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일의 여성 전용 사당

패턴로드 7 | 돌에 수놓은 비단무늬

by 고훈민

오늘은 다소 지겨운 산서성을 떠나 남쪽의 안후이(安徽)성으로 가보자. 안후이성의 이름은 이 지역의 역사적 중심도시들인 안칭(安庆)과 후이저우(徽州)의 첫글자를 따서 지어진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는 강남성이었던 지역을 1667년에 안후이성과 장쑤성으로 나누면서 탄생하였다. 안후이성 북부와 중부는 화이허가 흐르며 평야가 많고, 남부는 장강(양쯔강)이 흐르며 산지가 많다.


삼국지의 합비전투로 유명한 성도 허페이나 안칭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이끌만한 명승지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황산시로 이름을 바꾼 후이저우(이하 휘주)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황산을 보고 나면 오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비경을 자랑하는 황산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후이성의 위치와 황산의 절경


이 황산의 북동쪽 자락에는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인 휘주고성(徽州古城)이 그 이름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본래 진나라 시기 '흡현(歙縣)'이라 불리던 이곳은 북송 때인 1121년 '휘주'로 개명된 후 원, 명,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간 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특히 남송이 오늘날의 항저우인 임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휘주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경제와 문화가 급속도로 번성했으며, 이때부터 안후이 상인을 일컫는 '휘상(徽商)'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휘주고성 전경 (출처: 인민망)


휘상은 산서성의 진상(晋商), 광동성 조주(潮州)의 조상(潮商)과 함께 중국의 무역을 주름 잡은 3대 상방 중 하나였다. 사실 휘주는 안후이성 북부와 같이 곡창 지대도 아닌 척박하기로 유명한 산골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지역에서 나는 나무나 차 등을 파는 장돌뱅이 상인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휘상(徽商)을 '휘낙타(徽駱駝)'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봇짐을 등에 지고 장사하던 모습이 낙타와 닮아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휘상이 널리 영향력을 지닌 대규모 상방이 된 것은 명나라 성화(1465-1487), 홍치(1488-1505)연간이다. 이때는 명나라가 건국된지 이미 100년이 지났고, 사회는 대체로 안정되어 상품경제가 충분히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졌다. 휘상은 이 좋은 기회를 붙잡아 ‘무휘불성진(無徽不成鎭)-휘상이 없으면 도시가 형성되지 않는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 경제의 핵심 세력으로 군림했다.


휘주의 특산물 중 하나인 휘묵(徽墨). 1915년 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휘상이 보여준 가장 독특한 점은 장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뒤에도 자손들에게는 반드시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하여 관직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아버지 주송이 바로 휘주 출신이다. 휘주가 문방사우의 주산지였기에 학문과 가까웠던 덕분인지, 아니면 상업을 천시하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거상들이 돈을 번 뒤에는 '장사를 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한다'라는 라는 모토를 따라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학문에 심취하는 '고이호유(賈而好儒)'의 전통을 형성해왔다.


아무리 막강한 재력을 가진 거상일지라도 관직이 없으면 무시당하던 유교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공부를 통해 관직을 얻고 조정과의 인맥을 쌓아 사업적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을것이다. 이렇게 학문적 소양을 쌓으며 얻은 풍부한 지식과 판단력, 그리고 선비다운 덕망은 휘상들이 다른 지역 상인들에 비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했고, 그들이 단숨에 천하의 거부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휘상의 사업의 전통과 노하우가 후대에 전수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한다. 장사는 그들에게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https://www.wenxiaobai.com/api/expends/detail?article=356c2a6b-4cb4-40d0-b3ef-b058762023b9


휘주 지역 특유의 전통 건축을 휘파건축(徽派建筑)이라 한다. 안후이성과 저장성, 푸젠성 북부를 아우르는 강남 민가 건축의 정수로 손꼽힌다. 휘파건축의 민가 양식의 가장 도드라진 외형적 특징은 이른바 '백벽대와(白墙黛瓦)'라 불리는 백색의 높은 벽과 검은 기와의 강렬한 대비다. 특히 지붕 위로 솟아오른 독특한 담장 모양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는 말머리를 닮았다 하여 '마두벽(马토墙)'이라 부르는 방화벽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구조상 화재가 옆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실용적인 장치지만, 흡사 중국식 가체를 연상시키는 층층이 솟은 그 형상이 정적인 마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독특한 특징을 가진 살림집에 더해, 가문의 뿌리를 모시는 사당, 그리고 충효와 절개를 기리는 패방(牌坊)을 합쳐 '휘파 삼절(三絶)'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차이나타운의 입구로 익숙한 패방은 한국의 홍살문이나 일본의 도리이와 그 근원을 공유하는 상징적 구조물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대문이자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휘주의 패방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시대의 가치관을 새긴 '돌로 만든 기념비'로 진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목에 누군가의 공적이나 열녀의 절개를 기리는 패방을 세움으로써, 유교적 지배 가치가 공동체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것이다.




