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는 사라지고 패턴은 남는다

패턴로드 4 | 둔황 벽화 속《영조법식》금문

by 고훈민


동양 건축에 사용되는 기하학적 패턴은 비단 ‘금(錦)’ 자를 사용하여 금문(錦紋, 간체자 锦纹, Jǐn wén)이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금(錦)은 일반적인 비단(silk)이 아니라, 비단에 추가적인 날실을 넣어 복잡한 무늬를 직조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장식 직물인 양단(brocade)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금문은 과연 언제부터 건축 장식의 체계로 정착했을까.


다수의 연구는 그 제도적 출발점을 북송(北宋) 시기인 1103년, 이계(李誡, Li Jie)가 편찬한 관영 건축서 《영조법식(營造法式)》에서 찾는다. 이 책에는 채화의 도식과 색채 규범, 부재별 장식 배치 원칙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그중 ‘쇄문(鎖紋)’이라 불리는 기하학적 문양군이 처음으로 명시적인 용어와 도식과 함께 등장한다. 물론 송대(宋代) 이전에도 직물, 금속공예, 벽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반복과 대칭에 기반한 기하 문양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그것이 목조건축의 구조 부재 위에 일정한 규칙과 위계에 따라 적용되는 ‘건축 장식의 문법’으로 제도화된 것은 영조법식을 통해서였다.



《영조법식(營造法式)》에 수록된 쇄문금(鎖紋錦)


이미 관영 건축 매뉴얼인 영조법식에 금문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문양 체계가 이계 개인의 창안이 아니라 북송 이전부터 건축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음을 짐작케한다. 영조법식은 특히 고려와 송대 건축의 계통적 연관성을 논하는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인용되는 문헌이다. 한국의 단청 연구자들 역시 비록 해당 시기의 실물 유구가 국내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봉정사 극락전 등에서 확인되는 일부 채화 문양과 구성 원리가 영조법식 계열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해 왔다. 이를 고려와 송 사이에 활발히 이루어진 사신 왕래, 불교 교류, 장인 이동 등 복합적인 문화 접촉의 맥락 속에서 해석할 경우, 영조법식에 정리된 금문 계열 기하 문양을 동아시아 건축 채화에서 규범화된 기하 패턴 전통의 초기 형성 단계로 파악하는 데에는 학계 전반에서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영조법식에 대한 연구는 불가피하게 한국 건축과의 계통적 연관성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이 책에 기록된 건축 채화 체계가 중국 현지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계승되고 변형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공유된 것이 많지 않다. 목조건축에 칠해지는 채화와 단청은 재료적 특성상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색, 박락, 퇴색, 풍화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주기적으로 다시 칠하는 행위 자체가 건축을 올바르게 보존하고 관리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건축물이 완전히 폐허로 방치되지 않는 이상 그 표면에는 언제나 해당 시대의 미감과 제도에 부합하는 ‘최신 양식’의 채화가 덧입혀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고건축들은 실제 건립 연대와는 무관하게 한국에서는 주로 조선 후기식, 중국에서는 명·청대식 채화 체계를 입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대한 중국 대륙과 그 안에 분포한 수많은 고건축에 대한 실증 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명한 궁궐이나 대형 사찰과 같은 대표적 관식(官式) 건축을 중심으로 비교가 이루어지다보니, 한국 학계에서는 송대 이후 중국 전통건축에서 금문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더해 금문을 본질적으로 한족의 건축 양식으로 보는 인식 아래에서, 송·원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를 거친 이민족 정복왕조가 한족 문화 전통을 의도적으로 배척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러나 최근 인터넷과 출판물을 통해 방대한 양의 중국 고건축, 벽화, 현장 사진 자료가 공개되면서, 금문을 포함한 기하학적 문양이 원·명·청대를 거치며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형되면서 사용되어 왔음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베이징 고궁박물관 고건축부의 수석 엔지니어 천퉁(陈彤)이 복원한 영조법식의 오채편장(五彩遍装)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대 건축 채화의 실물을 목조건축에서 직접 확인하기는 여전히 매우 어렵다. 산서성의 개화사(開化寺)나 불광사(佛光寺)와 같은 극히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면, 앞서 언급한 재도색의 관행으로 인해 원래의 송대 채화층은 대부분 후대 양식 아래에 덮이거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영조법식의 채화 제도와 가장 가까운 시기적 층위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매체는 목조 건축이 아니라 석굴 사원의 벽화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간쑤성 둔황(燉煌)의 막고굴(莫高窟)로 이곳에는 송대 전후의 채화 문법과 기하 문양 체계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영조법식의 도식과 실제 시각 문화 사이의 연결 고리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현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영조법식에 수록된 여러 문양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관심있는 기하학적 문양인 금문(錦紋)의 흔적을 찾는 일은 막고굴에서도 결코 쉽지 않다. 제 431호 굴의 목구조 석굴 처마 장식의 채화에서 육각형 격자에 기반한 기본적인 육각형 기하 문양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이는 영조법식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띠 모양의 요소들이 서로 얽히며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쇄문(鎖紋) 계열의 금문 구조와는 형태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둔황 막고굴 제431호 굴의 목구조 석굴 처마 장식의 채화



