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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스꾸 Apr 03. 2024

고향의 필요조건

인터뷰어 열 / 포토그래퍼 달래



* 강기웅 과의 인터뷰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고향의 공간이 있다면

    아무래도 집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있으니까. 고향에 드디어 왔구나 느끼는 순간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려서 노포동 터미널 간판을 봤을 때. 다른 하나는 20분 정도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있는 마을 초입의 탑을 봤을 때. 거리 곳곳에 추억들이 녹아들어 있으니까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집에 왔구나 싶지. 그리고 언제 가도 편안한 할머니 댁 정도.


    가족적인 공간을 빼면 영산대학교가 있겠네. 영산대학교라고 우리 고등학교 근처 대학교가 있었어. 거기 근처에 종종 공부를 하러 갔었는데. (웃음) 사실 공부는 많이 안 했어. 9시 정도까지 공부를 하고 나면 배고프니까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으면서 놀고, 농구도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자정이 되어서야 내려오곤 했지. 거기서 바라보는 야경이 참 예뻤어.  인문관이나 수선관 옥상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는 그런 느낌. 고향의 친숙함도 있으면서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다 보니 그 공간을 가장 좋아하지. 공간 자체보다도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때문에 기억에 더 많이 남는 것 같아.






서울에 와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고향 친구들은 미묘하게 느끼더라. 전화할 때나 내려가자마자 만나면 ‘새끼, 이거 말투가 서울 사람 다 됐네’ 하면서. 근데 나는 정작 못 느끼지. 검은 물에 먹물 두 방울 떨어트려도 티가 안 나지만, 맹물에 먹물 두 방울 떨어트리면 티가 확 나는 것처럼. 표준어 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땐 내 사투리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고향 친구들은 바로 차이를 잡아내더라고. 끝말을 올렸다거나, 억양을 반대로 했다고 지적받을 때 체감이 되지. 조금은 바뀌었나 보다 하고.


    나는 그런 게 있어.  지금부터 a라는 것을 b로 생각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나한텐 그게 b가 돼.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새롭고 낯선 공간이었는데, 대학을 오게 되면서 ‘이제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 생각을 하게 되니까 빨리 적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지. 서울을 낯선 곳이 아니라 익숙한 곳으로 스스로 바꿔버린 거야. 고향에 내려갔을 때만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편안하진 않지만, 그래도 서울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숙사에 들어갈 때 느끼는 감정은 이제 어느 정도 고향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해지고 있는 것 같아.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인식’과 ‘시간’이 동시에 전환될 때 가능해진다고 생각해. 인식이란 내가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지. 유리컵이 깨지게 되면 유리 조각으로 변하게 되잖아. 커피를 담아 마시던 원통형 컵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파편으로 변하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 원래 내가 알던 모습에서 달라졌기 때문에 낯설어지는 거야. 장소도 마찬가지야. 해외여행이 늘 낯선 이유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일상적인 순간조차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지. 의식이 곤두서게 되잖아. 


    시간은 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의 양이 늘어날수록 익숙함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야. 어색한 침묵을 싫어하는 편이다 보니 처음 만나면 먼저 말을 막 걸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계속 캐내려 노력하면서 친해지는 거지. 시간이 쌓여가면서 서로를 더 믿게 되고, 아무 말 않고 있어도 편안할 정도가 되면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인식은 따라오는 것 같아. 


서울에 오래 살게 되면 고향을 대체할 수 있을까

    

    대체라는 건 조건이 비슷해야 가능한 일이지. 고향에서의 추억과 서울에서의 추억이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체가 안 될 것 같아.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려서 20년 넘게 산다고 한들, 고향에서의 누적된 경험과 사람들이 아주 대체가 될 수 있을까? 단순히 오래 거주했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는 부류가 다르지. 학창 시절이 담긴 모교와 매일 걷던 등굣길을 보면서 떠올리는 예민한 추억과 성인이 되고 만난 서울에서의 추억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니까. 유년시절의 손때가 묻어 있는 곳에 더 마음이 쓰이게 되는 것 같아. 내 정체성이 태어난 곳이니까. 






고향의 충분조건이 있다면

    언제든 쉬러 갈 수 있는 별장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굳이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니더라도, 무계획으로 갔을 때 하루 정도는 편하게 잘 수 있는 친구네 집도 될 수 있겠지. 편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번뇌는 다 치워두고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나한테 고향은 유토피아 같은 거야. 일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을 현실계라고 한다면, 고향은 현실계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이랄까.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인 거지. 그래서 고향에 자주 가면 되려 안 좋은 것 같아. 고향에 쉬러 한 달 가까이 내려가 있으면 그곳이 일상이 펼쳐지는 현실계가 돼 버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지겨워져서 서울에 올라오고 싶어지고.


    인간은 되게 역설적인 것 같아. 모든 것이 충족된 공간에서는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되잖아. ‘모든 게 다 만족스러운데 뭘 더 해. 왜 뭘 더 해’ 하면서. 계속 전진하려면 고향에서 떠나야지. 정말 쉬고 싶을 때만 들르면서, 늘 그리움을 조금씩 남겨둔 채로. 그래야 포근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거야.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지금껏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못 해본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뭔가를 얻지 못했을 땐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의지 부족이었다고 생각해. 내가 봐도 100%를 다하지 않았던 거지. 진짜 중요한 건 나 자신이야. 나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있은 그다음에 환경이 오는 거지. 확신이 없으면 환경에 휘둘리는 게 되는 거야. 중심을 잘 잡아야 돼. 그래야 흔들려도 덜 흔들려. 무게 중심이 머리에 있으면 많이 흔들리잖아. 밑에 있으면 적게 흔들려.


    우리 학교 논술 시험 치러왔을 때도 그랬다니까. 준비물도 모르고 그냥 왔다. 수험생들은 거대한 종이 쪼가리에 빨간색 동그라미 쳐가면서 이름을 보고 있는 거야. 학부모님들은 인문관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쭉 늘어서서 기도하고 계시고. 엄마가 나한테 ‘야, 니는 뭐 좀 안 봐도 되나’ 하셨는데 ‘몰라, 양치나 좀 하고’ 그러고 나서는 부랴부랴 시험을 봤지. 성대 시계 보이길래 사진 찍어가지고 고향 친구들 단톡방에 보내고. 


    무서운 건 한 번 딱 꺾이게 되었을 때 ‘내가 어디까지 추락할까?’ 가늠이 되지 않는 것. 제대로 실패한 경험이 처음일 테니까. 내년 초에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할 때 즈음 경험하지 않을까?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게 다가올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를 입에 달고서 이겨내겠지. 무대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안 되면 죽을 거야 어떡할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할 건 해야지.’ 두 개만 생각하면 안 힘들어. 


스스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우리 엄마도 늘 이야기하시지만, 나는 고집이 세고 승부욕이 강해. 색깔이 강한 사람이지. 시간이 흘러서 취직을 하고 가정이 생기면 색이 조금씩 옅어지겠지. 좋게 말하면 유해지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세속적으로 되는 것이랄까. 난 그 시기가 좀 늦게 왔으면 좋겠어. 전자통신이 발달하고 온라인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특수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잖아. 그 와중에도 나는 내 색깔을 안 잃어버렸으면 좋겠어.






인터뷰어 열 / 포토그래퍼 달래

2024.03.27 강기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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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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