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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Oct 14. 2024

윤리를 대체한 미학

홍대선 '유신 그리고 유신' 독후감 

내가 일본 정신에 대해서 예전부터 갖고있던 기본적인 생각은 정신분석학의 사투리를 빌어 말하자면 '팔루스 없음'이다. 정확히 언제 어떤 경로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이것저것 일본의 문학작품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보면서 형성된 생각이다. 박경리 선생과 도올 선생의 대담에 나오는 이야기도 내가 내 생각에 좀더 확신을 품게 해 주는 지지대가 되었다. 홍대선 작가의 이 책에도 일본 정신의 그런 단면을 지적하는 듯한 부분들이 여럿 있다. 그는 요컨대 오늘날 소위 유신지사라 불리는 종류의 사람들이 난무하던 시절을 풍미하던 사고방식은 윤리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이라고, 혹은 윤리가 미학화된 모습이라고 말한다. 


윤리적인 사고 체계에서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가 논해지며,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놓고 싸우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옳음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가치-옳음을 따르는 사람과 충돌할 수 있되, 이 경우 상대는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한 번 상상해 보자. 부모를 공경하며 마땅히 따르고 죽어서도 정성껏 모셔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부모는 경우에 따라 해칠 수도 있고 죽은 부모의 시신을 어떻게 하든 전혀 신경쓸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람 취급'할까. 혹은 어린이를 성적으로 착취해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 소아성애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가? 못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사투리로 말하자면 팔루스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어떤 구체적인 윤리나 도덕규범, 달리 말해 초자아적인 규범,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한, '유신 그리고 유신'에서 나오는 윤리가 미학화된 경우란, 옳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멋진 것,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그런 미적인 대상으로서 추구되는 상태다. 옳음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옳음을 추구하는 모습,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좇는다. 정신분석학의 사투리를 빌어 말하자면 이것은 팔루스가 없는 사람이 팔루스 달린 모습을 멋있다고 여겨서 그 흉내를 내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사실 팔루스가 없는 것이다. 


팔루스 달린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행동은 대체로 윤리 강령을, 아버지의 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대개의 경우 모종의 헐거움 같은 것이 있다. 도덕규범을 아주 철저하게, 빡빡하게 따르는 것은 아니고, 따르는 것 같지만 은근슬쩍 다른 요소가 끼어들어 있거나, 어느정도 유도리 같은게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뜻이다. 역사적 디테일에 대해 사실 잘 모르지만, 예송논쟁을 한 번 대충 예시로 끌어 써 보자면, 그것은 표면적으로 장례 절차를 두고 옥신각신 했던 일이지만, 그 배후에는 정치적 계산들이 돌아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우리에겐 아주 당연하다. 철저하게 상복을 3년 입을지 5년 입을지에 골몰해 입장을 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구 편에 서는 게 나한테 정치역학상, 돈벌이 상 이득이 될지 생각하여 움직이는 차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정신분석학의 사투리로 말하자면, 사실 '아버지는 이미 죽어있다'. 장례 절차라는 규범은 사실 허울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들 그것을 놓고 옥신각신한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팔루스 달린 사람들의 작동방식이다. 


하지만 팔루스 없이 팔루스 달린 모습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그런 '헐거움'에 대해, 사람들이 (남자아이의 시선에 보이는 아버지, 삼촌들, 아저씨들) 죽은 아버지의 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사실은 그 죽은 것, 또는 죽음과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라는 (자기 잇속을 챙기는 등) 사실을 모른다. 팔루스 달린 이들을 부러워하는 팔루스 없는 사람은 그런 속사정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저 팔루스 달린 사람들을 흉내내려고 할 뿐이다. 마치 어린 소년들이 어른 남자들을 흉내내고, 더 잘 흉내내는 아이가 부러움을 사듯이 말이다. 


유신지사들은 무언가를 따르고 (보통은 천황이라는, 아버지를 실체화한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경유해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멋진 걸로 쳐 주고 경탄한다. 그리고 지사가 뭔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여 정말로 죽어버릴 때, 그 경탄은 최고조에 이르는 것이다.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내게 이런 사고방식을 체현한 인간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로 기억돼 있다. 근육을 키우고 맨몸으로 일본도를 든 채 찍은 사진들. 팔루스 달린 인간의 이미지에 맞게 꾸민 자신을 보며 흡족해 하는 그의 시선이 역력히 느껴진다. 그는 유신지사들이 하던 것과 비슷하게 과격한 행동을 하고 끝내 자결한다. 


홍대선 작가의 '유신 그리고 유신'에는 상술한 이론적 추정(?)에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이 다수 등장한다.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돌입하고, 그러다 죽고. 이런 것들이 바로 윤리를 대체한 미학, 유신 미학의 완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와 김재규의 일대기에서 이런 유신 사고방식의 영향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준다.


박정희와 김재규가 최종적으로 죽음에 치달음으로써 유신의 미에 마침표를 찍고, 이후 한국의 사정은 팔루스가 없어 팔루스를 동경하는 미학으로 채워져버린 일본 정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시 조선 사람들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전두환은 죽지 않았다. 그 본인도 죽을 생각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고, 그 이후의 사람들도 그를 굳이 죽이지는 않았다. 박경리 선생이 본문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도올과의 대담에서 말한 바가 다시 생각나는 역사의 한 대목이다. 박경리 선생은 말했다. 일본인들은 매양 죽는다고. 하지만 조선인들은 삶으로 향한다. 


입증할 도리는 없는 제멋대로의 생각이 좀 더 뻗어나가긴 하지만 여기부터는 책 '유신 그리고 유신'과는 거의 아예 관련이 없을 터라 이만 줄인다. 


                              

유신이 종교라면 그 안에서 죽음은 순교가 된다. 밥벌이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칼과 총을 쥔 채 스러져간 수많은 지사들, (…) 자신의 가치를 위해 기꺼이 죽는 한 그것이 어떤 가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치를 위해 죽는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윤리적 세계관에서 ‘나‘는 올바름을 위해서 싸운다. 이때 ‘나‘의 적은 올바를 수 없다. 그는 악이다. 만약 적을 인정하면 나는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투쟁을 그만두던가,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미학적 세계관엥서 ‘나‘의 올바름은 상대적이다. 나는 나의 올바름을, 적은 그의 올바름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 이런 죽음은 탐미적이다.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름다우면 된다. 마초적이고 생사에 초탈하면 인정해 마땅하며 감동하게 된다. - P80



유신의 관념은 윤리를 초월한다. 혹은 윤리에 미치지 못한다. 방금의 두 문장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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