흥미롭게도 영조법식에 수록된 금문 문양의 직접 적용 사례는 그것을 편찬한 송나라의 건축물이 아니라 티베트계인 탕구트인들이 세운 이민족 국가 '서하(西夏)' 시기 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서하(西夏, 1038–1227)는 11세기 초 오늘날 간쑤성과 내몽골, 닝샤 일대를 포괄하는 실크로드 요충지를 장악한 다문화 불교국가였다. 서둔황이 서하의 지배하에 있던 1036년 이후, 이 지역은 송·요·금·서방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공존하는 국제적 교차점이었고 다양한 장인 집단과 화승, 승려들이 왕래하며 시각 문화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둔황 석굴에 남아 있는 서하 회화와 장식 문양을 보면 서역 계통의 요소뿐 아니라 송대 중원 회화와 건축 장식의 직접적인 영향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일부 연속 문양과 기둥, 서까래, 처마부의 띠 장식을 모방한 표현 방식은 영조법식에 규정된 채화 도식과 구조적으로 밀접하게 대응한다. 둔황학원 고고학연구소 소장을 지낸 류위취안(刘玉权)에 따르면, 둔황의 서하 석굴은 조성 양상과 양식적 특징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으며, 전기는 대략 1036년에서 1139년 전후, 후기는 1140년에서 1227년에 해당한다. 서하 전기의 석굴은 “대부분 이전 시대에 조성된 동굴을 개수한 것으로, 석굴의 형식 면에서 서하 시대의 독자적 특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둔황의 유림굴(榆林窟) 전경

이에 비해 서하 후기의 석굴에서는 다원적 문화 요소가 융합된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북송 중원 지역의 새로운 회화·장식 양식이 유입되는 한편, 티베트 불교, 나아가 네팔과 인도 계통의 도상 주제(불상과 보살의 자세, 수인, 장엄 방식)까지 함께 등장한다. 동일한 동굴, 심지어 같은 벽면 안에서도 현교(顯敎, 경전 중심의 교학 불교)와 밀교(密敎, 진언과 의식 수행을 중시하는 탄트라 불교)의 내용이 병존하고, 한족식과 티베트식 조형 언어(인물의 얼굴형, 신체 비례, 의복 주름 처리 방식)가 혼합된 인물상이 나란히 배치되는 사례도 많다.


둔황의 유림굴(榆林窟)은 막고굴에서 서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하나의 석굴군으로, 막고굴보다는 규모가 작고 덜 알려져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명대 이전의 벽화유적이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 글에서 살펴볼 것은 그중 영조법식의 건축채화가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꼽히는 서하 후기의 제 2굴, 제 3굴, 제 10굴이다.



