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생활 첫 커리어를 중견 식품 기업의 총무팀에서 시작했고, 3년 차에 지금 다니는 대기업으로 이직
-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12년 근무, 총 경력 15년(차부장급)
- 연봉 약 8천만원(성과급 제외)
- 지금 다니는 대기업의 총무팀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2년 전에 S임원이 해외에 나가서 같이 사업개발을 해보자고 제안했더랬다. 그리고 해외 주재원 자리도 약속했더랬다. J형은 회사에서 티도 안나는 총무일만 10년 넘게해서 현타가 오던 찰나에, S임원의 솔깃한 제안을 받아드려 2년간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재원 발령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2년이라는 시간을 장기 출장으로 메꿨다고 한다. (J형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S임원으로부터 팽당해 지금은 총무팀과는 상관없는 팀에서, 자기보다 어린 팀장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한다.
- 9개월 전부터 인사팀은 사직을 권고함.
얼마 전, J형과 서울역 근처의 오리고기 전문점에서 저녁에 만났다. 왜 서울역이냐면 예전에 J형과 서울역 근처 사무실에서 잠깐동한 함께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원래 사무실은 리모델링 때문에 서울역 근처에서 당분간 머뭄) J형이 지금 다니는 직장 근처에서는 술 마시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지금 나의 사무실이 위치한 마곡에서, 공항철도를 이용할 수 있기도 해서 서울역으로 자연스레 장소를 잡았다.
3년 만에 만난 J형은 전체적인 느낌이 그대로 였지만, 예전에 비해 더 피곤해보였고 살도 조금 빠진 것처럼 보였다. 서로 근황첵을 간단히 한 뒤, 최근 3년 사이에 2번의 이직을 한 나에 대해 J형이 더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대화 초반에는 주로 형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J형의 주요 질문.
- 나의 전전직장(J형의 지금 직장)에서 그만두게 된 계기. 너도 권고사직 형태였는지?
- 그 좋다는 전직장(대기업S 배터리 회사)을 왜 그만 두었는지?
- 지금의 직장(배터리 소재 제조업의 중견 기업)으로 왜 이직했는지?
- 지금의 직장 연봉은? 조건은?
- 지금 직장에서 적응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지?
- 지금 직장에서 하는 일은? 직급은? 업무 강도는?
-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차이는? 등등
나의 대답.
- 나는 전전직장에서 내발로 걸어나왔다. 물론, 대기업 S 합격을 최종 확인하고 회사에 오픈했다.
- S기업 이직 얼마 후,회사 전체가 (내 기준으로는) 쓸데없는 보고에 진심임을 알아챘다. 보고문화가 너무 숨막혔다. 의미도 없는 장표 한 장을 고치기 위해 6시간이나 둘이서 골방 회의실에서 시간을 보낸 후, 고민을 많이했다.
- 특히, 나는 S기업의 공채도 아니고, 과차장급 경력직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가는 이도저도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전전직장을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한 가지도 쓸데없는 보고문화였다. 그 다음은 정치질. 따라서 보고에 집중하는 회사에서 나는 오래 견디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 그 와중에 지금 회사 임원이 이직 제안를 몇 차례 했고, 고민 끝에 2년 전 지금의 중견기업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 직급은 차장이고, 전략구매팀장을 맡고 있다.
- 13년차로, 연봉은 XX 정도..
- 대기업과 지금 다니는 중견기업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각각 장단점이 있다. 특히, 시스템의 차이로 인해 중견기업에서 해야 할 업무의 범위가 훨씬 넓다. 물론, 시스템을 보다 더 잘 갖춘 중견기업도 있겠지만, 나의 지금 회사는 내가 많은 분야를 넘나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계약 검토, 법무 검토, 신사업 검토, 해외 투자 검토, 보상 및 클레임 처리, 고객사 영업, 그리고 나의 주업무인 구매까지. 이게 가능하냐고?
- 어거지로 가능하다. 그래서 힘든 점도 많지만, 난 보고문화에 진심인 회사보다 지금의 다양한 업무와 책임을 지우는 회사가 더 낫다.
J형은 나의 현재 회사 얘기를 듣더니, 놀라워 하면서도 부러워했다. 특히, 하는 일이 저렇게 다양하다는데에 놀랐는데, 나도 어찌어찌 꾸역꾸역 하루하루 버티면서 하다보니 지금은 다양한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J형이 그 비법을 너무 궁금해했지만, 나는 명확하게 대답 못했다. 하지만 대충 왜 그런지는 알기 때문에 간단히 내 생각을 들려줬다. 아무래도 그간의 읽은 책과, 다양한 경험(아프간 파병,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원 3년, 미얀마 시멘트 공장 주재원 2년, 그 외 다양한 사업개발 경험)과 다양한 아르바이트(편의점, 고기집 불판 옮기고 닦기, DVD방 관리,웨이터 등) 경험 때문에 중견기업으로 이직해서도 수월하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래서 결국 시스템이 변경되도, 해야 할 분야가 많아졌음에도 이렇게 버틸 수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추후에 내가 다양한 분야의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에 대해서는 따로 공유할 예정이다. 그렇다고 다양한 분야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은 분명 실수도 많고, 스스로 만족스럽지도 못한 일도 많다. 그럼에도 지금 회사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의 강점중 한 가지를,성격이 다양한 분야 업무의 동시 처리를 꼽고 있다.
