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로드 6 | 송에서 금으로 이어진 창문의 언어
고건축을 이야기할 때 창호는 종종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창호는 중국식 용어로는 문창(門窓)이라고 한다.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과 보, 공간의 위계를 드러내는 지붕 형식에 비해, 창호는 장식적 디테일로 밀려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창호는 내부와 외부, 구조와 장식, 기능과 상징이 맞닿는 경계에 위치한다. 특히 송·금 교체기의 북중국에서는 이 작은 건축 요소에 정치적 단절과 문화적 연속이 동시에 각인되어 있다. 창호를 들여다보는 일은 따라서 제국의 교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시각 문법을 추적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러한 시간의 궤적을 추적하려면 중국 고건축의 정수를 간직한 산서성(山西省)으로 향해야 한다. 불광사(佛光寺)와 남선사(南禅寺) 같은 당(唐)대 목조 건축부터 명·청대의 민가에 이르기까지, 산서성은 『영조법식(营造法式)』의 규범이 실제 유구로 가장 충실히 남아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중원 왕조뿐 아니라 요(遼)와 금(金) 같은 북방 이민족 왕조의 유산 또한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1056년 건립된 응현 목탑(应县木塔)을 통해 그들만의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가구식 구조와 탑의 거대한 규모는 요가 단순히 중원 건축을 모방한 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기술적 실험을 이룬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1115년 만주에서 발흥한지 불과 10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의 패자로 부상한 여진족의 금나라는 다른 과제에 직면했다. 급격한 지배 영역의 팽창 속에서 제도와 시각 언어를 단기간에 정비해야 했던 금은 한족의 관료제와 문화 자산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자신들만의 정통성을 세워나갔다.
120년이라는 짧고 격동적인 금의 역사 속에서도, 요의 멸망 이후 몽골의 침공이 본격화되기 전까지의 약 80년간의 짧은 번영기와 이후의 급격한 쇠퇴로 인해 오늘날까지 전하는 금나라 건축 사례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산서성 숴저우시(朔州, 삭주)에 위치한 숭복사(崇福寺) 미타전(弥陀殿)은 금대 건축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금나라의 제3대 황제 희종(熙宗)은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고 과거 제도를 처음 시행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적극적으로 중국식으로 정비한 군주였다. 희종 자신 또한 금나라 황제 가운데 최초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착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앙 집권적 통치 질서를 강화하고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를 제도적으로 공고히 하였다.
희종은 이러한 정치·제도적 개편과 더불어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는데, 황통(皇统) 3년(1143)에 조서를 내려 숭복사에 아미타전과 관음전을 증건하게 하였다. 아미타전이 사후 구제와 왕생을 지향하는 정토 신앙의 중심이라면, 관음전은 현세의 고통에 즉각 응답하는 자비 신앙의 공간으로, 두 전각의 건설은 국가 질서와 민간 신앙을 함께 포섭하려 했던 희종의 통치 의도를 보여준다.
숭복사 미타전은 구조적으로 매우 대담한 실험이 이루어진 현장이다. 내부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둥을 줄이거나 옮기는 감주법(减柱法)과 이주법(移柱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지 않고 직접 보를 얹는 단주부중(短柱负重) 같은 고난도 가구 공법을 수행했다.
이러한 구조적 대담성은 창틀에 이르러서도 단순히 송대 목조건축의 전통을 계승하는 수준을 넘어, 화려한 기하학적 조형 실험으로 확장된다. 1103년 반포된 북송의 건축 지침서 《영조법식(營造法式)》이 제시한 격자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내부에 구현된 장식 밀도는 이전 시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다. 숭복사 미타전에는 총 45개의 문과 창문이 있으며, 15가지의 서로 다른 문양 장식이 사용되었다. 이 다양성과 장식적 풍부함은 흡사 스페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 건축인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킨다.
당·요 시대 및 금대 초기 사찰의 창호는 대체로 살이 두껍고 단순한 형태거나 통판에 꽃무늬를 투각한 ‘투조화판창(透彫花板窓)’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숭복사 미타전에 이르면 가느다란 격자 살을 정밀하게 조합한 기하학적 체계로 발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양식이 사진에 보이는 '육교십이완(6交12椀)'양식이다. 여기서 ‘교(交)’는 목살이 서로 교차하는 결구를, ‘완(椀)’은 그 교차로 인해 형성된 공간 단위를 의미한다. 이는 후대에 건축된 자금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삼교육완(三交六椀)’보다 높은 격식으로, 중국에 현존하는 고건축 문창 장식 도안 중 가장 복잡한 형태이다.
