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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낫현 Dec 10. 2020

이것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윌 듀런트,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책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걱정된다면 완독 후 글을 읽어주세요.


삶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담은 책이다. 소개에 앞서 이 책을 추천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의 작가는 퓰리처상 수상자 윌 듀런트이다. 미국의 철학자, 역사가, 작가이다. 윌 듀런트는 전 세계 유명인사 100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적힌 질문은 '왜 살아야 하는가'이다. 과학은 이상을 파괴했고, 인간의 지식은 세상을 낭만이 없는 곳으로 바꾸어놓았는데,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윌 듀런트가 편지를 쓰게 된 계기는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윌 듀런트에게 자신이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 물었다. 윌 듀런트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 남자를 설득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도 이 질문을 듣는다면,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상모적 관점

그래서 윌 듀런트는 전 세계 유명인사로부터 받은 답장을 이 책에 실었다. 다양한 시각이 있다. 답장에서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답장은 영국 작가 존 카우퍼 포위스의 답장이다. 자연과 개인의식의 조화를 강조했다. 슈펭글러의 '상모적 관점(physiognomy vision)'을 언급했는데 가장 와 닿았다. 모든 일반화와 설명을 조심스럽고 내밀하게 의심하는 한편 개별적인 자연현상 자체에는 어린아이처럼 신선한 감탄을 유지하는 관점이다. 전부터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딱 적절한 표현을 찾아서 기분이 좋았다. 쉽게 말해,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일하지 않는 인간

기계의 시대가 인류의 퇴락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육체노동도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아니라 후천적 습관일 뿐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p.171


종신형을 받은 수감자의 대답도 흥미롭다.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일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 수 있음을 몰랐다. 일은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일 없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됐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기계의 등장을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것. 노동 없는 인간을 뒷받침할 사회적 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소속된 인간

개체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 해도 총체는 우리의 존재와 기여로 영구적 변화를 겪는 것이지요. p.207


윌 듀런트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제시한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것과의 관계가 있을 때만 의미가 생긴다. 총체에 참여하라. 집단에서 어떤 자리를 가지고 그 집단에 기여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한 실체의 일부가 되어 물질적, 정신적으로 기여할 때 더욱 큰 존재감을 느낀다. 흥미로운 답이었다. 기시미 이치로의 책《미움받을 용기》에 등장하는 공헌감 -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생각이나 느낌. 아들러는 이를 행복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 개념이 떠올랐다.


옮긴이 신소희는 우려를 전했다. 이 책이 출간된 1920~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전체주의가 도래하기 직전인 시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불길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했다. 이 책에 나타나 있는 여성과 비서구인에 대한 미묘한 시혜적인 태도도 한계이자 문제점이다. 옮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당신이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나의 답은 무엇일까. 삶의 이유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을까. 윌 듀런트의 편지에 대한 나만의 답장을 적어봤다.


✉️ 헌낫현의 답장 (2020.10.23.)

저에게 삶의 이유란 새로운 경험입니다.


제가 가진 모든 영감과 활력은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공급됩니다. 기존에 적응한 환경에서 벗어납니다. 새로운 곳에서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합니다.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과 경험을 공유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인지하는 세계는 더 넓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넓어집니다. 그것이 제가 삶을 지속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과학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환경파괴로 인해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는 경고는 낯선 것이 아닙니다. 2019년에는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전염병이 등장하여 이를 실감하게 했습니다. 이 경험은 인간의 무한한 발전이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없이는 그 무엇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원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죄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탐욕이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요? 저는 인류 전체로 보았을 때 가능성은 새로운 데이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집단적으로 통합될 때 인류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왔습니다. 농업혁명이 그랬고, 산업혁명이 보여주었으며 한국에서 꽃 피운 민주주의가 그랬습니다. 이 생각은 저의 개인 수준에서도 동일합니다. 새로운 경험이 저에게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제게 위안과 행복은 그 과정에 있습니다. 노력하는 과정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 끝에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 저는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도달하고 싶다는 열정이 저를 어딘가로 이끕니다. 또한 이 경험은 또 다른 것으로 이어져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제가 지금껏 믿어온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니까요.


저의 궁극적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뤼크 베송 감독의《루시(2014)》를 보면, 약물로 인해 두뇌 기능이 극대화된 주인공이 마지막 삶의 선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삶의 목적을 묻는 루시의 질문에, 한 연구자는 "유전자의 목적을 생각해보라."라고 대답하죠. 루시는 그 말을 듣고 '저장장치(USB)'가 됩니다. 꽤나 황당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결말에서 저의 가치관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축적해 공유하는 것.

제가 인류라는 총체적인 개념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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