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limited Fone
“두 달 동안만 하면 된다니까! 너 정도면 할 수 있어! 집에서 일해도 돼.”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내가 어떻게 하냐고…난 못해!”
20년째다. 그래픽디자인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육아로 지치고 힘들 때에도 밤늦게 모니터를 켜면서 다른 버전의 나를 깨웠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짧은 잠을 잤다. 세 아이를 키우며 피곤타령을 덜 했던 이유도 엄마 노릇 후에 좋아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들면 엄마의 임무에서 퇴근을 하고 디자이너의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밤은 ‘반 고흐’의 명화, ‘별이 빛나는 밤’처럼 낮보다 활기차고 생생한 색채로 가득 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남편이 두 달 동안만 전화 고객상담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남편이 다니던 휴대폰 회사의 사정이 나빠져서 문을 닫게 되었는데, 이 백명 남짓한 고객들이 다른 회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로 옮길 때 까지만 전화를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총 인원 6명의 작은 회사. 고객 상담원은 한 명도 남아있질 않았다. 제대로 된 상담원이 없는 전화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니까 길게는 두 달, 빠르면 한 달만 버티면 된다고 했다. 사장님은 남편의 새 직장을 응원해주었고, 그동안 여러 차례 회사의 그래픽을 도와주며 친분을 쌓아왔던 내가 도와주면 고마워할 거라며 설득했다.
할 수 없는 이유가 떠올랐다. 첫째, 영어로 전화를 받는 것이다. 회사는 저렴한 휴대폰을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몇몇 소도시에 선불카드와 함께 팔았다. 회사 이름은 ‘Unlimited Fone,’ 이다. 1불을 내면 하룻동안 무제한으로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이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5불을 내고 다섯 날 동안 마음껏 통화를 하고 6일째에 전화는 끊어진다. 일주일치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Fone은 Phone을 비슷하게 발음한 단어. 언어의 유희라며 사장님이 택한 이름이다.) 대부분이 흑인 고객들인데 뉘앙스에 음률이 느껴져서 알아듣기가 더 힘들다. 둘째,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한번도 해보지 않은 업무를 인수인계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내일부터 어떻게 시작하라는 말인가? 셋째, 앞으로도 나는 그래픽디자이너로 불리우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다음날 오전 9시부터 마이크가 달린 헤드폰을 장착하고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하지 않으리라. 그나마 남은 고객들이 형편없는 고객상담원 때문에 금방 떠나가겠지.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나와 곧 상관없을 인연들을 전화로 상대했다.
처음 며칠은 전화번호 숫자조차 들리지를 않아서 애먹었다. 미국 사람들은 숫자, 영 (0)을 제로(zero)라고 하지 않고 ‘오 ‘(oh)라고 발음을 한다. 전화 건너의 소리는’오’ (oh) 인지 ‘포’ (four)인지 헛갈릴 경우가 많다. 엉뚱한 번호에다 전화비를 넣어서 나중에 돈이 잘못 들어간 걸 알아차린 고객한테 욕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한번은 전화를 잃어버렸으니 잃어버린 전화의 번호를 새 전화로 옮겨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옮겨준 얼마 후에 어떤 고객에게 전화가 와서는 자기 전화가 갑자기 안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원래 번호 주인의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와 다툰 후에 골탕을 먹일 속셈으로 여자친구의 번호를 자기 전화로 옮긴 것이었다. 실수를 설명할 유창한 영어실력이 안되는 데다가 바뀐 번호들을 어떻게 복구하는 지가 더 문제였다. 울고 싶었다. 잘못이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아이 엠 쏘 쏘리 (I am so sorry)’를 반복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문제 해결은 남편이 집에 온 후에 시작된다. 공책 장마다 날짜를 적고 그날 해결하지 못한 전화번호와 간략한 내용을 적어 놓는다. 남편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며 해결책을 알려주면 필기하며 실습한다. 예전 번호를 새 전화에 옮기기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 전화비를 안내서 전화가 끊어진 경우에 다시 개통하는 방식, 다른 전화 회사로 번호를 옮기는 방법 등등… 내가 편한 이유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전화 서비스 뒤의 숨은 노력들에 고마운 마음이 들 줄이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서 모르는 많은 수고함으로 내가 너와 연락을 하고 세상과 소통을 하는 것이다.
남편의 과외로 어느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공책의 미해결 리스트도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두 달이 지나면서 줄어든다던 고객들은 두배로 증가했고, 회사는 문을 닫지 않았다. ‘무제한 전화’의 일인 고객상담원으로 자리잡은 나는 4년째 “안녕하세요, 저는 00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매일 30통 이상의 전화상담을 접수하고 문제해결을 하고 있다.
가끔씩 하는 그래픽 일은 여전히 설레며 나의 가치를 쓰다듬어준다. 고객상담원의 일은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의 지경을 넓혀주었다. 반복되는 생활영어로 인해서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1불의 가치를 가르쳐 준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감옥에 가느라 전화비를 못 내서 저장한 전화번호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 자녀의 전화비를 내주는 고령의 정보 보조금을 받는 할머니, 영어를 못하는 부모를 대신해서 전화로 상담을 하는 어린 소녀 등등… 이 모두가 헤드폰을 쓴 이후에 만나게 된 인연들이다.
전화 말미에는 형식적인 “좋은 하루 보내세요!” (Have a great day)대신에 “축복의 하루 보내세요!” (Have a blessed day)를 진심을 담아 말한다. 우리 고객들의 형편이 나아져서 하루만 1불로 무제한 통화를 하는 게 아니라, 한달치를 미리 내고 통화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생활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