이러한 기술적 도약의 배경에 이 다시한번 『영조법식』 이 자리한다. 권14와 권15에 수록된 ‘소목작(小木作) 제도’는 창살 문양을 ‘분격(分格)’과 ‘장식(裝飾)’이라는 원리에 따라 수치적으로 정밀하게 규정한다. 특히 ‘삼교육완’과 같은 격자 형식의 설계 방법이 도판과 함께 상세히 제시되어 있어, 이 시기부터 창호 제작이 단순한 목공 기술을 넘어 모듈화된 설계 체계에 기반한 정밀 장식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문헌상 창호 제작 방식은 두꺼운 판재를 뚫거나 조각하는 ‘판작(板作)’과 가는 살대를 엮어 기하학적 격자를 구성하는 ‘격작(格作)’의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금나라 중기, 곧 미타전이 건립된 시기에 이르면 건축 장인 조직 내부에서 구조를 담당하는 ‘대목작(大木作)’과 장식 및 창호를 담당하는 ‘소목작(小木作)’의 역할 분화가 더욱 명확해진다. 장인들은 단순히 자연 형상을 모사하는 수준을 넘어, 목살이 만나는 접점의 각도와 결구 방식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기하학적 조립 체계를 확립하였다. 다시 말해 무늬를 ‘새기는’ 기술에서 격자를 ‘짜는’ 기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숭복사 미타전의 창호는 이처럼 '조각(Sculpture)'의 영역에서 건축적 직조(Tectonic Weaving)'의 영역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정점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장식의 변화를 넘어서 설계 사고의 시스템화가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이 기술적 진화는 시각적 화려함뿐 아니라 실용적 성능도 동시에 확보했다. 가는 살을 엮는 방식은 통판보다 온습도 변화에 따른 뒤틀림에 강하고, 가벼운 구조로도 넓은 면적을 안정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또한 판작식 창호가 빛을 덩어리째 통과시킨다면, 미타전의 치밀한 격작식 창호는 빛을 미세하게 분절하여 내부 공간의 장엄함을 증폭시키는 광학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은 결코 장식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다. 분할의 질서가 장식보다 먼저 드러나는 구성, 그리고 직선이 만들어내는 절제된 긴장은 송대 창호 문법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이는 구조적 복잡성이 크게 증가했음에도 형식 언어 자체는 이전 시대의 규범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숭복사 창호는 금대 건축 특유의 실험적 구조 속에서도 시각적 질서만큼은 가장 안정된 전통을 지속하려 했던 장인들의 의지를 드러낸다. 제국의 패권이 교체되었음에도 그들이 추구한 미학적 이상은 이 치밀한 격자망을 통해 더욱 공고히 계승되고 있었던 셈이다.
숭복사 미타전의 정교한 목조 창호를 뒤로하고,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그 미학적 질서가 또 다른 매체와 공간으로 확장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숭복사가 위치한 숴줘우시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산서성 직산현(稷山县)에는 숭복사 미타전과 비슷한 시기인 금대(12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씨 가문의 묘역인 마촌전조묘(马村砖雕墓)가 위치해 있다. 비록 숭복사만큼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곳은 지하에 지상 가옥의 모습을 정교하게 재현한 이른바 '전돌(벽돌)로 지은 지하 저택'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유적이 주목되는 이유는 묘실 벽면 전체를 정교하게 가공된 전돌로 구성하여 지상 건축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전통 풍수 개념에서 인간이 생전에 거주하는 집을 양택(陽宅), 사후 영혼이 머무는 묘지를 음택(陰宅)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음택은 실제 주거 공간을 그대로 모사하기보다 상징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는 그러한 통념과 달리 생자의 주거 공간인 양택을 구체적 건축 형식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재현 방식은 산서 남부와 하남 일대 금대 전조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며, 당시 장묘 공간에 대한 지역적 인식과 조형 감각을 보여준다.
목재로 제작되는 건축 부재를 전돌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장인들은 단순한 조적 기술을 넘어 목구조 전반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묘실 내부에 재현된 기둥, 보, 공포, 창호 등의 요소는 금대 목조건축 특유의 장식성과 구조 형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전조 장인이 대목작과 소목작 영역을 아우르는 건축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전조묘에서도 금대 건축 특유의 장식적 창호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실제 기능을 수행하는 창이 아니기에 물리적으로 가능한 구조에 제한되지 않고, 『영조법식』에 나타난 쇄문과 금문 형식을 그대로 조각해 놓았다. 이는 묘실 창틀이 실제 개구부가 아니라 상징적 건축 요소였기 때문에 구조적 제약에서 자유로웠고, 그 결과 기능성보다 규범적 형식의 재현이 우선된것이다.
숭복사와 마촌 전조묘의 창틀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건축은 재료와 맥락, 기능에서 극명하게 갈라진다. 하나는 사찰의 실제 창호로서 목재라는 살아 있는 재료 위에 세워진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장묘 공간의 벽면에 돌로 새겨 넣은 상징적 형상이다. 전자는 빛과 바람을 드나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후자는 그런 필요와 무관하게 형식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전조묘 창틀에는 『영조법식』의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송대 창호 형식이 특정 건축 유형에 속한 기술이 아니라, 공간과 매체가 달라져도 반복될 수 있는 시각 질서였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금나라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순한 정복과 단절의 서사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숭복사의 목조 창호와 마촌 전돌묘의 석조 창틀은 송대 건축 문법이 금대의 조건 속에서 폐기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다른 매체와 공간에서 번역되어 살아남았음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들이다. 창틀이라는 미시적 요소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제국은 바뀌어도 건축의 언어는 더 느린 속도로 이동하며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창문은 공간을 나누면서도 빛과 공기를 통과시키는 장치이다. 형태는 달라져도 원리는 이어지고, 재료가 바뀌어도 질서는 지속된다.
참고자료 :
金代 塼彫墓의 주택 재현 연구 - 山西 稷山 馬村 金墓를 중심으로
마춘 벽돌 조각릉: 송진 시대 단씨 가문의 독특한 무덤
https://www.sohu.com/a/966844802_121124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