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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14. 2023

마흔이 넘었다면 몸, 챙겨

퇴사 후 몸이...

내 키는 179.8~180.1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180이라고 하면 뭔가 올리는 것 같고 179라고 하기엔 우수리를 과하게 떼는 듯 해 아깝다. 대한민국 남성 평균키가 173~4사이이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싶다가도 뭔가 살짝 아쉽다. 아예 1~2센티 더 크거나 작았으면 이런 고민도 없으련만...싶다. 몸무게는 성인이 된 이후 70을 넘겨본 적이 없다. 67~8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키에 비하면 저체중이다. 일생을 '살쪘다' '몸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까지 듣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은근 부아가 치미는 사람도 있겠지만, 살찌지 않는 고통 역시 만만찮다. 살찌고 싶어 음식을 꾸역꾸역 먹지만 도무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구겨 넣는 그 느낌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2~30대라면야 여전히 호리호리한 체격이 상대적으로 선호되겠지만, 마흔을 넘어 나이가 들수록 그래도 남자가 풍채는 있어야지. 이런 말들을 듣기 쉽지 않은가? MBC예능 [놀면 뭐하니]에 나오는 유재석의 군살 없는 몸을 두고 '남자가 저게 뭐냐? 멸치대가리도 아니고'라는 평들이 심심찮게 도는 걸 보면 사람의 미, 특히 건강한 몸에 대한 기준은 각자 다름이 있다.


사실 퇴사 이전, 그러니까 회사원 시절에는 몸상태가 아슬아슬했다. 체중이 급격히 늘거나 빠지진 않는 체질인지라 겉으로 보이는 몸상태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조직문화, 교육 업무를 한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두세 번의 술자리에, 마셨다 하면 최소 2차 기본인 데다 딱히 운동을 하지도 않았으니 속으로는 온갖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차츰 배는 나오고 팔다리는 가늘어지는 이른바 이티 체형으로의 변신은 덤.  


마흔을 넘긴 이후 거짓말처럼 건강검진에서 황색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까지 쌓여온 빚을 갚으라며 찾아오는 공포의 채무자처럼 건강의 계산서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종류도 가지가지. 어느 해는 공복혈당수치가 정상 범위를 살짝 초과한다거나, 어느 해는 간수치가 높다거나, 또 어느 해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거나 아무튼 노란 경고등이 4~5년째 계속됐다.


"이번에 간수치가 높고 혈압도 조금 높게 나왔는데 조심해야 되겠어요."

"야, 우리 나이에는 다 그런 거 하나씩은 끼고 사는 거야. 나도 고혈압, 고지혈은 디폴트 값으로 달고 산다고. 그래도 다 살아. 그게 정상이야."

선배, 동료들과 이런 종류의 대화를 주고받는 자리조차 술자리에서 소맥을 말아 부딪히던 와중이었다면 믿겠는가? 어떤 이는 눈이 어떤 이는 간이 어떤 이는 혈관이 문제라는데도 의연하다. 용감한 걸까? 무식한 걸까? 다들 그렇게 산다는 사실이 이미 진행되기 시작한 질병을 치료해 준다거나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 역시 그 무리에 섞이는 동안 체내 신호가 주는 경고를 사실상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흔 둘이 되던 해 여름,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최초의 공황발작을 경험했다. 운전 중 정신을 잃을 것 같으 증상이 반복되면서 난생 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마치 십수년간 농축되었던 모든 정신적 내상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휴화산의 분출마냥 터져 나왔다. 룸미러를 통해 함께 타고 있던 아이와 아내의 겁에 질린 얼굴을 얼핏 보고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갓길에 차를 대고 쉬어가기를 몇 번, 숨을 헐떡이며 인근 톨게이트로 빠져 응급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전주라는 낯선 고장 병원의 응급실 침대에 링거를 맞고 누워있는 나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와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대리 운전을 불러 서울로 돌아왔고, 그날 이후 공황발작은 시도때도 없이 1년간 이어지며 내 삶을 위축시켰다.


그 1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슨 통뼈 입네 하며 내 몸만은 괜찮다고 자신했던 헛된 믿음도 완전히 사라졌다. 나 역시 병이 생기는 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할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아니 오히려 예민한 성격 탓에 스트레스와 온갖 압력으로부터 취약한 하찮은 존재였음을 절감했던 그 해. 어쩌면 퇴사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퇴사 후 몸과 마음은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았다. 의도적이고 악착같은 노력 덕분이었다.


평일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기상한다. 간단한 맨손체조로 시작해 팔 굽혀 펴기 300회, 스쿼트 200회, 턱걸이 10회, 아령 150회를 주 4회 반복한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몸관리 한다면 몇 번 시도는 해봤지만 늘 실패했다. 아침에는 1분이라도 더 자기 바빴고 퇴근 후에는 소파에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으니까.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켜 습관으로 만들기에는 의지만으로 턱없었다.


