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로드 5 | 허베이성 각원사 문수전
황하(黃河)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하북(河北)’이라 불리는 허베이성은 수도 베이징과 항구도시 톈진을 마치 계란흰자처럼 감싸고 있다. 서울·인천·경기로 이루어진 한국 수도권의 규모를 약 18배로 키운 뒤 좌우를 반전시키면, 대략 중국 수도권 초광역권인 징진지(京津冀)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베이징 서남쪽 류리차오(六里桥) 장거리버스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4~5시간가량 달리면 허베이성 바오딩시에 속한 라이위안현(涞源县, 래원현)에 이른다. 경기도의 군청 소재지를 떠올리게 하는 낮고 한적한 시가지 한켠, 한국 공원에서 흔히 보던 야외 운동기구가 놓인 공원 옆으로 각원사(阁院寺, 거위안쓰)의 붉은 담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누각(閣)이 있는 사원’이라는 다소 담담한 이름을 지닌 이 절은 당·요대에 사찰 앞에 불각을 세우는 전통에 따라 한때 다층 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원사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은 이제 온데간데 없지만 이곳의 문수전(文殊殿)은 서기 966년 요나라 시기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 알려진 요대 8대 목조건축 가운데 유일하게 해체 중수를 거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해 온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1930년대 중국 근대 건축사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량쓰청(梁思成)·린후이인(林徽因) 부부는 《중국건축사》 편찬을 위해 산시성과 허베이의 고건축물을 답사 중이였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그들은 예정되어있던 각원사 답사를 포기해야했다고 전해진다. 각원사가 이때 이들과 인연을 맺지 못한 탓에 문수전의 장엄한 모습은 중국건축사에 수록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이 사찰은 그 탁월한 건축사적 가치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에야 학계와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공백의 결과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광기에 휩싸인 홍위병들에 의해 문수전 내부의 소조 불상과 육신불이 파괴되고,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의 금신 및 대좌에서 발견된 다량의 불경과 전적이 무참히 훼손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성(省) 혁명위원회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즉각 개입함으로써 전각 자체는 철거를 면하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보면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늦게 주목을 받은 덕에 각원사 주변은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느껴지는 소란스럽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아직까지는 덜한편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 일반인에게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고 고건축 연구자들이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 자물쇠를 열고서야 내부를 답사할 수 있었다.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제한적으로 일반 공개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용히 남아 있던 각원사는 문물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 건축사에서 여러 ‘최초’와 ‘유일’의 기록을 지니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우선 중국에 남아 있는 요나라(10–12세기) 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전각 외부에 남아 있는 단청 역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청록색 계열 위주 채색으로, 초기 동아시아 건축 채화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또한 정면 창에 남아 있는 능화문(마름꽃 모양 기하무늬) 격자창은 현존하는 것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고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창살이다.
문수전은 당나라 시기의 전각 기초 위에 재건된 건물로 방향과 형식 면에서 다른 요나라 건축과 차이를 보인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태양 숭배 전통을 지닌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궁궐과 사찰 대부분을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도록 배치하였다. 그러나 각원사 문수전은 당대 건물의 기단을 그대로 계승해 세워진 탓에, 예외적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다. 현재 전각 안에 모셔진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은 후대에 추가된 불상으로, 건축사적 관점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 전각의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단층 맞배지붕의 전당식 형식, 정방형 평면, 그리고 기둥 수를 극도로 줄인 구조를 동시에 갖춘 데 있다.
구조적으로 문수전은 처마가 하나인 단층 전각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씩인 정방형 평면을 이루며, 한 변의 길이는 약 15미터, 높이는 약 12.5미터에 달한다. 내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기둥 수를 최소화한 감주식(减柱式) 구조로, 원래 설계에서는 약 484㎡에 이르는 넓은 공간을 단 두 개의 중심 기둥만으로 지탱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는 요·송대에 발달한 구조 기법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고 넓은 의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현재 보이는 네 개의 기둥 가운데 앞쪽 두 개는 청대에 보강 목적으로 추가된 것으로 전체 하중의 약 3퍼센트만을 부담한다.