이 패방 중 독보적인 것이 휘주고성 안에 위치한 ‘허국석방(許國石坊)’이다. 석방이 기리는 인물 허국은 1527년에 흡현에서 태어나 39살이 되던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후 예부상서(교육부+ 문체부 장관) 대학사(대통령 비서실장 + 국무총리), 태자태보, 소보 등 명나라 최고위 관직을 두루 맡았다. 명나라 융경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기에 조선과도 인연이 있다.


만력제 12년인 1584년 허국은 운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4개월의 특별 휴가를 받아 고향에서 패방을 세울 것을 명 받는다. 당시 일반 관료는 다리 네개짜리 패방만 세울 수 있었음에도 허국은 허락도 없이 다리가 8개인 화려한 팔각 패방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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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4개월이 한참 지나고 8개월이 지나서 패방 건립을 완성하고 허국은 황제를 알현한다. 영락제는 이때 가 "4개월이면 8각도 다 지었겠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에 허국은 "폐하의 은혜로 짓게 된 것이 바로 이 8각 패방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사후 허락을 받아 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것이 중국 유일의 8각 패방이다.


허국석방은 재료만 돌일 뿐, 그 가공과 조립 방식은 전통 목조 건축의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매우 독특한 구조물이다. 석재를 정교하게 재단하여 못같은 고정 장치 없이 오직 부재간의 맞물림만으로 세워 올렸다. 수백 년의 세월을 버티며 건재한 모습은 당시 휘주 석공들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지금까지 증명한다.


각 면에는 허국의 공적과 시대에 대한 찬양이 화려한 조각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남쪽 외면에는 황제의 위엄과 허국의 충성심을 상징하는 거룡등비(巨龍騰飛)가, 내면에는 젊고 유능한 황제를 칭송하는 독수리와 오소리 등이 조각되어 있다.


소보 겸 태자태보 예부상서 무영전대학사 허국 (少保 兼 太子太保 禮部尙書 武英殿大學士 許國)



동쪽에는 허국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정통 엘리트임을 상징하는 ‘어약용문(魚躍龍門)’과 세 차례의 승진을 의미하는 '삼희보(三喜報)'를 새겼다. 서쪽과 북쪽에는 봉황, 기린, 서학 등을 통해 태평성세와 허국의 고결한 인품을 형상화했으며, 특히 북쪽 내면에는 《시경》의 '녹명'을 인용한 녹명도를 통해 국가의 평화로움을 묘사했다.


이러한 화려한 조각들 사이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석조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영조법식』에 등장하는 '육출’과 ‘사출’ 형태의 금문(錦紋)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목조건축의 단청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화려한 문양을 돌 위에 새겨 넣은 것은 극히 드문 사례다. 석방의 건축적 화려함 덕에 허국의 자부심이 수백년 후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을 널리 오래 남기려던 그의 의도는 대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도 관직 이름을 다 써놨다... 대단한 자부심.


흡현에서 서쪽으로 6km 거리에 위치한 당월촌 패방군(棠樾牌坊群) 역시 휘주 고성을 방문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승지다. 이곳에는 당월촌이 집성촌인 포(鮑)씨 가문의 충성, 효도, 수절, 의리를 기리는 일곱 개의 패방이 마을 입구를 향해 장엄하게 줄지어 서 있다. 이 일곱 개의 패방 중 두 개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일곱개의 패방 중 세 번째 패방은 '포문령처왕씨절효방(鮑文齡妻汪氏節孝坊)'이다. 26세에 요절한 포문령의 아내 왕씨는 남편 사후, 수절하며 어린 아들을 습현(歙縣)의 명의로 키워 종사를 잇게 하였다. 이를 기리고자 왕씨가 80세 되던 해인 18세기 청나라 건륭제시기 족인(族人)들이 뜻을 모아 패방을 세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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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가 아닌 후처를 위한 패방도 존재한다. 다섯번째 패방인 ‘포문연계처오씨절효방(鲍文渊继妻吴氏节孝坊)’이다. 오씨(吴氏)는 22세에 시집와서 29세에 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며, 전처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키워 저명한 서법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 묘를 지어주는 등 선행을 많이 하여 1768년 청나라 건륭제 때 패방이 건설되었다. 당시 관습상 후처는 독립적인 패방을 가질 수 없었지만 전처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시부모를 봉양한 그녀의 헌신에 감복한 가문이 전처와 이름을 나란히 올리는 조건으로 황제의 특별 허락을 받아내었다.