퇴사 후 나를 짓눌렀던 핑계는 온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망가진 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킬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선 습관을 만들기 위한 간단한 원칙 부터 세웠다. 기상과 동시에 한다. 수요일, 주말은 쉰다. 월화, 목금 이렇게 네 번을 하는데 마치 주 2회만 하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3년 5개월간 습관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산책을 한다. 대략 1만 걸음 수준에서 약 1시간 정도를 걷는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회사원 시절 겪었던 불면증이라던가 몇 가지 증세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특히 공황증세는 확연히 좋아졌다. 이티형 몸매도 사라졌다. 돈들여 센터에 가서 PT를 받고 체계적으로 몸매를 가꾼 보디빌더에는 턱없지만, 체지방은 빠지고 근육량은 상당히 늘었다. 여전히 내 키와 몸무게는 179.8~180.1 언저리에 68키로를 유지한다.


몸이 회복되니 집중력도 덩달아 좋아졌다. 아침 맨손 운동을 끝내고 바로 자리에 앉아 그때부터 밤 12시까지 쭉 쓰고 읽는다. 점심, 저녁 시간 각 2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같은 스케쥴을 소화한다. 무려 3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루틴을 지키지 못한 적은 손에 꼽는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집근처에 있던 S대를 가고도 남았으리라. 


약 한 달 전쯤의 일이다. 점심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산책길에 나섰다. 5월의 볕 좋은 오후, 바람은 선선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중간지점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지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하더니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 익숙한 이 느낌. 약 5년 전 악몽 같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공황증세와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며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했던 그 해.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저 정신적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그런데 하필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사람의 영상 때문인은 몰라도 겁이 덜컥 났다. 그 증상이 아니라 심장 문제면 어쩌지? 그 사이 심장은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다는 강박, 호흡 곤란, 팔다리에 찌릿한 저림 증상. 기시감. 이 질병에 대해서는 잘 안다. 역류성 식도염과 동반되어 부풀어 오른 위상부 괄약근이 기도를 건드려 촉발되는 공황증세. 누군가는 병원에 가보라며 닦달을 할지 모른다. 병원이라면 5년 전 그날 수도 없이 다녀보지 않았던가? 심장부터 뇌를 모두 훑지 않았던가? 응급실을 밥 먹듯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그 노력들이 무용하게 몸에는 별다른 증상도 찾지 못했던 전형적인 공황증세.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겠구나 싶은 순간, 죽음이 현실의 감각으로 다가왔다. 결국 길가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찰나, 심장박동이 잦아들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약 30분을 쉬었을까? 팔다리의 힘이 모두 풀려 마치 팔십 세 노인이라도 된 듯 길가 벽의 구조물을 붙들고 겨우겨우 집에 돌아와 물을 마시고 안정을 취했다.


수년에 걸쳐 조금씩 쌓아온 성벽이 와그르 무너지듯, 갑작스럽게 재발한 공황발작. 원인이 뭘까? 이유부터 살핀다. 최근 글이 잘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던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도무지 늘지 않는 글 실력에 초조해졌다. 이미 출간된 전작들을 스스로 쓰레기라 폄하면서도 내심 내상을 입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고1에 올라간 아들 녀석에게 나타난 사춘기 조짐이 합쳐져 정신적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게으름이 도져 하루 이틀 정도 운동을 빼먹기도 했다. 그동안 참다가 괜찮겠지 싶어 최근 홀짝 거린 라떼 몇 잔과 소주, 맥주, 막걸리도 역류성 식도염 재발에 한몫 했을 것이다.


3년간의 노력으로 방심했던 탓일까?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의지를 다진다. 무엇보다 글이 내게 주는 의미와 그것을 쓰는 일상을 다시 정의한다. 알게 모르게 무게를 가진 짐처럼 마음속에 얹히기 시작했던 글쓰기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저 글쓰는 즐거움이 한없는 해방감을 주었던 그때로 돌아가야겠다.


아쉽지만 커피는 영영 놓아줘야겠다. 술은 되도록 줄인다. 아들 녀석의 인생은 자신의 몫으로 오롯이 인정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꿇어앉아 느슨해졌던 운동화 끈을 다시 풀러 단단히 조이듯, 마음을 다잡는다. 여전히 조금 전 발작의 여진이 남아 있지만 차츰 좋아질 것이다. 이미 지난 3년간 그 사실을 증명해냈지 않은가?


다행이지 뭔가? 인간은 과거를 잊고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라던데, 방심하려던 차에 강력한 어퍼컷 한방을 꽂아준 격이니 말이다. 코피를 질질 흘리며 다시 나를 돌아본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구나. 아니 많구나를 깨닫고는 각오를 다진다. 


부디

몸,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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