문수전 내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치밀하면서도 힘 있는 구조를 이룬 공포와, 그 표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채화이다. 화초문과 기하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데, 특히 중국 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두공과 들보의 면면에 다양한 종류의 금문(錦紋)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채화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으나, 화초문의 구성과 색채는 송대 《영조법식》에 수록된 오채편장(五彩遍装)과 매우 유사하여, 요대에 이미 자국의 미감과 결합된 관식 채화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금문의 복잡도와 도안, 그리고 그 선명함이 이 명·청대 양식과 더 잘 부합하므로,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이루어진 보수 과정에서 덧칠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문수전 내부 들보 아래에는 “원나라 태정(1324-1328) 중월 10일 보수”, “명 정덕 2년(1507) 7월 길일 보수”, “청 가경 병무년 (1806)10일 길일 보수” 등 여러 왕조에 걸친 수리 기록이 연속적으로 남아 있다. 근대 이전에 확인되는 가장 최근의 보수는 청 광서 18년(1892)으로, 오늘날 보이는 금문과 채화 역시 이 시기에 그려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두공에 사용된 금문의 유형으로는 한국에서 ‘소슬금’이라고 부르는 쇄문과 ‘모닷금’이라고 부르는 출검문(出劍紋) 계열, 특히 사각형 기반의 4출과 육각형 기반의 6출 출검문이 확인된다. 쇄문도 3출 출검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단청 제작에서는 종이를 접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금문 도안을 만든 뒤, 바늘로 구멍을 뚫고 조개가루를 담은 주머니로 두드려 문양을 전사하는 ‘타초’ 기법을 사용한다. 그 결과 한국 사찰의 금문은 거의 기계적으로 정확한 대칭을 유지한다. 이에 비해 각원사 공포에 그려진 금문은 그러한 엄밀한 대칭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예컨대 들보에 그려진 3출 출검문, 곧 쇄문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느슨해지며 여백이 드러나는데, 마치 작업자가 서둘러 붓을 놓고 퇴근을 하고 싶어 했던 듯한 흔적처럼 느껴진다. 바로 아래의 여유있는 신선 그림과 함께 웃음을 자아낸다.
내부 채화도 흥미롭지만, 문수전에서 가장 매혹적인 요소는 요나라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횡피창(横披窗, 문 위에 덧달린 가로형 창)들이다. 각원사 문수보살전에는 모두 15개의 문과 창이 남아 있는데, 산시성 숴저우 충복사(崇福寺) 본당과 영천 이선사(二仙寺) 동정(東亭)에 이어, 중국에서 요대의 소형 목조 문·창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거의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특히 이들 창문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오늘날까지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목조 창틀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특히 966년 건물이 건립되었을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당심간(当心间, 건물의 축선 한가운데에 놓인 가장 중심적인 공간) 요대 창살에는 고대 인도 실담(悉昙) 산스크리트 문자와 함께, 밀교적 의미를 지닌 여러 종교 도상이 새겨져 있다. 그 양옆의 창은 14세기 원나라 시기의 양식이다. 가장 바깥쪽은 16세기 말 명나라 만력 시대에 보수되었으며, 문은 100년 전 중화민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문수전의 서측과 동측창에는 요대의 창은 없는 대신 바로 직후인 금나라 시기의 격자창이 보존되어 있다. 문과 창문은 작은 목재 부품이기 때문에 고대 건축물에서 보존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재 각원사 문수전처럼 요, 금, 원, 명, 청, 그리고 공화정 시대의 창문이 모두 남아 있는 고대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심간(当心间, 건물의 축선 한가운데에 놓인 가장 중심적인 공간) 횡피창 중앙의 요대 창문은 공예적으로 가장 정교한 횡피창이다. 이러한 범자 명문과 상징 문양이 건축의 창살 장식으로 체계적으로 결합된 사례는 동아시아 종교 건축사에서도 매우 드물다. 격자창의 윗부분에는 가로 방향으로 일곱 개의 삼지 금강령(金刚铃) 문양이 서로 일정한 간격으로 중첩되어 배열되어 있다. 금강령은 밀교에서 사용하는 부처의 지혜가 소리로 울려 퍼지는 도구로 여러 존격을 깨우는(경각시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금강령 사이에는 네 개의 삼지 금강저(金刚杵, 바즈라)와 네 개의 보병(宝瓶, 정화의 물을 담는 법구)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이 금강령·금강저·보병은 모두 밀교에서 말하는 팔보(八宝)에 해당하는 상징 도상이다. 금강령 아래쪽의 작은 구멍 7개에는 원래 작은 종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울려퍼졌을 것 이다.
하부 구조는 가로·세로·사선 세 방향의 목재 부재를 짜 맞춘 사교팔사(四交八斜) 격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각형 격안의 가장자리는 두 갈래·세 갈래로 갈라지는 곡선형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 목재 띠에는 투각으로 새긴 금강저(金刚杵, 바즈라)문양이 가로와 세로로 교차 배치되어 네 조의 십자형 삼지 갈마저(羯磨杵)를 형성한다. 삼지창 처럼 생긴 금강저는 번개처럼 모든 번뇌를 부수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법구이며, 두개의 금강저가 교차된 갈마저는 사방을 제압하는 힘, 즉 네 방향의 번뇌를 동시에 끊는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문수전 격자창의 갈마저는 단순한 무기 문양이 아니라, 밀교 의식에서 제단을 결계 치고 사방을 정화하는 상징 장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선 방향의 부재 위에는 실담자(悉昙字)로 쓴 범자 17자와 만다라화, 청련화등(青莲花灯)을 본뜬 원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앙에는 범자 ‘啰(ra)’가 놓이고 그 둘레에는 ku·r·jha·nr 네 글자가 배치되어 인도 불교의 지(地)·수(水)·화(火)·풍(風)사대원소를 상징하는 구조를 이룬다(주황색). 비슷한 식으로 다른 산스크리트 문자들도 순서대로 연결하면 각각 구(흰색), 사다리꼴(파랑), 반원(빨강)형상을 나타내며, 이것들이 중첩되어 일종의 제단형상을 만들어낸다.