나의 중견기업 이직 후, 적응과 생활에 대한 얘기를 거의 들은 J형은 9개월 전 사직을 권고한 인사팀장(나도 알고 있는) 얘기를 꺼냈다. J형이 총무팀에서 일할 때 바로 옆자리에서 근무했던 (당시는 팀장이 아니었지만) 인사팀장이 사직을 권고했을 때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몇 달 동안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하지만 세아이의 아빠이자 외벌이 가장으로 마냥 술만 마시고 회사욕을 할 수는 없드랬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이력서를 업데이트 시켜 여기저기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히 지금까지 연락오는 데가 없다고 했다. (형은 사실 2군데 정도 연락이 왔지만 연봉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고 한다. 외벌이에 세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사안도 고려해야 함을 강조했다)
지금은 이직뿐만 아니라, 사업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장점을 살려, 무인 세차장 사업도 검토한다고 했는데... 아직 구체화 되는 건 없다고 했다.
그리고 J형은 얼마 전회사에서 복지 차원으로 무료로 제공하는 올해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했다. 보통 연말에 받는데 언제 회사에서 나올지 몰라 미리 받았다고. 결과는 작년에 비해 많이 좋지 못하단다. 평소에는 없던 위장 장애와 혈압도 약을 먹어야 할 만큼 높다고 했다. J형은 권고사직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고장난게 아닌가하고 한탄했다.
나와 J형은 주특기도 다르고, 경험치와 경험폭도 다르기 때문에 감히 내가 J형에게 직접 해 줄수 있는 조언은 없었다. 대신 나는 J형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바로 야마구치 슈 작가님의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J형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술자리에서는 하지 못한 책에 관한 얘기(J형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이 지면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다. J형에게 너무 잔인하게 들릴 수 있어 차마 술자리에선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꼭 읽어보길.
야마구치 슈 작가님의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중에 “해고하지 않는 기업이 더 위험하다”라는 글이 있다.
‘일본 기업은 사람에게 친절하지만 외국계 기업은 엄격하다’라는 말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인식이 퍼진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외국계 기업은 가차 없이 사람을 해고하지만 일본 기업은 해고하지 않는다’라는 점 때문이다. 확실히 해고는 당사자에게 큰 스트레스이므로 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해고되지 않고 회사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인재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결론은 명백하다. 사원 수가 10만 명을 넘는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사장은 한 명 뿐이므로 나머지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커리어의 천장에 부딪히게 된다.
그럼, 어느 단계에서 천장에 부딪힐까? 대부분의 일본 기업에서는 40대 후반이다. 과연 유익한 상황일까? 40대 후반에 ‘당신은 이 회사에서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선택권은 거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노동 시장에서의 가치는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두께로 결정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회사 내부에 이러한 자본을 축적하기 때문에 다른 기업으로의 이동은 쉽지 않다.
반대로 회사 측은 직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선택지를 갖고 있어서 찜을 찌든 굽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선택지의 극단적 비대칭성이 생긴다.
흔히 엄격하다고 평가받는 외국계 기업에 대해 생각해 보자. 확실히 단기적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다른 면도 볼 수 있다. 커리어가 아직 낮은 단계에서 일의 적격, 부적격을 판단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
물론 그 순간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누구라도 “당신의 실적이 회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 주부터 그만 나와도 되니 구직 활동을 시작해도 좋다”라는 말을 들으며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 자신도 그런 말을 들은 경험이 있고,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일본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일은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듣는 시기가 언제인가의 문제일 뿐이라면 아직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젊을 때 듣는 것이 본인에게 더 나은 일이다.
내가 J형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같이 고민하는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닿은 결론은, 결국 J형을 보며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직도 꽤 성공적으로 하고 적응도 잘했고, 맞벌이에 자녀도 한 명이라 J형보다 당장은 나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큰 지금 시대에 나는 J형을 보며 나를 본다. 언제든지 나도 J형과 같이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J형에 책을 선물하고 고민을 함께 나누는게 J형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안다. 결국 나를 채찍질하는 것임을. 그럼에도, 나는 J형이 얼른 자리를 잡고,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힘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