유림굴 제 2굴 (榆林窟第2窟)


유림굴 제2굴 전경


유림굴 제2굴의 굴정은 복두(覆斗, 뒤집힌 쌀되박)식 사면지붕 형식이다. 이러한 석굴의 공간 경계는 평평한 벽면, 천장, 바닥으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일반적인 건축에서와 같은 ‘구조적 결절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내에서 관람자가 느끼는 공간감은 벽화의 색채와 내용뿐 아니라, 장식 문양이 ‘면’과 ‘면’의 경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그리고 장식 문양이 ‘면’을 어떻게 분절하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이 때문에 ‘구조적 결절점’이 없는 석실 공간에서 장식 문양은 건축 공간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조정(藻井, 천장 중앙에 깊게 들어간 장식 구조)과 벽화 가장자리의 장식 띠에는 영조법식과 매우 유사한 송대식 기하·연속 문양이 남북조 이래 유행하던 연주문(聯珠紋, 구슬을 꿰어 연결한 듯한 원환형 연속 문양) 및 티베트 불교 장식 문양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기본적인 구성 원리는 네 개의 경사면 위에 수평 방향으로 10여 겹의 띠 장식을 연속 배치하여 층위감과 깊이감을 강화하고, 정중앙에는 회전감을 지닌 반룡(盘龙, 또아리 튼 용) 문양을 배치하여 ‘중심’과 ‘상승’의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였다. 천정 전체의 주된 색조는 적갈색, 녹색, 백색이 중심을 이루며, 청색과 적색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이는 서하 민족이 녹색을 선호한 점과 적색을 내는 주사(朱砂) 안료의 수급이 부족했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 2굴 굴정 벽화와 중앙의 반룡문

반룡의 둘레에는 예각으로 이루어진 다층의 첩훈(叠晕, 층층히 겹쳐서 번지는 그라데이션) 무늬가 둘러져 있어 강한 동세를 형성한다. 이 무늬는 영조법식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난 글 영락궁 조정 천장화에서 살펴본 ‘망목문(网目纹)’과 유사하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채화에도 비슷한 도안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북방 소수민족 사회에서 유행하던 문양으로 추정된다.


동굴 내부 네 벽은 가로 방향으로 각각 세 구획으로 나뉘어 경변도(經變圖, 불교 경전의 내용을 장면 구성으로 시각화한 서사적 벽화)가 배치되어 있는데, 각 경변도 사이를 구획하는 띠 장식은 분명히 목조건축의 기둥 채화를 모방한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영조법식에 규정된 주액(柱额, 기둥 상부와 보 사이를 연결하는 수평 부재) 채화의 구성 원리와 놀라울 정도로 높은 일치도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있는 영조법식의 쇄문(琐纹)은 제 2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제2굴의 주액 채화와 영조법식의 어린기각(鱼鳞鳍脚)문양 비교


유림굴 제 2굴의 천장화 구성과 각각에 해당하는 영조법식의 문양 명칭




유림굴 제3굴(榆林窟第3窟)


유림굴 제3굴 전경


서하 중후반에 조성되었고 원나라 시대에 보수된 석굴 3호는 제2굴과 달리 얕은 궁륭형 천정을 이루고 있다. 궁륭형 천정과 벽면 사이의 전이는 곡면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므로, 기둥형 가장자리 장식의 ‘주두’ 부분이 벽면을 따라 휘어 올라가 천정 면으로 연결되고, 늘어진 장막형태의 가장자리 장식은 거의 전부 천정 면에 위치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 처리 방식은 관람자의 공간 지각을 조절하여 실내의 답답함을 줄이고, 천장이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착시를 만들어낸다. 주실의 천정 중앙에는 밀교 만다라 한 폭이 그려져 있고, 그 둘레에는 여러 겹의 가장자리 장식과 한 줄의 천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동굴 천정 중앙의 오방만다라와, 남·북벽 및 동·서 양단에 그려진 밀교 만다라 문양이 중원 전통의 조정(藻井) 형식과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법은 둔황 지역에서는 유림굴 제3굴과 안서 동천불동(東千佛洞) 서하 제2굴에서만 확인되는 것으로, 서하 석굴 장식의 독특한 사례이다.