당삼간 왼쪽의 서차간(西次間)의 오른쪽 격자문에는 다섯 개의 세로 목재에 45도로 비스듬한 목재가 덧대어져 있어 전체가 즉 세 방향이 교차하고 여섯 갈래로 뻗는 ‘삼교육사(三交六斜)’의 기하 구조를 이룬다. 이 다섯 개의 세로 부재에도 실담 문자로 쓴 범자와 함께 금강령, 정병, 연꽃 같은 밀교 의식 도구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금강저도 보이는데, 종 모양의 금강령은 크기가 작아지고 손잡이도 원래의 세 갈래에서 한 갈래로 단순화되어 있다. 물병을 뜻하는 정병은 횡피창의 도상과 비슷한 형식으로, 격자 한가운데 놓여 중심이 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 격자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두 11자의 범자(지금은 10자만 남음)로, 안쪽과 바깥쪽 두 겹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부처의 힘이 공간과 사람에게 스며들어 깨끗하게 만든다는 ‘가피’와 ‘정화’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피(加被)란 부처나 보살의 신성한 힘이 대상에게 더해져 그를 감싸 지켜 주는 것을 뜻하며, 보호와 정화, 축복의 효력이 내려오는 상태를 말한다. 밀교에서는 이러한 가피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매개를 통해 작동한다고 이해하는데, 예컨대 진언을 외울 때에는 소리 그 자체가 가피를 일으키고, 불상 앞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는 그 형상에 가피가 깃들며, 만다라 안에 들어설 때에는 그 공간 전체가 가피의 장(場)이 되고, 문살에 범자를 새겨 놓을 때에는 그 범자를 통과하는 사람에게 가피가 내려온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각원사 문수전의 문살과 횡피에 새겨진 범자와 법기 도상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전각을 드나드는 이들이 문수보살과 여러 본존의 가피를 직접 체험하도록 의도된 공간적 장치이다.
한국인들에게 요나라는 고려와의 대립과 전쟁으로 인해 다소 거칠고 야만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나 요는 유목적 정치 질서와 불교 신앙이 결합된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당대의 문명국가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지혜와 왕도(王道)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신앙이다. 산서성의 오대산을 성지로 삼은 문수신앙은 요 제국의 국가적 수호존으로 격상되었고, 고려를 세 차례나 침공했던 요 성종 역시 스스로의 이름 야율융서(耶律隆绪)를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의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로 바꿀 만큼 문수 신앙에 귀의하였다. 이는 그가 자신을 전륜성왕적 군주, 곧 문수의 가호 아래 불법을 수호하는 이상적 통치자로 위치시키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치·종교적 자기 인식은 각원사 문수전의 공간 구성 속에 응축되어 있다. 문수전의 횡피창과 격자문은 범자를 핵심 요소로 삼아 하나의 만다라 구조를 형성하며, 전각 전체를 신성한 의례 공간으로 조직한다. 요대 중기 유행한 밀교 신앙은 단순한 신앙 차원을 넘어, 건축의 평면과 장식, 동선과 방향성 속에까지 스며들어 제국의 질서를 우주적 원리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라이위안은 송나라와 접한 요나라 남부 국경의 요충지로, 고대 이래 중원, 산서 고원, 내몽골 초원을 잇는 교통의 결절점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접경지였고, 이후 한·당·요·금·원·명·청을 거치며 북방 방어선과 교통로가 만나는 전략적 경계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요·송 문명권의 접경에 위치한 문수전은 단순한 지방 사찰이 아니라 경계 공간에서 제국의 통치 정당성과 불교적 우주 질서를 시각적으로 고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념비로 기능하도록 설계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문수전은 요나라가 스스로의 통치 이념을 불법으로 정당화하고, 제국의 질서를 불교적 우주론과 결합시키고자 했던 정치·종교적 기획이 건축적으로 응축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원과 초원, 교학과 밀교, 유목 왕권과 한족 건축 전통이 교차하는 접경지 라이위안에서 지어진 문수전은 건축·종교·권력이 응축된 요 제국의 세계관을 다른 차원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하나의 관문, 곧 시간이 겹쳐 열리는 마법진과 같은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선화(宣化) 요나라 묘와 각원사(阁院寺): 밀교 의례의 영향 아래 형성된 상징 체계와 성스러운 공간宣化辽墓与阁院寺:密教仪轨影响下的符号体系和神圣空间
https://www.sohu.com/a/280407136_688008
요나라 8대 건축 건축물 중 으뜸으로 꼽히는 각원사의 문수보살전:
https://baijiahao.baidu.com/s?id=1841770133490074235&wfr=spider&for=pc
문수전 내외부 고해상도 사진 : https://baijiahao.baidu.com/s?id=1847600415636702629&wfr=spider&for=pc
http://www.360doc.com/content/25/0630/11/35877779_1156499338.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