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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레이터 Sep 21. 2022

마흔일곱, 여덟 번째 광고공모전에 나갔다

끌리는 일

10월의 이른 저녁, 저녁도 건너뛰고 근처 편의점을 찾았다. 에딩거 두 캔을 사서 파라솔이 펼쳐진 편의점 앞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치익~] 캔을 뜯어 알싸한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빛과 어둠으로 교차하는 노을로 물들어 눈에 들어왔다. 교복 차림으로 학원에 가는 모양인지 바삐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지친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터벅터벅 걷는 직장인들, 이 광경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두문불출 전화를 기다린 지 이주일 째. 발표 당일까지 끝내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탈락'이다.

안주도 없는 맥주의 맛은 썼다. 요 며칠 부풀었던 희망의 시간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상금 1000만 원도 그렇게 날아갔다. 상금을 받으면 생활비로 이렇게 저렇게 써야지 내심 그려봤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의미도 목적도 대상도 없는 무언의 끄덕거림은 초점 없는 시선과 함께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작년 9월 대한민국 공익광고공모전 인쇄부문 본심 리스트에 올랐을 때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대의 광고공모전에서 수천의 출품작 중 26개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매번 본심에도 들지 못하고 예선에서 미끄러졌으니 본심 통과작 명단에 당당히 포함된 내 작품을 보고 수상이라도 한 것 마냥 펄쩍펄쩍 뛰었다.


2021. 대한민국 공익광고제 일반부 본선 진출작


대학 졸업 무렵부터 참가했으니까, 얼추 20년 정도를 이어온 인연이다. 물론 매년 참가한 것은 아니고 한창 회사 업무가 바빴을 사원, 대리 무렵에는 참가할 엄두도 못 냈지만 징검다리 정도로는 했지 싶다. 횟수로는 7번째.


리쌍의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도 아니고. 이어질 가능성은 1도 없는데 질척거리는 외사랑인가 싶어 포기하려던 찰나 본심 상정이라는 뜻밖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것도 밀당이라면 참으로 애간장 다 녹이는 초고수 반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게 그동안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 한없이 원망스럽다가도 돌연 나를 향한 미소 한 방에 녹아내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붕 뜨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는 또다시 결정적 순간 내민 손을 거둬들임으로써 다시금 깊고 깊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지 뭔가.


[우그극]

마지막 남은 맥주를 몽땅 입에 털어 넣고 빈 캔을 우그러트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허탈감이 조금 가시자, 조금은 다른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야! 본심 진출이 어디야. 날고 기는 프로들이 전부 참여한 공모전이라고! 수상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이 결과가 아쉬우면 내년에 또 도전하면 되는 거라고!'


그동안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참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과정 자체를 즐겼다고 믿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포토샵을 배우고, 디자인을 공부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기발한 광고들을 다 보겠다는 일념으로 디자인 아카이브를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퇴근 후 시간을 쪼개 졸린 눈을 비비며 즐겁게 준비하고 열정을 다해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 에너지는 조직문화라는 본연의 일에도 이어져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야, 직접 해보겠다는 주체적 시도로 나름의 호평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6번째 도전에 광탈했을 때 '나는 이 일에 재능이 없는 것' 이라며 좌절했었다. 그에 비하면 본심진출 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 지난 노력이 헛된 수고가 아니었음은 분명해졌다. 


감정이 반전됐다. 알콜 기운도 때마침 어우러졌다.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던, 저 높은 가을 하늘 같던 이상이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로 좁혀졌다는 확신이 생겼다. 글쓰기와 더불어 내 생각과 관점의 지평을 보다 넓게 열어주었던 도전의 역사. 여기에서 멈추기엔 아깝다.


해가 바뀌고 또다시 한여름이 왔다. 공고가 뜨는 시기는 항상 이즈음이다. 틈틈이 주제를 생각하고 디자인 공부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본다. 보통은 끙끙거릴 뿐이다. 지독한 고통의 시간이 대부분이다. 왜 나는 창의적이지 못할까? 자책하고 재능을 한탄한다. 아이디어는 예고없이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서 불쑥 떠오른다. 이번 아이디어는 잠자기 직전, 머리를 식히러 나간 한강변에서 튀어나왔다.


그 다음은 디자인, 구현의 문제. 이걸 어떻게 포토샵으로 구현할까? 골몰한다. 디자이너들의 넘싸벽 퀄러티에 견줄수는 없다. 현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선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저장하시겠습니까?]

드디어 완성. 주말을 포함한 두주를 꼬박 작품 만드는데 올인했다. 제입으로 작품이라 칭하기 쑥스럽지만 그래도 어떤가 내겐 작품이다. 총 2종의 인쇄광고를 만들었다. 2022년 대한민국 공익광고공모전에 출정할 든든한 놈들이다. 시리즈 1 편과 단편 1편. 1인 3 작품까지 출품 가능하지만, 구상했던 또 하나의 아이디어는 영 구도가 나오지 않아 과감히 버린다.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아는 것도 용기다.


완성된 내 작품을 멀찍이 바라보며 문득 묻는다. 나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이 짓을 십수 년째 하고 있는 걸까?


답은 그 즉시 나왔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하고 싶으니까. 제대로 된 광고 한번 만들어보고 싶으니까. 마흔일곱, 여덟 번째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 자체를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 모처럼 설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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