차 갔다가 두 달 정도 머물렀다. 아침에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보고 오후에는 목수 아저씨와 서가를 짜며 밥을 얻어먹고 지냈었다. 이 때 대학수업을 청강할 기회가 있었고 그건 홈스쿨의 시기에 몇 안되는 책 냄새 나는 경험이었다.
녹색대학의 학부생들 중 일부는 내가 그동안 만났던 신념 어린 활동가들과 달랐다. 그들은 스물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인생을 어영부영 보내려는 이들도 많았고, 수업을 이해못해 고민이었으며 생태적 삶에 투신하기도 주저했다. 내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대안적 삶’의 세목들을 누군가는 당연스럽게 타협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때묻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경직된 나에게 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퇴를 기점으로 일 년 반이 지나서, 스물을 일 년 앞두고 다시 한번 큰 결정을 했다. ‘대안교육’을 그만두고 다시 보통의 삶을 사는 것. 그 방법은 검정고시와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경험과 철학을 정리하며, 하나의 글을 올렸다. 제목은 『outschooling』으로 거리에서의 배움을 중심으로 하는 홈스쿨링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자습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 대학에 합격했다. 이미 남들이 다 밟은 길을 따라 교원자격증을 얻었고 시험에도 통과해 교사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재미없는 세속적 성공의 비결이 진로상담을 받는 학생에게는 더 궁금하겠지만.
그래서 내가 받은 ‘대안교육’은 무슨 효과성이 있었는가? 일단 다음의 일을 했다. 한 번의 캠프 ‘우리들은 학교에 안가요(홈스쿨링 청소년의 모임)’, 한 번의 영화제 ‘부안 반핵 청소년 영화제’, 여러 번의 단기 대안교육 커리큘럼 ‘보따리학교’, ‘반핵 대안학교’ 수십 번의 집회 기획과 주최 그리고 발언, 여러 건의 NGO간담회와 워크샵 참여 등이다. 열거하면 마치 스펙처럼 보이는 경험들을 짧은 시간 안에 해냈다.
그렇지만 나는 더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outschooling’의 시간동안 무엇을 얻었는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루종일 시민운동에 투신하고 있었으므로 농업과 환경에 대해서, 그 담론에 얽혀 있는 사회학과 경제학, 역사학과 생물학에 접근했었다고 말이다. 『석유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이필렬 교수의 책과 교육으로서 내 인생을 점검하기 위한 루소의 『에밀』, A.S.닐의 『서머힐』을 읽었다. 이념적인 호기심에서 『저주받은 아나키즘』을 보았던 기억도 난다. 지금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환경과 농업에 관해서 더 많은 공부를 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런 지적 성장도 핵심은 아니다. 무얼 보고 들었든 외형적으로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잘 나온 사람들보다 더 고분고분하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거리에서 던졌던 그 거대한 질문들 - 그러니까 ‘이 세상은 어떻게 해야 지속 가능한가?’, ‘우리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 이 나를 숨쉬게 한다는 것이다. 이 갈망에 가까운 궁금함은 분명 공짜로 생긴 것은 아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사무실에 있을 때도 나는 수시로 묻는다. 물론 이 물음에 해답은 없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변죽만 울리는 듯 답답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러한 긴장을 유지하는 동안 내가 나로서 살고 있음을 느낀다.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 겹친 덕에 독특한 방식의 홈스쿨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학교상담실로 돌아온 나는 그러한 도박같은 행운을 권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을 잘 조율해 보자고, 밖에 아무리 좋은 게 있는 듯 보여도 가능하면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 머물러 보자고 상담을 받으러 온 학생에게 말한다. 한 시간의 의논이 끝나고 운이 좋으면 나는 일지를 정리하는 고요의 시간을 누린다. 그때 문득 떠오른 한 문장이 있다. ‘상담교사는 홈스쿨러의 꿈을 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