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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여행자 Nov 09. 2016

당신은 사실 '자율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자유'는 똑같이 주어지지만, '자율'은 획득하는 자만의 것이다.

나는 '자율'적인 사람인가? 


인간은 대체로 스스로를 자율적인 존재라 자신한다. 누구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과연 나는 이대로 '자율'적인 존재인가. 천만에다.


'자유'와 '자율'은 다르다.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자율'은 개인이 피나는 노력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자율을 '자신이 책임질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사결정권'이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만큼 무거운 '책임'이 또 없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혹은 '꿈'이든.


대체 '자율'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통제와 규율 안에서 더 편안하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적당한 통제와 규율 속에서 평준화된 성과를 낸다. 인간은 제도화된 규율과 훈육으로써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현시키고  있다. 미셀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제도로서의 규율의 효용을 다음과 같이 암시했다.

규율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사실상 사취나 강제 징수 대신 "훈육시키는 일"을 주기능으로 삼는다. 이때 권력은 사람들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묶어두기는커녕, 그 힘들을 전체적으로 증가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통제'의 개념은 넓다. 인간의 심리적 기제, 특히, '소속감', '유착관계' 등의 개념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인간 욕망의 기원을 엄마와 아이의 유착관계에 있다고 본다. 탄생은 그 자체로 '물리적인 유기' 과정이다. 이때 엄마와 한 몸이었던 아이는 대체제를 찾아 나서는데 바로 이것이 '타자의 욕망'이다. 사회적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하나 둘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완성해 간다. 이러한 관점은 장 폴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의식은 텅 비어 있다. 의식은 오직 자신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는 과정에서 외부에 있는 사물존재를 빌려와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해 나가는 그런 존재이다. 즉, 의식은 무언가에 관한 의식이다.


타자의 욕망이, 쉽게 말해 '인정욕구'가 나를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일 수 없는 존재인듯 하다. 사회적 인간으로 존재하는 순간 이미 심리적 기제로든 사회적 규범으로든 통제의 틀 안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간은 통제가 없을 때 본성이 드러난다

원형감옥 파놉티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통제가 만연한 곳이다. 제레미 밴담에 의해 제안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은 시선의 비대칭성(오직 간수만 죄수들을 볼 수 있다)을 통해 죄수들로 하여금 감시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미셀 푸코에 의해 이 개념은 사회 전반적인 부분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파놉티콘 사회는 권력, 기계 장치, 기술 등에 의해 통제와 규율이 내재화되어 있는 사회이다. 숱한 피의 역사를 거쳐오며 자유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온전한 자율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타자의 시선, 상호의 감시가 개인에게 강력한 통제의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 중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상호 감시 기제가 허물어졌을 때의 비극을 보여준다. 모두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타인이 나를 볼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이 드러난다. 영화 속 이야기지만 인간의 행동이 외적 동기에 의존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자율성의 핵심은 외적 동기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발화된 동기와 그것을 향해 추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율성은 통제와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에서 발견된다. 통제가 온전히 사라진 자유 속에서 인간은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Self-motivated person

미국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 job description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self-motivated person 이다. 말 그대로 누가 시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서 실행하는 사람이다.  의역하자면 '주체적인 사람' 혹은 '자율적인 사람' 정도 되겠다.


이들은 조건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에 맞춰 상황과 환경을 극복해 나간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 그리고 핑계와 변명으로 자기 보호를 하는 사람.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은 바로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비근한 오해 중 하나는 규범에 저항하고 간섭에 반목하는 태도가 자율적이고 혁신가 적인 성정의 발로라는 해석이다. 사실 '혁신가'와 '투덜이'는 동전의 양면에 자리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감수성과 인식 능력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다르다. 혁신가는 문제를 해결할 때의 근시안적 이해득실보다는 공동의 이익, 장기적 관점의 이익과 가치 실현에 더욱 무게를 둔다.



성공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중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든 기업들이 '자기계발'이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노력을 착복해왔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자기계발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시대정신은 개인의 안위와 사회구조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노오력'이나 '열정'이란 키워드가 빛 바랜지 오래다.  


여기서 '노력' vs '노오력', 그리고 '열정' vs'착취' 구도 역시 동전의 양면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그 경계에 '개인의 노력'이 있고, 서로 다른 양면에 다음 두 가지 관점이 각각 놓여 있다. '노력이 개인의 주체적 선택이고 개인의 실익으로 환원되는가', '노력이 시스템의 암묵적 강요이고 다른이의 이익으로 착복되는가'. 결국 '노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메세지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노력'이란 단어 그 자체의 성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가 다가온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열정'은 인류의 문명사를 이끌어온 숭고한 가치이다. 이것이 현세에 '착취 프레임'에 빠져있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개인의 정신이 그만큼 진보하고 깨어났다는 반증이다. 이는 긍정적인 신호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문제'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 정치와 제도의 부패로 인한 부의 재분배 문제, 그리고 전근대적 집단주의 문화의 폐단 등으로 나열할 수 있겠다. 결국, 개인의 노력이 개인의 결과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학습했다.


