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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l 09. 2024

AI시대 직장인 외국어 공부에 대한 생각

아무튼, 외국어 그리고 먼 훗날 우리

나는 외국어를 전공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수어를.  보통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소수어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미얀마어, 태국어, 아랍어, 스칸디나비아어 등등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소수 외국어를 전공했는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혹은 별 생각없이 전공을 정했다. 오늘 얘기는 외국어에 대한 얘기는 맞지만 내 전공에 대한 얘기는 아닌 관계로 내 전공 얘기는 여기서 과감히 패스. (다음에 따로 얘기하려고 한다)


또 이어지는 질문, 소수 외국어 전공이 밥벌이에 도움이 되었는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안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지금 회사에서 밥벌이를 위해서는 전공이 1도 필요 없다.

그 전에는 어땠는가? 도움이 되었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도움이 되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외국어를 진정 좋아했던 걸까? 맞다. 나는 실제 외국어를 좋아한다.


내가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유치원때 재롱잔치 비디오 테이프에서 나의 외국어 짝사랑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 때까지 우리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고, 보관 중인 비디오 테이프 목록에는 유치원 재롱잔치 녹화본이 있었다. 그 비디오 테이프에서 중국 왕서방 복장을 한 유치원생인 내가 어설픈 한국말로 '우리솰람짜좡면조아한다잉' 이라고 하면서 가짜 중국어 성조를 넣었드랬다. 부끄럽진 않았다. 유치원생이었으니깐. 비디오 테이프 덕분에 나도 모르는 유치원의 나를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고향집에도 비디오 테이프도, 비디오 플레이어도 없지만 나는 내 기억 속에 유치원생인 내 모습을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분명히 선생님이 시켰겠지만) 그래도 외국어에 대해서는 한 소쿰의 운명이 거기 있지 않았을까 억지로 맞춰본다.

<작가님의 필력과 외국어 대한 사랑을 내가 감히 따라 갈 순 없지만서도... 이 책을 보며 나도 꽤나 외국어를 좋아하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AI 시대, 과연 외국어 공부가 필요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특히, 갤럭시 S24에 온디바이스(기본 탑재 정도로 번역되지 않을까?) 번역기로 외국 여행을 하는 챌린지와 외국인과 실시간 통화하는 모습도 유튜브로 자주 올라오는 것 같다. 실제로 나만 하더라도, 챗GPT 때문에 영어 관련 번역 및 이메일, 레터 쓰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AI시대, 과연 외국어 공부가 필요한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AI시대 이전 만큼의 범용적인 가치는 아니겠지만, 개인에 따라 여전히 필요하다'이다.


물론, 한국 전쟁 직후, 기초 영어 회화만 가능해도 엄청난 정보와 부를 거머쥘 수 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1980년 대 일본이 초호황이었을 때, 일본어가 가능한 분이 누렸던 권세에 비교할 수 없지만,

1990년 대 중국이 막 개방했을 때, 중국어 가능한 분이 보았던 무궁무진한 기회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리고 내가 사회생활 초기 14년 전에 직접 눈으로 본, 영어 계약서 작성 가능한 기술만으로도 엄청난 자신감과 승진이 가능했던 부장님의 영광은 이 시대에 더이상 통하지는 않지만,

...

그럼에도, 외국어 공부는 여전히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외국어>의 저자이신 조지영 작가님은 같은 책에서 외국어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런 순간들 때문에 책을 금방 덮기도 하지만, 간혹 입으로 읊조렸던 단어들이 귀에 들릴 때, 여행지의 안내문에서 아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 포르투갈 버스 표지판이나 레스토랑 앞에서 'sex'라는 단어를 봐도 당황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괜히 혼자 뿌듯하다(버스 표지판에 써있는 'sex'는 금요일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sexta-feira'의 줄임말이다).


유치원 선생님이 지정해준 언어였기 때문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한자가 좋았다. 국민학생과 초등학생 때(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1996년부터 초등학교로 변경 되었다) 특별반 활동으로 주로 한자반에서 한문을 외우고 썼드랬다. 그리고 커서도 아들인 Hoya가 태어나기 전까지 틈틈히  중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해 HSK 꽤 높은 급수까지 땄었다. 그렇다고 대단하고 유창한 중국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중국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마트에서 계산은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Hoya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여름에 갔던 청두 여행에서 내가 중국어를 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해했다. 특히, 스타벅스에서  "请给我一杯冰美式咖啡。" (Qǐng gěi wǒ yī bēi bīng měishì kāfēi.) 거침없이 중국어로 아아를 시킬 때는 살짝 멋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매일 마시는 아아를 그저 중국어로 시켰을 뿐인데... 실로 결혼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중국어가 다 살렸다.


