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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May 07. 2024

퇴사 후 4년, 500권의 책을 읽었더니 생긴 일


기록을 보니 정확히는 523권이다


2020년 마흔다섯, 퇴사 후

읽은 책을 엑셀에 기록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뇌피셜로 지레짐작하기 싫어서다


직장인일 때 나는 책을 꽤 읽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무실 책상 위에 늘상 책이 10여 권 정도 꽂혀 있었고

틈틈이 책을 구매해 회사로 배송시켰고

점심 먹은 후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을 펼쳐놓았고

출퇴근 셔틀버스에서 손에 책을 들고 다니기도 했으니까


그걸 본 사람들은 저마다

"책 많이 읽으시네."

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사실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스스로 책 많이 읽는 직장인이라는

과장된 이미지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책을 펼치기만 했지

완독은 손에 꼽았다

월 1권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사 조직문화, 육성 책임자로서

조직심리, 행동경제학, 마음관리 등 관련 도서를 발췌해서 읽고

활용한 적은 꽤 있었지만

그것을 온전한 독서라고 볼 수 있었을까?

아아, 고의는 아니었지만

이런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무튼 퇴사 후 지금까지

약 4년간 읽은 책은 532권이었으니

연간 약 130여 권 꼴인데,

별다른 일정이 없는 백수치고 글쎄,

특별히 많다고 볼 수도 없고 뭔가 애매하다


퇴사 후 약 1년 정도는 이런저런 방황과 마음다짐으로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이었으니,

3년간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겠다


첫 책장을 열어 마지막장을 덮은

완독만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더 많은 책을 손댔을 수는 있다


사실 책 읽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퇴직 후 남아도는 시간을 채우는

가장 손쉽고 가치 있는 일이

독서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자연히 읽고 쓰는 일로 하루 전체를 보내면서

나 자신이 생각보다 책을 못 읽는 사람이란

사실도 알게됐

책을 펼쳐 10페이지 정도 읽으면

금세 졸음이 쏟아지거나

어느새 스마트폰을 들어

딴짓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기를 수십 차례


본격적으로 책의 재미에 빠져든 건

아마도 퇴사 후 2년 후부터였을 것이다


흥미가 생기자 속도도 붙었다

많이 읽는 달은 스무 권 남짓도 우스웠다

처음엔 주로 유튜버들이 추천하는 자기 계발서 위주였다.


드라이브, 타이탄의 도구들, 1만 시간의 법칙, 원씽 따위

베스트셀러들을 좌다 탐독하면서

'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퇴사를 선택한 내 결정이 옳았구나'

라는 자기 위안성 변명도 굳힐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마음먹고 각오를 다잡는 일만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에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들

누가 그걸 알아주지는 않더란 말


나를 증명해야 했다


그 이후의 독서는

내 전공 분야(조직문화, 동기부여)에 집중키로 하고

전문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심리, 조직역학, 동기부여, 리더십 분야 책들을

집중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읽고 마는 것이 아닌

기록으로 남기는 독서를 시작했다

책 전체의 약 1/3~1/5분량으로 정리가 됐는데

그 파일이 300여 개에 이른다

A4지 약 6000페이지. 단행본 60권 분량이다


끈기 없고 뭐 하나를 마무리 못하던

용두사미 전문가였던 이전의 나에 비하면

유의미한 나름의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전문성이 생겼느냐?

이 역시 글쎄다


그 기간 동안 운 좋게 두 권의 관련 분야 책도 내고

기업 강연, 워크숍도 진행하는 행운도 누렸지만

책은 베스트셀러는커녕 초판 1 쇄도 다 팔리지 않은 데다

돈 받는 강연은 작년을 기점으로 뚝 끊겨 손가락만 빨고 있는 처지이니 잘 쳐줘 맛만 본격이다


세상은 노력의 양만으로는

호락호락 프로의 문턱을 허락하지는 않더라는

뼈아픈 진리 역시 새삼 절감한다


그 이후 독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로 향한다

소설, 에세이 까지

그중에서도 고전의 묘미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달과 6펜스>는 고전에 대한 내 의심을 완전히 뒤바꾸기에 충분한 문제작이었다


그림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금융중개인이라는 안정적 직업과 가족마저 포기하고

외국을 떠돌면서 갖은 패륜과 이기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지만 

예술혼을 불사르는 찰스 스트릭랜드 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분노와

저렇게까지 해야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라는 자아실현의 갈구

사이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모델은

그 유명한 고갱이다


나 역시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내 꿈만을 위해 미친 삶을 살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자아와 꿈을 극한으로 추구하되

그 과정에서 누구도 마음 다치는 일이 없도록...


독서는 퇴사 후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긴 내게

친구이자 선생이자 새로운 세계였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부족하고 안일한 상태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해 준 반면교사기도 했다


솔직히

500여 권의 책을 읽은 지금

그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이

나를 전면적으로 바꿨다고 볼 수는 없다


책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레 진짜 세계와는 멀어졌을 수도 있고

누군가 듣기에 현실과는 현저히 동떨어지는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광고쟁이 박웅현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은 몸으로 읽어야 한다"


자신의 책에서

'새벽 수영'을 삶의 기적이라고 예찬했으면서

어느 날은 새벽에 일어나는 일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뭐 그런 이야기


결국 수천권의 책을 읽었어도 

정작 깨달은바를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라는 메시지는 

나 스스로의 독서 루틴, 나아가 앞으로 내가 추구할

자아와 꿈의 모습까지도 되돌아보게 했다


나는

읽은 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배운 것을 실제 활용해 조금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저 읽는 재미에만 빠져 성장하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기 합리화에 빠진 것일테다


독서 500권은 계단과도 같다

비록 그 계단위에 올라 기대했던 무언가를 손에 쥘 수는 없더라도

다음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것으로 됐다


이제 1000권으로 향하는 길 앞에 서있다

언제쯤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길 위에서 명백히 읽은 것을 현실 속에 증명함으로써,

껍데기를 벗고 탈피한 또 다른 나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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