일곱 개의 패방 중 두 개가 여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두고 당시 여권이 높았으리라 짐작한다면 큰 오해다. 오히려 국가와 가문이 나서서 누군가의 희생을 공식적으로 찬양한다는 것은, 살아남은 나머지 여성들에게 그 비극적인 길을 똑같이 따르라는 거대한 사회적 압박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말기 후이저우의 부유한 청씨 가문 다섯 여인의 각기 다른 운명을 그린 드라마 "후이저우 여인들(徽州女人, 2006)"



당시 휘주 여성들의 삶은 가혹했다. 옛 휘주의 남자들은 장사를 하러 나가면 몇 년씩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전부 남겨진 여인들의 몫이었다. 위로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양육하며 휘주 여인들은 가문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유교적 도덕 규율은 장기간 출타하는 남편들을 대신해 부녀자들을 집안에 얽어매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당월촌에는 휘파 삼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당 건축물 역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을의 중심부에는 가문의 남성 조상들을 모시는 으리으리한 돈본당(敦本堂)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맞은편에는 다소 비밀스럽고 소박한 듯 보이나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여성 전용 사당 청의당(清懿堂)이 마주 서 있다. 여성만을 위한 사당은 중국 대륙 전체를 통틀어 이곳 청의당이 유일하다.



포씨가문의 여성전용 사당 '청의당'


'맑고 고결한 덕행'이라는 뜻을 지닌 청의당은 휘주의 대염상 포계운(鮑啓運)이 아들 포유래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가경 10년(1805년)에 건립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포계운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형마저 장사를 하러 떠나면서 집안의 생계가 오롯이 누나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졌었다고 한다. 누나는 어린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평생 시집도 가지 않고 헌신했다. 하지만 당시 관습상 출가하지 않은 딸의 이름은 족보에 올릴 수 없었다. 사당에 모셔져 제사를 받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계운은 평생 고생만 한 누나가 죽어서도 혼백이 떠돌며 의지할 곳 없을 것을 가련히 여겼다. 이후 자수성가한 그는 큰돈을 들여 누나를 위한 사당인 청의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청의당은 남성 사당인 돈본당과 정면으로 마주 보게 설계되었다. 이는 남성을 하늘(乾)로, 여성을 땅(坤)으로 상징하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충실한 배치다. 3개의 안뜰과 5개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청의당은 그 규모 면에서 오히려 남성 조상전보다 더 웅장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러한 공간 디자인은 "여자가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는 의미를 건축적으로 실현한 결과라고 한다.


청의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입구 팔자벽(八字牆)에 새겨진 정교한 벽돌 조각(磚雕)들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홍치제의 초상화나 관우 사당처럼 지고한 권위의 공간에나 쓰이던 화려한 '출검 무늬(모닷금)'가 새겨져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여성의 공간에 이토록 격조 높은 문양이 허락된 것은, 근대로 접어들며 여성들의 인내와 희생이 단순히 가문의 보조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체적인 목소리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청의당 팔자벽의 화려한 벽돌조각


청의당의 건립은 포계운의 결단이었지만, 이곳이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현재 유일하게 남은 ‘여성 사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포계운의 형수 왕씨(汪氏)의 공헌이 컸다. 그녀는 여성 사당이 지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모든 저축을 내놓아 백 무(畝=2만평)의 옥토를 구입해 사당의 공전(公田)으로 기부하였다. 이 공전을 가문 여성들에게 저렴하게 임대하여 경작하게 함으로써, 사당은 매년 가난한 여성들에게 일정량의 곡식과 품위유지비(지분전, 脂粉錢)를 지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허국석방의 명대 금문(錦紋)이 압도적인 권위와 영광을 웅변한다면, 청의당의 벽돌 조각은 그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힌 듯 훨씬 더 간결하고 정제된 미학으로 다가온다. 복잡한 입체감을 걷어내고 기하학적인 선의 분할과 평면성을 강조한 이 조각은, 비록 전근대 가부장제 사회의 견고한 틀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란 가문의 번영을 돕고 가풍을 엄격히 수호하는 조력자에 머물렀을지라도, 그 안에서 침묵으로 다져진 여인들의 깊고 단단한 내면을 닮았다.


허국석방의 남성적인 힘에서 시작한 휘주 건축의 미학은 청의당의 여성적인 섬세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차가운 벽돌 위에 새겨진 절제된 출검 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문의 명예라는 거대한 바다 밑바닥에서 고요히 빛을 발하던 여인들의 지혜와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참고자료

허국석방 사진: https://www.sohu.com/a/819325864_121124404

당월패방군: https://sinology.org/archives/23425

https://blog.naver.com/kjschina/221146247078

https://zhidao.baidu.com/question/1460788052653680500.html

청의당:https://www.sohu.com/a/169047191_737981

https://www.meipian.cn/58ldhdrs

https://baijiahao.baidu.com/s?id=1659216262978263236

https://kknews.cc/history/rp9zz8n.html

https://www.meipian.cn/51idhp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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