반면, 이런 시류가 과도하게 이어지는데 따른 부작용이 우려된다. 조직과 팀을 꾸려서 공동의 에너지를 집약해야 할 활동들이 세상에는 상존한다. 그런 모든 활동에 이와 같은 프레임을 덧 씌운다면 어떻게 될까. 자칫 피해의식과 회의주의가 만연하지 않을까. 이것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 세상은 집단적 무력감에 빠질 것이다. 이는 니체가 말한 시대의 질병이고 공멸에 이르는 길이다.


내 '노력'이 누군가에게 착취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위에 부유하는 청춘이 되지 말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과 동떨어져 안분지족하며 사는 게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면, 사회 구조와 싸우면서도 개인의 노력을 숭고하게 지켜내야 한다. 그런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조직에서의 자율성


'회사' 혹은 '조직 생활'의 관점으로 이 논지를 가져오면 쟁점은 더욱 첨예해진다. 왜냐하면 '자율성'은 근로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언어, 혹은 나아가 조직의 언어가 되는 순간  '노오력' 이란 단어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돌아보면 자신의 업무 숙련도와 자기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진리는 이것이다. 원하는 만큼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어떤  조직에서든 더 빨리 숙련되고 더 많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지식 근로자는 상당한 양의 연속된 시간을 사용해야 성과가 나온다고 역설했다. 연속된 시간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긴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참고:https://brunch.co.kr/@brunchflgu/98


무엇보다 '자발적' 선택이 중요하다. 주말 밤낮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가 만약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회사 문화에 의한 암묵적 강에서 비롯된다면 이를 거부할 것을 권한다. 그 조직을 떠날 것을 각오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하다. 조직을 떠나는 선택은 누구나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우선 반강제로 할당된 업무 시간이라 해도 그 시간이 나에게 의미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결국 나를 위해서 하는 거라는 생각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적으로 업무의 숙련도와 성장은 따라올 것이다.


물리적으로 어떤 틀 안에 있더라도 자기결정권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고수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면의 동기를 발화하여 이를 구체적인 목표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것을 공동의 목표에 얼라인 시키면 된다. 조직과 타협할 수 있는 지혜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자발적 선택을 통해서 시간의 절대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럭 저럭 훌륭한 근로자 혹은 그저 그런 월급쟁이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도대체 일을 많이 하는 게 왜 중요한가. 개인의 여가와 삶에 무게를 두면 안되는가. 성장보다는 행복이 중요한 시대 아닌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한 가지 관점은 이런 의제들은 다소 국가와 사회의 관점에서 신경써야 할 테제라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삶과 복지 증진, 사회 안정망 구축을 통해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국가가 그렇지 못하다면 거리로 나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을 인정하자. 우리가 발을 딯고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땅 위에서, 특히 경쟁의 체제를 안고 가는 '기업'의 속성을 전도할 수 없으니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자율'은 우리가 책임질 것을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기회비용은 있다. 도전, 혁신, 극복, 숙련, 성장과 같은 키워드에 집중하여 탁월함으로 거듭날 것인가. 여가, 안위, 유지, 행복, 느림 이란 키워드에 집중하여 사회적 가치 실현에 방향성을 맞출 것인가.



스타트업, 자발적 워커홀릭의 세상


'자율성'을 발휘해야 하는 정점에 '스타트업'의 세계가 있다. 바로 초기 창업기업이다. 국내 스타트업계의 명사들 중 한 분인 '장병규' 본엔젤스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 (참고로 스타트업계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일중독자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일주일에 50~6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과
일주일에 90~10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을 비교해볼까요?
얼마나 성과차이가 날까요?
얼핏 생각하면 1.5~2배 가량 차이가 나죠.
하지만 제 경험에 따르면 최소 5배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일은 하면 할 수록 숙련도가 높아지고 숙련도가 높아지면 일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는 뜻이다. 숙련도가 높을 수록 단위 시간에 해내는 일은 양이 많아진다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높은 성취도를 만드는 것은 스타트업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실제로 창업 기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절대 업무량을 자랑한다. 도대체 창업기업은 왜 이렇게 일이 많은가. 누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하라고 하던가. 이를 놓고 실리콘밸리의 대부인 폴 그레엄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스타트업이 결코 일을 많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40년간 해야 할 일을 4년 동안 하기 때문에
일이 많아 보이는 것뿐이죠.


