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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Feb 29. 2024

10분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뀌는 기이한 현실

두 가지 현실


현실에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실과, 사람들이 인식하고 이해하여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현실이 있습니다. 후자의 현실은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지인이나 친구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하면서 "그게 현실이야!"라고 말할 때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전자의 현실, 물질적 실체로서의 현실 속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일상생활, 우리가 보통 "삶"이라고 부르는 차원에서는 후자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차원은 중첩돼 있고, 이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숙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엄밀히 구분하여 사고되지는 않습니다. 또, 서로 긴밀히 얽혀 있어서, 둘을 완전히 분리해서 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구분은 가능하며, 본문에서는 후자의 현실을 정신적 현실이라고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용품 속 농담이 드러내는 정신적 현실


"10분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 남편 직업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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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용품의 이 문구들은 물론 모두 재미있는 농담으로서 들어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소비자들은 그저 재미있는 공책이구나, 했을 겁니다 (예시). 맨 마지막 공책도 “10분만…” 공책과 같은 제조사에서 만든 것인데요, 거기에 들어간 문구는 틀림없이 농담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죠. 제조사는 확실히 그냥 웃기고 재밌는 공책을 만들어서 많이 팔아보겠다는 생각이었을 뿐이었을 겁니다.


공부는 실수를 낳고 찍기는 기적을 낳는다는 농담은 무해한 농담이라 괜찮았지만, 다른 농담들은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이 학용품들을 비판하는 기사나 글들을 인터넷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외모와 학벌을 통한 서열화, 외모지상주의와 학벌지상주의를 강화한다, 공장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버젓이 드러나 있다, 그런 비판들이지요. 물론 틀린 비판은 아니지만, 사실 저 농담들은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은 정신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농담들로 인해 삶이 외모와 성적에 달렸다는 식의 정신적 현실이 강화된다기보다는 (약간은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미 그것이 확고한 정신적 현실이 되어버린 사정이 먼저 있고, 농담은 그 바탕 속에서 결과로써 등장할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정신적 현실은 과연 어떤 현실일까요? 대학-미팅과 공장-미씽으로, 서울대 학생과 서울역 노숙자로 양분된 삶, 잘 사는 좋은 삶과 못 사는 나쁜 삶, 사실상 죽음을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삶 아닌 삶이 있고, 전자를 얻으려면 “공부”하거나 "얼굴"이 예뻐야 하는 그런 현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이 사막 같은 현실 외에 어떤 현실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난 30년간 청소년을 대해 온 태도는 아주 명확하고 단순했습니다: 공부해라. 공부만 해라. 다른 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말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왜요?"입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대답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망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게 지금 80년대 이후 생 한국인이 살아온 (그전에도 그랬을 수 있겠지만, 제가 잘 모릅니다) 현실, 극도로 빈곤한 정신적 현실입니다. 가히 정신의 사막이라 할 만합니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면서 추구할만한 것이 무엇인지, 이런 문제에 대한 담론들이 말라비틀어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사회에서 사실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 텅 빈 구호에 불과한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따위를 좇아 꾸역꾸역 공부하며 산 것이 지금 젊은 성년기에 있는 한국인들입니다. 잘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아무것도 제시할 게 없는 텅 빈 공간에 남은 것은 돈뿐이었습니다. 돈 많은 걸 두고 "잘 산다"라고 합니다.


한 가지를 더 꼽아 보자면 막연한 "남보다 낫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발급받아보는 공적 문서가 바로 성적표일 텐데, 거기엔 "123/350" 같은 식으로 전교생 몇 명 중에 내가 몇 등인지 적혀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그리고 집에서까지, 성장기 내내 등수 올리라고 닦달당합니다. 저 공식 등수표가 모의고사 제외해도 일 년에 최소 네 번씩 나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가능한 생각들이 모조리 배제된 상태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통한 맹목적인 경쟁만을 강요받고 자랐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이런저런 문화 자료들을 조금씩은 접하겠지만, 책 읽는 것 마저도 논술시험 잘 봐서 서열 높은 대학교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되고, 노는 것도 더 공부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푸는 목적으로만 허용됩니다.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적 이해 내용은 공부와 경쟁이 전부입니다. 공부와 경쟁의 정점이라 할만한 수능날 아침 온 나라가 올스탑하는 모습은 그 증거이고요.


아이들이 경험한 현실은 학교, 학원, 집, 친척,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성적으로 결정되는 현실입니다. 등수가 올라가면 칭찬받고 떨어지면 벌을 받습니다. 등수가 높으면 사랑받고, 낮으면 냉대받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 삶의 가치 같은 것이 들어있어야 할 정신적 현실은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경쟁해야 하는 그런 현실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시되었고, 아이들이 습득한 정신적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발견하는 자신의 존재의의는 공부경쟁에서의 승리뿐입니다.


생존경쟁의 사막이라는 현실에서 탄생한 지금의 현실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으면 칭찬과 보상을 (아마 주로 용돈의 형태로), 성적이 나쁘면 벌을 받는 현실이 지금 젊은 세대의 정신적 현실입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땄으니까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지, 나는 성적이 나빴으니까 벌을 받아도 감내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불합리한 일을 겪어도 "그럼 네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그런 일 안 생기는 좋은 직장에 취직했어야지"라는 소리에 눌립니다.


존재의 긍정을 오직 공부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만, 남보다 높은 등수를 통해서만 받아왔던 탓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론적 불안을 달래려 하게 됩니다. 어른에게는 전교 등수 대신 금액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경쟁지표로 기능합니다. "남들 다" 300만 원어치는 한다고 하면 나도 300만 원어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남들 다"에서 가리키는 "남들"은 물론 불특정 한 사람들입니다. 123/350라고 찍힌 내 성적표에서 내 앞의 122명도 내 뒤의 227명도 모두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인 다수의 "남들"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123등이라는 내 위치를, 내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내 미래의 아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적과 마찬가지로 외모도 서열화할 수 있고, 이 서열이 높으면 좋은 것입니다. 1등녀, 2등녀, 3등녀… 123등녀일 수도 있었는데 10분 더 공부해서 122등녀 얻으면 그게 좋은 것입니다. 123등녀가 누구인지, 122등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공해서 성공하면 저 남자가 내 남자다."  여기서 만남과 교류는 완전히 지워져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인연이란 엄마가 등수 몇 등 올리면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값비싼 물건과 마찬가지로 성공하면 따내는 상품일 뿐입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3포 세대라느니 5포 세대라느니 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3포란 연애, 결혼, 자녀 포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젊은 층의 미혼인구 비중이 커지고, 연애 중인 사람의 수도 굉장히 적어졌다는 통계가 잡히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 사막 같은 정신적 현실과 유관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그 자체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경험을 적게 하고, 공부 경쟁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어야만 조건부 사랑을 받는 경험을 계속해온 결과로, 높은 학벌이나 많은 돈이나 출중한 외모를 갖추어야만 당당하게 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고, 그것을 갖추기 위해 안달복달 애쓰다가, 못 갖췄다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다가 지쳐서 포기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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