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뒤꿈치로 겨울을 감지하다
슈돌의 승재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대성통곡한다. 승재에게 있어 인형은 ‘살아 있다’. 윌리엄은 식탁 위에 놓인 통닭을 아빠 몰래 쇼파로 데려가 천으로 덮어 주고 에어컨도 꺼 버린다. 벌거벗겨진 통닭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다. 이처럼 아이들은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한마디로 신체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존재의 유동성이 교감의 원천이다. 조금 더 자라고 학교를 가면 이런 능력은 사라진다. 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닌 대립이 더 우세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별과 대립이 강화될수록 몸은 뻣뻣해진다. 가질수록 헛헛하고 누릴수록 막막해진다. 그럴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메아리친다.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매 순간 만물과 교감하고 싶다고. 예수, 니체, 이탁오 등 동서양의 현자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라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쓰기의 원리도 그러하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우뚝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자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