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기회

재수생들을 위하여

by 밀린 여유

저녁 식사 후에 큰딸과 산책을 하는 시간. 그 시간이 좋다. 사춘기를 지나가는지, 뭘 물어도 대답을 잘 안 하고 불만이 많아 보였다. 지나가겠지. 생각하며 이해를 해보려고 했지만, 때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대화가 필요했고, 함께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한다. 영화, 친구, 코로나바이러스, SNS, 교회, 노래 등등.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2년 후에 갈 대학 이야기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면 11학년이 된다. 한국의 고2와 고3의 중간이라고 할까?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12학년이라고 하는데, 보통 11학년 때 대학 능력 시험인 SAT를 치른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다. 같은 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 학비도 저렴하고 자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엄마 마음은 곁에 두고 싶은데, 어림도 없다. 멀리, 더 멀리, 미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날아가고 싶어한다.


아이의 이야기를 무조건 경청해야지, 단단히 다짐했다.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무슨 일을 하길 원하는지, 온종일 방에서 누구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입이 근질거렸지만, 산책하는 시간에는 귀의 기능만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오히려 딸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붓는다. 한국의 입시교육은 어떤지, 나는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 친구들하고 방과 후에 무엇을 했는지. 자기한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는 얼마나 좋은 학교를 졸업했는지 한번 말해보시오, 하고 벼른 것처럼.


“엄마 때는 말이지, 지원할 학교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한번 보고 붙거나, 떨어지거나 했어.” 90년대 초에 시험을 봤으니, 벌써 30년 전이다.
“와. 한군데에 지원하고 시험을 한번을 봤다고? 그럼 대부분 떨어져? 다른 학교에 갈 수 있어?”
“다른 학교에 갈 수도 있지만, 엄마는 일 년 동안 다시 공부했어.”
이어서 딸에게 재수학원에 대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설명하긴 했지만, 배운 것을 일 년 더 공부해야 하는 재수생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대학 합격자 발표 날이었다. 안방에 들어가서 시험을 친 대학에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레 수험번호를 하나씩 꼭꼭 눌렀다. “불합격입니다.” 그럴 리가... 다섯 번을 더 전화했고, 자동응답기에서 나오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다섯 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부모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고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꿈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 캄캄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오른쪽 볼을 타고 흘러서 귓속으로 들어가는데 닦아내기도 싫었다. 문밖에서 엄마가 "떨어졌나 봐요."라며 아빠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이 모자랐었는데, 실컷 잘 수 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점심도 굶고 계속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19살에 처음으로 삶에 대해 거부를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때가 되자 걱정이 된 엄마가, "이제 좀 나와봐라. 친구가 계속 전화 오는데......"
눈을 번쩍 떴다. 맞아. 다른 애들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함이 나를 일으켰고, 튀어나와 전화를 걸었다. 몇 명과 통화를 했는데, 모두 불합격. 갑자기 식욕이 생겼다. 나만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는데, 묘한 안도감이 생기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 패스트푸드점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서로를 위로하며 연락 없는 친구들을 합격의 자리에 세워두고 마음껏 부러워했다.


재수를 결심하고 친구들과 재수학원을 알아봤다. 합격한 친구들의 겨울은 얼마나 따뜻하고 화려할까. 내 모습이 초라하고 한심해 보였지만, 곁에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힘이 났다. 약간의 희망을 얻고 집에 왔는데,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집에서 나 혼자만이 낙오자였고, 새해에는 가족 모두에게 재수생 엄마, 재수생 아빠, 재수생 오빠의 이름표를 붙여줘야 했다.

물을 엎질렀을 때 닦으면 되고, 거울을 깨도 잘 치우면 되고, 오빠와 크게 다투었어도 화해하면 된다. 오래 걸리지 않고 해결이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대학 학력고사는 한 번의 실수로 12달을 기다려야 한다. 고 3의 사계절도 계절의 변화를 모른 채 수업과 보충수업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꽉 채웠는데, 일 년을 더 그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제 몫을 다하는 학생이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 걸까. 내가 떨어진 것은 내게 맞는 학교를 추천하지 않은 선생님, 나를 합격선에서 제외한 대학교, 성적의 잣대로 꿈나무의 기를 죽이는 나라의 탓인 것 같았다.


불만과 주눅으로 똘똘 뭉쳐서 재수학원에 등록했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를 새기며 학업에 매진했다. 다들 실패자들로 모인 수업 시간은 의외로 괜찮았다. 반에 한두 명씩 보이는 삼수생과 사수생들을 바라보며, 한 번만 떨어졌던 나를 안심했고, 앞으로 저 모습이 될까 봐 가끔 두려웠다.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을 마주치는 건 고문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옆에 끼고 있는 학교 바인더는 내 눈을 고문했고, 가벼운 핸드백을 멘 그들과 달리 여전히 무거운 책가방은 내 어깨를 고문했다. 그렇게 일 년을 버티고 다시 수험장으로 향하는 날. 그날은 작년보다 더 추웠고 무서웠다. "마음 편하게 봐라!"라는 엄마의 소리가 "또 떨어지면 안 된다!"라는 외침으로 무겁게 등을 후려쳤다. 시험을 보기 전에, 느닷없이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삼수생과 사수생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들과 나를 위해 기도했다.


합격자 발표 날, 한번 해 본 솜씨로 능수능란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열 번의 확인 전화로 그만큼의 합격통보를 선물로 받았다. 작년의 차가웠던 응답기의 말투가 너무도 다정하게 들렸다. 그게 뭐라고. 방 안에서 뛰다가 웃다가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나 외쳤다.


일 년 동안, 아니, 고등학교 3학년부터 재수 때까지 2년 동안, 누군가 내게 해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 말을 품고 살다가 이제 딸에게 털어놓는다. 너 자체가 소중하다는 말. 진부하고 형식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내내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다. 4당 5락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내가 자는 사이 친구의 책장은 넘어간다. 이런 경구를 메모지에 적어서 책상 앞에 붙여 놓고 공부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말로 표현을 하지 않아도 알아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모른 채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맞추어 걸으며 이야기한다. 네가 어느 대학을 가든 안 가든, 너는 엄마의 기쁨이다. 너에겐 다양한 갈래의 길이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길을 가는 너를 사랑하듯이,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하는 너 또한 사랑할 것이다. 어떤 길을 가기 때문에 너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이기 때문에 응원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오글거리지만, 듣는 딸아이는 그만하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 서로 웃는다.


그때는 대학진학에 실패한 것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고 이불속으로 숨고 싶은 두려움이었지만, 그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나 취업을 한 친구들이나 지금까지 저마다의 삶에 충실히 살며,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을 고루고루 지나고 있다. 한 번의 기회가 그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아님을 우린 알고 있다. 아니, 결국 알게 된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과정일 뿐이라고. 좋았을 때의 너와 나빴을 때의 너, 그런 과정을 겪는 네가 중요하다고.


*배너 이미지 - 김민식 기자의 일러스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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