위린 석굴 3호 천장


만다라 바로 바깥에는 영조법식에서 정지금(净地锦)의 한 종류로 분류되어있는 '사사구문(簇四毬纹)'이 그려져있다. '원이 네개 모여있다'고 해서 촉사구문(簇四毬纹) 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모양은 비교적 단순한 조형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건축 뿐 아니라 도예나 공예품에서도 널리 발견된다. 사사구문 아래에는 굽이치는 물 줄기를 닮아 곡수금(曲水锦)으로 분류되는 기하학적 문양이 보인다. 한자를 본딴 모양으로 인해 정자(丁字) 무늬 '쌍요시두(双钥匙头 열쇠 머리 모양)'라고 불리우는 문양이다. 그 다음 한줄의 모란 '지조권성화문(가지가 말려 꽃이 된 무늬)'을 지난 후 천불상들이 그려져 있다.


그 밑으로는 다시 보석으로 장식된 연꽃 (보장연화)문양이 한줄 들어가고, 청색과 녹색이 교차되어 있는 연주문(구슬 무늬)을 지나면 비로소 우리가 찾던 영조법식의 육출귀문(六出龟文)이 등장한다. 거북등 문양(구문) 단위의 중심 도안이 '육출(여섯 갈래)' 형태라 붙여진 이름으로 육각형 안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바깥으로 돌출된 뾰족한 꼭짓점, 즉 ‘육출판(六出瓣 여섯 개의 꽃잎 모양)’이 추가되어 있다. 한국사찰에서도 널리 관찰할 수 있는 육출형태 금문의 직계조상이라 할 수 있는 문양이다.


제2굴에서 관찰되는 영조법식의 육출귀문(六出龟文)



유림굴 제10굴(榆林窟第3窟)

유림굴 제10굴 벽화의 고해상도 복원


유림굴 제10굴은 서하 후기에 개착된 석굴로, 제 2굴과 마찬가지로 복두형 천정을 갖추고 중심 불단이 있는 구조이다. 사벽의 벽화는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 원대에 보수 채색되었다. 따라서 원래의 장식 방식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으나 동굴의 형식과 천정 가장자리 구성이 제2굴과 대체로 유사하다. 전실 통로는 평천정으로, 앞서 살펴본 사사구문(四斜毬文)의 중심에 쌍봉 문양을 배치하였다. 마찬가지로 망목문 문양이 쌍봉을 둘러싸고 있는데 원대에 채색되어서인지 지난 글에서 살펴본 영락궁 천정화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보여준다.



전실 통로의 사사구문(四斜毬文)과 쌍봉 문양


유림굴 제10굴의 천장화


천정의 전체적인 색조는 청색, 녹색, 적갈색이 주를 이루며, 이 적갈색은 주사 안료가 부족할 때 대용으로 쓴 붉은 계열 안료일 가능성이 있다. 조정 가장자리 문양 가운데 영조법식과 기본적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는 “천자문(天字)”, “왕자문(王字)”, “쌍요시두(双钥匙头)”, “교각귀문(交脚龟文)”, “사출(四出)”, “첩훈보주(叠晕宝珠)” 등이 있다. 이중 우리가 찾는 쇄문에 해당하는 교각귀문(交脚龟文) 문양은 앞서 제3굴의 육출귀문(六出龟文)과 마찬가지로 유림굴에서만 관찰되는 귀중한 사례이다. 또한 사출(四出)은 영조법식의 도식보다 더욱 복잡하고, 불염보주, 수면(兽面, 짐승얼굴) 등이 덧붙여져 있다.