일반적인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은 '만들어진 시스템'의 루틴 안에 들어가는 행위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전체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창업'은 그 자체로 세상에 없던 새로운 '업'을 창조해가는 과정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근로자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업이다. 또한 '창업'은 극히 제한된 자원을 바탕으로 빠른 시간 안에 비즈니스 모델을 발견하고 수익화 해야 한다. 자신의 업을 만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스타트업은 '자율적'인 워커홀릭들이 모여 365일 24시간을 일해도 부족한, '업'이 곧 '삶'인 시간들을 보내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율'적으로 선택한 삶이라는 거다.



자아실현은 오직 '자율'적 성공을 통해 가능하다


영화 <아이언 맨>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엘런 머스크'는 세 개의 기업을 동시에 운영하는 CEO이다. 그중에서 두 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업이다. 전기자동차를 만드는 테슬라, 그리고 우주 정복을 꿈꾸는 SpaceX다. 하나의 기업을 유지하기도 힘든데 동시에 세 개라니.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는 타고난 천재일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재미있는 담화가 있다. 누군가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엘런 머스크처럼 성공할 수 있어요?' 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그(엘런 머스크)의 부인이 답한 내용이다.

집착하세요.
집착하세요.
집착하세요.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약간 미쳤다고 느낄 겁니다. 집착하고 있지 않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당신이 달려들어 한참을 달라붙어 있을 수 있는 일을 찾으세요. ... 일 자체에 사로잡혀있지 않다면 중간에 방전되거나, 지쳐 떨어지거나, 아니면 더 굉장한 경쟁자가 나타나 당신을 짓밟고 지나가 결국에 울고 말게 될 겁니다.

참고: http://newspeppermint.com/2015/04/21/extreme-success/


위대한 목표를 스스로 세우고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결론, 어쩌면 교과서적인 답이다. 엘런 머스크는 어려서부터 '자율'적으로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했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아마도 그는 '자율성'에서 비롯된 성공이 주는 궁극의 희열을 체득했을 것이다.


엘런 머스크가 재능이 뛰어나거나, 천재로 태어난 게 아니다. 집안과 배경이 유달리 좋았던 것도 아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환경적 혜택만 고려해도 우리와 출발점이 다르고 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공, 운에  의한 일회적인 성공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요소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 혹은 자아실현으로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안데르스 에릭슨은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타고난 재능은 위대한 성공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위대한 성공은 말 그대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의식적인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해야하는데 이는 재능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세상에 한 발 내딯는 '자아실현'은 환경적 유리와 조건들 따위로 이루지 못하는 성취다.

 


인간은 누구나 편안함을 추구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안위와 평온함을 추구한다. 저 멀리 있는 성공과 목표 달성을 위해 리스크를 감당하고 힘겹게 달려가는 것보다는 지금의 행복과 안위에 더 이끌리게 된다. 이는 인간 욕구의 베이스 라인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자연스러운 기제이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이유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늘 자신과의 싸움에서 악전고투한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가 자아를 뚫고 나오는 순간이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는 순간, 그래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부터는 하는 모든 일은 오직 나의 일이고, 쏟아내는 모든 노력은 오직 나를 위한 노력이 된다는 것을 직감한다. 다섯 번째 단계(매슬로우의 다섯 번째 욕구)를 향해 올라가는 힘은 누구나 갖고 태어난다.



진짜 '나'로 사는 삶은 고난의 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면, 순간순간 내가 내 삶을 선택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이 말을 한번쯤 귀담아 들었으면 한다.

통제가 없는 곳, 규율이 없는 곳을 찾아가라.
그곳에서 내면의 동기를 발견하라.
그리고 실행하라. 끊임없이.


그것이 진정한 '나'로 사는 삶이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 오직 내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자율'로 세상을 살아가라.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내 안의 목소리를 발견하라. 그 목소리는 숱한 싸움을 부추길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은 오직 자신과 동행하며 싸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 싸움이 고통스럽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주체적인 삶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고, 행복의 기준이 있다. 자기와의 싸움을 즐기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만들어진 틀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한 삶을 희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삶이 옳은가. 정답은 없다.


그런데 세상이 악하다.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프레임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그 위세를 전복하기에는 질서의 엔트로피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새로운 업을 창조하고, 나아가 새로운 규칙과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할 것이다. 숨겨진 문제는 이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지배하는 룰을 만들고,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타인들을 통제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다소 비약적으로 맺음을 하는 것 같지만, '자율성'이라는 아주 작은 삶의 태도는 종국의 삶에 비약적인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세계관을 바꾸는 일이다. 바꾸기로 결정 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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