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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28. 2023

워킹좀비의 탄생. 우리는 왜 일하기 싫어졌을까?

Motivation _ Overall_ 워킹좀비 패러독스

광고공모전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건 2001년, 그러니까 대학교 4학년 때였다. 행정학을 전공했지만 고시공부 따위 하면서 청춘을 바칠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학점관리 하며 취업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막연히 졸업하면 뭘 하지? 그런 생각으로 대책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


"야, 이거 봐봐"

K가 강의실에 들어와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웬 잡지를 들이밀었다. 녀석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경제학과에 재학중이다.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가 졸업학기에 우연히 같은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가까워진 참이었다. 

"나 이거 도전해보고 싶은데... 같이 할래?

"뭔데?"

녀석이 내민 것은 XX애드라는 광고대행사에서 매년 개최하는 대학생 광고공모전 안내 지면이었다. 광고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지만 생소한 분야였다. 

"작년부터 참가하고 있는데, 올해 같이 하기로 한 동기가 안 한다지 뭐야. 어때? 관심 있냐?"

"광고공모전이라... 재미는 있겠네..."


사실 호기심반, 귀찮음 반이었다. 남들은 취업이다 뭐다 구체적인 삶의 계획을 현실화해 가는 마당에 생판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이라니. 어쨌든 졸업 후 딱히 이렇다 할 계획도 없었으므로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인쇄광고 하나, 라디오 광고 하나 이렇게 두 작품을 만들기로 했는데, 나는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메시지를 함축해 소구 하는 인쇄광고에 금세 큰 매력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그린다거나 스토리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가졌기도 했고, 전공 역시 국문학이나 신문방송을 막판까지 고려했을 정도였으면서 왜 졸업직전까지 그런 공모전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


그런데 웬걸 작업이 진행될수록 나는 점차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이까짓 거 그냥 하면 되지 뭐 어렵나?' 쉽게 봤던 것 같다. 대사를 쓰고 오디오 스크립트를 여러 장에 나눠 담는 스토리보드보다는 이미지 한컷으로 끝내는 방식이 훨씬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시의적절한 메시지, 그 메시지에 꼭 맞는 이미지와 레이아웃, 1차원적이 아닌 고차원의 창의성이라는 3박자가 마치 화학작용을 일으키듯 어우러질 때 비로소 탄생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진실을 깨닫고 내 능력의 부족을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했다. 한 달이 넘도록 끙끙대며 머리를 굴려도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자신감과 흥미를 동시에 잃어버렸다. 나는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게으름을 피우다 출품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끝내 포기 선언을 했다. 


"저기, 해보니까 이거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이쯤에서 난 그만하고 싶은데?"


한 줌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실력부족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녀석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묘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알아. 너 하는 거 보니까 언젠가 이런 말 하겠다 싶더라. 나야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는 거지만 적성에 안 맞는다면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냐? 너의 결정을 존중해. 그리고 그 결정과는 상관없이 나는 여기서 승부를 볼 작정이야. 언젠가는 멋진 카피라이터가 될 거고...그동안 고생했어"

말을 마친 녀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되돌아 나갔다. 


졸업 후 별다른 대책도 없이 2년 가까이 놀다가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미국계 반도체 회사에 가까스로 취업했다. 늙은 사회초년생의 직장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치이고 깨지고 어리바리 시행착오 속에 만 2년을 일했다. 이후 삼성동에 있는 대기업 계열의 종합건설회사로 이직해 본격적인 회사원의 정체성에 익숙해져가고 있던 어느 날, 코엑스에서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내게 다가와 알은척을 했다. 

"오랜만이다!"

나는 단숨에 그 정체를 알아챘다. 녀석이었다. 

"어? 너?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졸업하고 한 4년 됐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게 넌 변하게 없네? 이 근처 회사 다니나 봐?"

"응 H서비스 인사팀에 있다. 넌?"

녀석은 말없이 명함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건넸다. 

[TXXX 카피라이터 김 OO]

"카피라이터 되겠다더니, 진짜 됐네? 게다가 여기 세계적인 광고회사 아냐?"

"운이 좋았지 뭐."


녀석은 졸업 후에도 광고공모전에 계속 도전해 그 이듬해에 무려 XX애드 라디오 부문 금상을 받았다고 했다. 이후 수상자 특전으로 인턴으로 입사해 카피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TXXX로 이직했다고 했다. 


복귀할 시간이 임박해 짧은 해후를 마치고 다음을 기약하며 회사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기업에 취업해 인사 업무를 하고 있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난 4년의 시간, 그저 취업만 되면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이 새삼스러웠다. 늦은 신입으로 어리바리 좌충우돌하던 어설픔이 사라진 대신 익숙함을 가장한 매너리즘에 스며들려는 찰나의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어떤 상실감이 온몸으로 샅샅이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작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했다면 어땠을까? 졸업 후에도 이게 내 길이라며 끈질기고 처절하게 그 여정을 계속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까? 나 역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창작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녀석의 명함에 박힌 카피라이터라는 직명을 보는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됐다.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유... 하기 싫어" 

요즘 들어 유튜브 알고리즘이 주구장창 띄워주는 [무한상사] 영상, 박명수 차장의 육성과 함께 주변 동료들의 현웃이 터져 나온다. 워낙 [무한도전] 열성팬이었던지라 수도 없이 돌려보며 낄낄대던 장면이었지만, 어느 순간 이 장면에서 웃음이 나오지 않게 됐다. 웃고 즐기자는 토요예능에서 실제 우리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16년간의 직장생활을 돌아보건대 일 그 자체를 순수히 즐기던 사람이 있었던가?