영조법식에 나타난 교각귀문(交脚龟文)



복원도에서 발췌한 교각귀문(맨위) 와 사출(맨 아래)의 모습


마무리

유림굴 제 3굴의 공양자 벽화



앞서 살펴본 유림굴 제3굴의 벽면에는 벽화를 그리는데 필요한 비용을 공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몽골식 복식을 입은체 합장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옆에 써진 명문에는 원대(元代) 연호가 적혀있다. 이러한 도상과 회화 양식을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이 벽화가 서하 시기가 아니라 원대 이후에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유림굴이 단일 왕조의 폐쇄된 미술 공간이 아니라, 서하 멸망 이후에도 몽골 제국과 원 왕조 시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사용·개수되고, 그때마다 새로운 정치 질서와 신앙 주체가 기존의 시각 체계 위에 덧입혀졌음을 시사한다.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고려가 동쪽에서 요나라와 북송 사이에 위치하며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서하는 서쪽에서 요·북송과 더불어 유사한 삼자 균형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북송과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려와 달리, 서하는 정치·군사적으로 요나라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북송과는 형식상 조공과 칭신을 유지하면서도 언제 충돌로 전환될지 모르는 긴장 상태를 지속하였다. 13세기 초 몽골 세력이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서역으로 진출하면서 서하는 직접적인 팽창 압력에 직면하였다. 몽골은 서하의 수도를 포위하고 황하 수로를 끊어 수몰을 시도하는 등 강압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였고, 서하는 한때 항복과 조공을 통해 종속적 관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몽골이 중앙아시아 원정을 마친 뒤 서하가 출병을 거부하고 인질 제공을 미루자, 이를 배신으로 간주한 칭기즈 칸은 동서 양로로 군을 나누어 재차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다. 6차에 걸친 몽골과 서하의 전쟁 중마지막 원정에서 칭기즈 칸은 중병을 얻어 사망하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가 항복을 하더라도 모조리 죽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몽골군은 수도와 주요 성읍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대규모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사료에는 “백골이 들판을 덮고 수천 리에 인적이 끊겼다”고 전해진다. 서하는 이렇게 멸망하였다.



닝샤 회족 자치구의 서하 왕릉 유적



전근대 제국 질서에서 정치적 대립과 군사적 충돌은 곧바로 문화적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세력들 사이에서 제도와 시각 언어의 상호 수용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서하인들 역시 한족의 관식 건축 제도와 불교 미술,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계통의 장식 어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이를 자국의 정치적 정통성과 종교적 권위를 표현하는 시각 언어로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유림굴 벽화에는 송대 채화 문법과 공통의 기하 구조를 공유하면서도, 서하 특유의 장식 감각이 중첩된 금문 계열 문양이 부분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림굴의 벽화는 특정 왕조에 귀속된 단일한 미술이 아니라, 당·송에서 서하, 다시 원으로 이어지는 장기적인 시각 전통이 층층이 축적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서하와 송, 그리고 원의 관계 역시 단순한 모방이나 종속이 아니라, 실크로드와 중원 세계를 잇는 제국적 네트워크 속에서 형성된 시각 규범이 시대와 지배 집단을 넘어 순환·전승된 과정이었다. 정치적 주권은 끊임없이 교체되고 전쟁도 반복되었지만, 둔황 석굴에 남은 장식 문법은 장인 집단과 종교 네트워크를 통해 국경과 왕조를 넘어 이어졌다. 결국 유림굴에 중첩된 벽화가 보여주는 것은 제국의 흥망이 아니라 형식의 생멸격이다. 왕조는 사라지고 권력은 교체되었지만 패턴과 문법은 지층처럼 축적되어 유전자처럼 다음 시대로 전달된다.



참고문헌:

甘肃安西榆林窟西夏后期石窟装饰 及其与宋《营造法式》之关系初探

「감숙 안서 유림굴 서하 후기 석굴 장식과 송대 『영조법식』과의 관계에 대한 초보적 고찰

저자 :이로각 (칭화대학교 건축학원 건축역사 및 이론연구소, 베이징 100084)

https://k.sina.cn/article_6303322687_177b5123f00100hwuu.html

위린 제 3번 굴의 360도 파노라마

https://www.e-dunhuang.com/cave/10.0001/0001.0002.0003

둔황 천장화 고해상도 복원 이미지

https://mp.weixin.qq.com/s?__biz=MzI1NzkwNTg4Nw==&mid=2247500259&idx=2&sn=695e1c4ebb41456a55770358407f26f4&chksm=ea12c453dd654d45962baf41fa87e5e5e1aec4ddba4bfb911a08cd348bcc2812a58f6b58c863&scene=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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