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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크림은 글쓰기다

발뒤꿈치로 겨울을 감지하다

by 바그다드Cafe

겨울이 온다. 나의 신체에서 겨울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부위는 발뒤꿈치다. 특히 요 몇 년 사이 나이를 먹어감에 발뒤꿈치의 계절경보 기능은 노련해진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겨울이 오고 건조해지니 발뒤꿈치가 갈라진다는 얘기다. 마흔이 되니 그 증상이 심화된다는 인간의 슬픈 노화에 대한 얘기다.


3년 전 겨울부터 풋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며칠 풋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뒤꿈치가 아파 걷는데 통증을 느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매일매일 출근과 함께 발뒤꿈치에 풋크림을 바른다. 당장 아프지 않아도 미래를 대비하는 나만의 겨울철 루틴이다.

겨울철 내 소중한 발뒷꿈치를 지켜주는 풋크림

자, 이제 풋크림을 화두에 올렸으니, 제목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풋크림이 글쓰기’라니?


내가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년 정도 되었다. 시작은 소설 쓰기였다. 내가 소설 쓰고 앉아있으면, 아내는 진짜 그랬다.


'소설 쓰고 앉아있네…'


처음에는 단편소설로 시작해서 완결했고, 곧이어 중편소설을 썼다. 물론, 졸작이라 그리 인기는 없었지만, 나만의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6개월 전부터 소설이 아닌 마구잡이 글들을 브런치에 올리면서 또 다른 글쓰기 장을 이어가고 있다.


마흔 언저리에서 뒤늦게 글쓰기를 해보니, 쉽지 않음을 느낀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철저히 비효율적인 자원(시간과 정신)을 계속 글쓰기에 투자할까? 그 이유는, (그럼에도) 글쓰기는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장점 중에서도, 사무직 직장인인 나에게 꾸준한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는 것이다. 글쓰기를, 특히 타인에게 읽히는 글쓰기를 이어가려면 창의성이 필수적이다. 창의성이 없는 글은 타인의 소중한 시간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무엇인가? 창의성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연결하고, 편집하는 능력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창의성이 자라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왜냐하면 '글을 쓰지 않았던 시기의 나''글을 쓰는 요즘 시기의 나'는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무직 직장인으로서 글쓰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음을 확신한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직장인으로서 성장을 하고, 이는 자연스레 AI 시대 사무직으로 살아남을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AI 시대에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직장인보다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높은 직장인, 즉 창의적인 직장인이 경쟁 우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풋크림을 아침에 바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날 바로 뒤꿈치가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위해 풋크림을 바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오늘 당장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업무 능력에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글쓰기를 하다 보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끝으로 수많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상깊었던 고미숙 작가님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중에 한 구절을 가져오면서 이 글쓰기를 마무리한다.


슈돌의 승재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대성통곡한다. 승재에게 있어 인형은 ‘살아 있다’. 윌리엄은 식탁 위에 놓인 통닭을 아빠 몰래 쇼파로 데려가 천으로 덮어 주고 에어컨도 꺼 버린다. 벌거벗겨진 통닭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다. 이처럼 아이들은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한마디로 신체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존재의 유동성이 교감의 원천이다. 조금 더 자라고 학교를 가면 이런 능력은 사라진다. 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닌 대립이 더 우세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별과 대립이 강화될수록 몸은 뻣뻣해진다. 가질수록 헛헛하고 누릴수록 막막해진다. 그럴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메아리친다.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매 순간 만물과 교감하고 싶다고. 예수, 니체, 이탁오 등 동서양의 현자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라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쓰기의 원리도 그러하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우뚝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자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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