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 동네의 구멍가게 앞에 닳고 닳아 반들거리는 나무 평상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어둑해지면 아이들 손을 잡은 동네 아줌마들이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가게 앞으로 모여든다.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선풍기를 ‘회전’으로 맞춘 후에 그들을 맞이한다.
어린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얼음이 송송 박힌 ‘빛나바’를 먹고 난 후에 반은 졸린 눈으로 엄마 무릎을 베고 쪼그려 눕는다. 끝이 안 보이는 까만 하늘에 아까 먹은 빛나바의 얼음 알갱이가 박혀있는 듯 반짝거린다. 곧이어 남편 흉과 자식 걱정 등 하소연이 시작된다.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미혼인 고모와 삼촌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고 엄마의 이야기보따리는 배로 무거웠을 것이다. 그 중에 할머니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사람들 모두 귀를 기울였다.
할머님의 어머님은 고종의 아들 중 한 명인 영친왕의 요리사였다. 왕의 후손도 아니고 요리사가 뭐 대수인가 싶어도, 유명한 사람이 내게 아는 체를 한 듯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손이 귀한 집의 고명딸인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궁에서나 먹을 법한 좋은 음식을 드셨고, 거의 일을 해본 적이 없으셨다. 하나뿐인 딸의 눈 한쪽이 안검하수증 때문에 감겨 있었고, 혹시라도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할까 봐 더욱 애지중지하며 키우셨단다. 며느리를 맞은 후에도 우리 엄마에게 살림을 맡기시고 아침 일찍부터 마실을 나갔다가 저녁때에 들어오셨다고 한다. 궁궐 요리사의 자손인 할머니의 고급스러운 요리나 비법을 기대했던 엄마는 허탈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의 도움 없이 혼자서 대가족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이 힘드셨을 테고, 아주머니들은 본인들의 일인 것마냥 함께 흥분도 하고 위로도 해주셨다. 여름밤의 평상은 늘 동네 사연으로 묵직한 법이다.
그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일 년에 한번, 며느리의 생일에는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김장 배추를 씻을 때 사용하는 고무 다라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양은 대야에 약식을 한가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전날 미리 생밤을 사다가 직접 칼로 깎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할머니 손가락에는 늘 천으로 만든 반창고가 감기어 있었는데, 일도 안하면서 항상 손끝이 갈라진다며 아침마다 반창고를 잘라서 감는게 일이였다. 그 반창고를 칭칭 감은 손으로 ‘까놓은 밤보다 생밤을 깎아 넣어야 씹히는 맛이 좋다’며 기어코 밤늦게까지 동그마니 앉아서 밤을 까셨다. 할머니 손가락의 올 풀린 반창고가 색깔이 변해가면 ‘거반 다 되었다!’ 하시며 구부정한 허리를 펴셨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 가득 계피와 설탕이 어우러진 달콤한 냄새가 넘쳐났다. 식탁 위에는 양은 대야가 놓여있고, 그 안에 전날 깎은 밤들과 잣, 대추, 건포도가 찹쌀 속에 쏙쏙 박혀 있었다. 내가 깎은 밤은 몇 톨이 안 되는데도 약식을 만드는 데에 공을 많이 들인 듯 뿌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한 숟가락을 퍼서 먹고 싶지만, 생일 주인공이 먼저 한 수저를 뜬 후에 내 차례가 돌아온다. 떡은 손으로 집어 먹어야 제맛이지만, 약식은 다르다. 찐득거리기도 하거니와 젓가락이나 포크로 툭툭 잘라먹으면 먹는 모양이 나질 않는다. 사각형으로 똑똑 잘라서 차분하게 젓가락으로 하나씩 먹어야 할머니의 수고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기분이다.
