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에서 셋이 되다

나와 우리의 세계가 더 넓고 깊게 확장되는 것

by 김혜미

연애 4년, 결혼 5년. 함께 한 지 10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둘이라는 말이 좀 더 익숙하고, 뭐든 둘이 하는 게 훨씬 편해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흔히 말하는 딩크족은 아니었다. 아직 ‘부모’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는 판단에 자꾸 미뤄온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라는 이름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자산을 모은 다음에, 여행을 가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도 있긴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과제를 갑자기 벼락치기로 수행하려고 한 데에도 이유는 있었다. 이제는 우리를 닮은 작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한 번의 유산을 겪고 나니 그 바람은 너무나 절실해졌고, 각자 믿는 신에게 우리의 바람이 닿기를 기도했다.


앞서 찾아온 인연의 끈은 쉬이 끊어졌다. 유난히 몸이 무겁게 느껴진 날, 집에서 확인한 임신테스트기의 흐린 두 줄은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에 가까웠다. 산부인과에서 임신 5주 차인 것을 확인했을 때에도 앞으로 어떤 엄마가 되어야지 하는 야무진 다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앞으로 하지 못하게 될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음주, 염색, 장거리 여행 같은 사소한 것부터 방송, 강의, 행사 같은 직업적인 것까지. 그저 10개월이 빨리 지나가 다시 예전처럼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겨우 임신 5주 차에 꿈꿨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나의 입방정 탓이었을까. 아니면 추운 겨울이어서 그랬을까. 내 품에 찾아온 작디작은 생명은 심장 박동도 한 번 하지 못하고 떠났다. 겨우 2주를 품고 있었을 뿐인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은 몇 번을 되뇌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를 떠나보낸 날에도 나는 방송을 위해 출근해야 했고, 괜찮냐고 묻는 수화기 너머 가족의 질문에는 오히려 옅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시간을 약으로 삼아 상처는 아물어가는 듯 보였다. 짧게 왔다간 인연이기에 헤어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상처가 더 신경 쓰인다는 걸 당장에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비슷한 시기에 유산을 한 친구가 성당에 두 개의 초를 켜고 왔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작은 불을 태우고 있는 노란색과 초록색 두 개의 초. 순간 고요했던 감정은 파도가 일렁이듯 거칠어졌고 혼자 있던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건 세상에 남겨진 우리 아기의 첫 발자국이었다.
한 번 더 발자국을 남기고 훌훌 보내기로 했다. 우리 아기가 세상에 왔다가 떠났다고, 꿈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려고 한다고, 좋아하는 선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문자 사연을 보냈다. 깊은 밤, 내 사연이 선배의 고운 음성으로 세상에 전해졌고 남편과 나는 서로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아주 잠깐 둘에서 셋이 되었다가 다시 둘이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찾아오는 인연은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굳은 마음을 먹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부인과에 정기적으로 찾아가 상담과 진료도 받았다. 몸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아기가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기다림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서 점점 초조해졌다. 아기를 점지해주지 않는 삼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어느 날 산부인과 담당 의사가 넌지시 물어왔다. 난임 병원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줄곧 자연 임신만 생각해온 나는 그 제안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고민해보겠다며 몇 군데 추천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종이에 적힌 난임 병원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 년여 전 나에게 찾아온 인연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품고 있다 떠나보낸 것만으로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들은 쉽게 아기를 갖는 것 같은데 나만 어려운 길을 간다는 느낌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주변에 난임 병원의 도움으로 임신한 사람이 없는 것도 망설이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며칠 고민 끝에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담당 의사가 추천해준 병원 목록 중 한 군데가 비슷한 시기에 유산한 친구가 먼저 다니기 시작했다는 난임 병원이었다. 일단 뜻을 정하니 우리 아기가 얼른 찾아와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약을 하고 남편과 같이 방문한 병원은 규모가 크고 밝은 분위기여서 ‘난임’이라는 과제가 한결 가볍게 다가왔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 묘한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부모가 되고 싶은 이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다들 예쁜 아기가 찾아오면 좋겠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축복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기를 기다리면서 지난날의 우리를 되돌아보았다. 문득 결혼하고 1년 뒤에 떠났던 동유럽 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국경을 넘는 기차 안에서 한 할아버지와 7시간을 함께 했던 기억. 모두가 짧은 영어 실력이라 오히려 편했던 대화 속에는 낯섦을 대신하는 친근함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우리 또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젊은 시절 한국과 작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꼭 그런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그날의 공기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그가 건넨 말과 눈빛 때문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는다면 아이를 낳은 것이며, 다시 돌아간다면 좀 더 일찍 결혼해서 더 오랜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그의 말이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은 충만했음을 기억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하고 싶으면 하고, 생각한 대로 행하던 간편한 나날들. 어쩌면 ‘결혼’은 ‘연애’랑 별다른 것이 없다고 믿었던 순간들. 하지만 둘에서 셋이 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생각한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로 인해 좌절이나 체념보다는 겸허와 인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둘에서 셋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가족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세계가 더 넓고 깊게 확장되는 것이었다. 국적이나 세대와 상관없이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경험. 몇 년 전 타국에서 만난 헝가리 할아버지의 말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 달여의 난임 병원 방문 끝에 우리는 시험관 시술로 두 번째 인연을 만났다. 드디어 둘에서 셋이 된 것이다. 이번에는 그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부터 언행, 몸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힘든 시기를 넘기고 임신 7주 차가 되어 심장박동을 들었을 때에는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다. 여전히 ‘부모’가 되기엔 부족함투성이겠지만 왠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콩알보다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소리가 우리를 응원해주는 듯했다.


곧 만날 수 있어. 반가워,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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