 '일은 하기 싫은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밑바닥에 깔고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생각도 없이 주어진 일을 쳐내기에 급급하던 수많은 선배, 후배, 동료들의 얼굴이 박명수 차장의 얼굴위 로 스쳐 지나간다. '회사는 자아실현하는 데가 아니!' 라며 호통치던 S상무의 얼굴도 보인다. 그 얼굴들은 뜨거운 열에 녹아내리듯 차츰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좀비의 형태가 된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되 살아있어 보이지 않는 양면의 존재. 바로 '워킹좀비' 탄생의 순간이다. 그들이 떼를 지어 사무실에 우글거리는 모습이 그려지자 새삼 끔찍해졌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우리는 왜 일이 하기 싫어졌을까? 

이 질문은 "회사에 왜 다녀?"라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돈? 먹고살기 위해? 그래 경제적인 이유 중요하지. 그러면 돈만 많이 받으면 되는 걸까?


"회사 좋아서 다니냐?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치우려다가도 일 년에 두 번 나오는 스팀팩 때문에 겨우 버티는 거야."

무려 S텔레콤에 다니는 또 다른 대학동기는 술자리에서 늘 이런 불평을 달고 살았다. 그가 말하는 스팀팩이란 기본급의 수백 퍼센트에 달하는 인센티브를 뜻했다. 같은 그룹사 소속이지만 메이저 계열사의 처우는 그야말로 상상이상이란 사실을 알게 된 후 어쩔 수 없는 양가적 감정이 생겼다. 그 만한 돈을 받으면 충성하면서 다니겠네. 싶다가도 썩을 대로 썩은 녀석의 표정을 보면서 그래 돈이 다가 아니지 라는 자기 합리화까지. 


웬만한 중소기업 연봉만큼의 웃돈을 더 받고도 돈은 그저 버티게 해주는 요인이지 일을 신나게 해주는 요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지만, 은근한 부러움에 입맛이 다셔지는 건 또 다른 문제이므로...


돈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럼 뭘까? 나를 일하게 만드는 동력. 알아주는 대기업 로고가 박힌 명함과 사원증? 허먼밀러와 아이맥 혹은 맥북이 지급되고 바닥과 천장에선 음이온과 산소가 나오는 사무실 환경? 5성급 호텔 쉐프 출신이 삼시세끼 질 좋은 무료 식사를 대령하는 카페테리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런 외적 조건들이 좋아서 나쁠 건 없다. 다다익선, 거거익선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역시 나를 일하게 만드는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던 20대의 대책 없던 내가 시간을 거슬러 소환된 이유는 바로 그런 고민에서였다. 진부한 소설 파랑새 이야기처럼 답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뻔하고도 뻔한 이야기.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온전히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일.


나이 50을 앞두고 나는 지금 글쟁이가 되어 있다. 이십 대에 막연하게 가졌던 꿈, 창의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내 속 어딘가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다가 뒤늦게 발아해 아주 조그만 싹을 틔운 셈이다.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를 관통한 16년간의 회사원 시절을 돌고 돌아 기어코 뿌리내린 곳은 사람과 조직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글이라는 하드웨어에 담는 일이었다. 


그래서 즐겁냐고? 물론! 즐겁고 말고

비록 여전히 무명, 세미프로에 머물고 있는 데다 정기적인 수입도 끊겨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고 있지만 지금에야 즐거움을 넘어 살아있음을 느낀다면 그저 자기 합리화일까? 


분명한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날 삼성동 코엑스에서 카피라이더가 된 왕년의 동료에게 받은 빨간색 바탕의 명함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카피라이더'라는 단어가 심어준 강렬함이 십 수년간 나를 이끌어 '일은 내가 원하고 내가 재밌어야 한다'라는 막연한 믿음을 표면으로 끄집어내는 동력이 되었다는 데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어떻게 일할까?]의 저자 크리스채는 이렇게 말한다.

"메타에서는 강점을 단순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강점에 맞는 일은 오랜 시간 지속했을 때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energy draining 이 아니라 충전되어야 energizing 한다는 의미다."

 

[마음의 법칙]의 저자 폴커 키츠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내적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 우리의 자아를 온전히 발현해 주는 것. 반면 외적 동기, 자발적인 마음으로는 하지 않을 일을 하게 하는 것. 무언가 보상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기 위해 하는 것. 이 두 동기는 근본적으로 나란히 작용한다."


유명인들의 말을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워킹좀비가 된 이유는 분명 동기에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동기를 일으키는 외적조건이 형편없어서일 수도 있고, 일 그 자체가 재미없어서라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고. 그 답을 찾는 여정은 '나는 왜 일하고 있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즐거운가?'  '언제 가슴이 뜨거워지는가?' '뭘 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씨앗 하나쯤 품고 살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얄팍하고 건조하고 뻔한가? '먹고 살려고, 다들 그렇게 살아' 라는 뻔하고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세뇌에 순응해 살다보면 언젠가는 조우하게 된다. 마치 과음과 스트레스속에 꾸역꾸역 버티다 마침내 발병하는 지병처럼 왜 나로 살지 못했느냐는 자괴감의 외투를 무겁게 둘러쓴또 다른 나 자신과.


잠시 멈춰서서 눈을 감고 내 속에 숨은 씨앗을 더듬어 본다. 그 씨앗은 마음속 어디쯤에선가 말랑말랑한 내 손가락 끝에 걸리고 생각보다 따뜻하며 관심의 물만 준다면 언제든 싹을 틔우겠다는 의지를 가졌을 것이다. 


 '한 번쯤 일해보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네 가지 기본, MEET의 첫 번째 여정이 바로 Motivaiton 동기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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