밤이 아주 많이물렁거리지도 않고 적당히 씹히는 맛이 있고, 잣의 고소함과 대추의 달짝지근한 맛이 쫀쫀한 찹쌀과 적당하게 어우러져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다. 보통 고구마를 먹을 때는 물김치가 생각나고 떡 종류를 먹을 때는 좀 더 단맛을 가미해 줄 식혜와 수정과가 떠오르는데, 약식은 그 자체로 충분해서 물 한 컵만 있으면 내 몫의 사각형을 야금야금 다 먹을 수 있다.
평소에 단 음식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던 아빠도 할머니의 약식은 몇 점 드시고, 오빠는 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가족 들이 어느 정도 배가 찬 후에도 양은냄비는 묵직하다. 칼로 도시락통 정도의 크기로 잘라서 랩으로 싸 놓는 일을 먼저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 몫도 따로 챙겨 놓고 그날 먹을 분량만 꺼내 놓은 후에 나머지는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둔다.
영친왕의 요리사였던 증조할머니의 유전자의 힘인지, 할머니의 약식은 기품이 있다. 증조 할머니가 귀하게 키우느라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시집을 보내셨다고 했는데도, 왠지 할머니는 그 손맛을 전수받으신 듯했다. 몇명을 염두에 둔 음식 만들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조리법을 보며 여유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대충 10인분, 20인분 용을 만들려면 내공이 있어야 하고, 열정만으론 얻기 힘든 ‘감’이 필요하다. 보통 손맛이 있는 사람은 이런 ‘감’이 있는 사람이다. 할머니에겐 그 두 가지가 있었다.
큰 며느리와 막내며느리 생일에는 이렇게 약식을 해준 적이 없으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둘째 며느리에 대한 사랑을 일 년에 한 번, 이렇게 손 큰 약식으로 표현을 하신 듯하다. 다른 음식도 하셨다면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생겼을 텐데, 일년에 한번 만드시는 약식 이외에는 음식을 만드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고등학교 몇 년 동안 두 분이 친척들이 사시는 김포에 내려가서 사셨는데, 그 때에도 매번 엄마 생신 때는 대야에 약식을 담아서 보자기에 몇 겹을 싼 후에 가지고 오셨다. 할아버지가 그 통을 들어서 할머니 머리에 올려주면 두꺼운 잡지 표지로 만든 똬리 위에 대야를 올리고 택시에서 내려서 걸어오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손재주가 좋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즐겨보시던 여성 잡지로 똬리를 만드셨다. 때로는 냄비 받침으로 쓰였고, 일 년에 한번은 약식을 옮길 때 머리 위에서 약식 대야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주는 고임용으로 쓰였다. 국물 자국과 검게 그을린 자국이 섞여 있던 똬리는 양은 대야와 사이좋게 어울렸다.
똬리도 양은 냄비도 오래 전에 잊혀졌고, 할머니가 된 엄마는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얼마 전에 약식이 먹고 싶어서 집에 있는 찹쌀로 간단하게 오븐 약식을 해서 엄마와 먹으며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전 날부터 준비한 할머니와는 달리, 나는 간단하게 찹쌀로 밥을 짓고 흑설탕, 간장, 잣, 건포도를 넣어 버무린 후에 오븐에 넣어서 약식을 구웠다. 엄마는 할머니가 만드신 거랑 별로 다르지 않다며 맛있게 드셨다. 사실 약식이 최고로 맛있어도 약식 이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할머니가 만드신 그 약식을 못 먹는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할머니가 만드시는 과정을 하나씩 찍어서 간직했을 텐데……
할머니와 함께 밤을 깎던 밤, 그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면, 밤 한 톨도 더 정성스레 다듬고, 할머니에게 다정한 질문을 많이 했을까? 그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것을 보답할 기회가 없는 모든 이에게 죄송하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증조 할머니로부터 내려온 요리 잘하는 유전자가 나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음식 솜씨가 좋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을 보면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물방울 하나에 바다를 느끼듯 약식 하나로 할머니를 거쳐 조선의 마지막 왕의 주방까지 연상하게 되는 시간. 엄마랑 나는 그 옛날 평상 위의 여름밤처럼 여전히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