한편, 중국어하면 떠오르는 제일 안타까운 순간이 있다. 바로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 때문이다. 김혜수님이 화교인 마우미 역할로 나오는데, 놀라운 연기 변신과 화교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린 느와르풍의 영화라 재밌있게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 마우미가 중국어로  ‘我的孩子(워더 하이즈)’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마우미는 화교인지라 중국어로 말했는데, 감독님은 자막에 중국어만 딱 넣으셨다.


“我的孩子”


영화를 볼 때 중국어를 몰라 정작 영화를 볼 때는 뜻을 몰랐다. 나중에 찾아봤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我的孩子 = wǒ de háizi = 워더 하이즈 = 내아이


뜻을 알았을 때, 나는 무릎을 탁탁탁 세 번 쳤었다. 왜 영화 감독님이 자막에다가 중국어를 넣은지 알 수 있었다. 너무 간단하지만 너무 중요한 메세지 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으면 아니, 워더 하이츠라는 뜻이라도 알았으면, 영화를 보는 깊이가 달라 졌을 것이다. 워더 하이츠 딱 이 대사 때문에. 그렇다면 왜 감독님은 워더 하이츠를 굳이 번역 자막을 싣지 않았을까? 추측컨데, 단순히 한국어로 번역되는 '내아이'로는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을 내포한게 아닐까? 워더 하이츠와 내아이의 단순 번역으로는 본인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뜻.

훗날 진짜 감독님을 만나면 꼭 묻고 싶다.  

영화 <차이나 타운>의 한 장면. 김혜수 배우님은 역시 대단하다. 워더 하이츠를 알았더라면 영화를 더더더 재밌게 봤을텐데...

이 후에, 중국어를 독학했고 아내와 중국 청두 여행을 무사히 다녀왔고, 조금은 괜찮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운명같은 영화를 만났드랬다. 바로 <먼 훗날 우리>. 진백림과 주동우가 주연으로 나온 그 영화.


중국 시골 출신의 젊은 남녀가 베이징에서 자리 잡고 사회 생활을 하며, 서로 사랑하고 또 안타깝게 헤어지는  얘기를 그리고 있다. 자극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이다. 주동우의 눈웃음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베이징에서 자리 잡기 위해 고생하는 청춘의 고군분투기가 서울에서 자리 잡기 위해 아둥거리는 내 모습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첫 장면의 배경이 되는 2007년 즈음, 나도 중국에 있었다. 친구와 중국 배낭 여행을 하며,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새 석탄 기차를 타고 이동했었다. 그 석탄 기차에서 중국 컵라면도 많이 먹었드랬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 괜히 가슴이 먹먹했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영화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 새벽의 어느 베이징 거리.

그리고 다는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꽤 심심치 않게 영화 속 중국어도 알아들으니, 영화가 더 재밌을 수 밖에. 기억나는 대사도 있다.

未来的某一天,我们还会再见吗?到那时我们还能认出彼此吗?(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때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쭉 써놓고보니, 외국어 공부가 실용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비지니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실력때문에 일할 때 꽤나 도움을 받았지만, 영어는 워낙 오랫동안 강제로 공부했던 시간이 길었던지라 자발적인 외국어 공부와는 거리가 조금 먼 외국어이다) 하지만 실용적이지 못한 외국어 공부 중국어가 어쩌면 내 삶을 조금 풍성하게 해주는 효과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가끔 우울해질 때 <청두成都>라는 중국 노래를 듣고, 내게 특히나 맞는 중국 영화와 드라마를 볼 때면 분명 삶이 더 살만하게 느껴졌다.


다시 책 <아무튼, 외국어>의 한 대목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작을 소'와 '넉 사'는 옛날에도 알았지만, 중국어를 그나마 몰랐다면, 영영 그 구겨진 메모에 적혀 있던 슬픈을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비뚤빼꿀 두 글자에서 불가항력으로 떠내려가는 개인의, 일가의 비극을, 돌이킬 수 없는 대만의 디아스포라를, 슬픔의 아시아를 읽었다고 감히 말해본다. 두 글자가 샤오쓰라는 걸 모르고 봤어도 위대한 걸작이지만, 알고 보는 게 당연히 훨씬 더 좋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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