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이 깃든 허방
시간 단위로 쓰이는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긴 단위에 해당하는 말이 ‘영겁(永劫)’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 그러니까 천지가 한 번 개벽했다가 다음에 개벽할 때까지의 까마득한 시간을 말한다. ‘겁(劫)’은 산스크리트어 ‘kalpa’의 한자 음역이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했다가 다시 개벽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으니 불경에서는 이를 ‘개자겁(芥子劫)’과 ‘불석겁(佛石劫)’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게자겁’은 둘레 사십 리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 놓았는데 하늘나라 사람이 100년에 한 알씩 겨자씨를 가지고 가서 모두 없어질 때를 말하며, ‘불석겁’은 둘레 사십 리 되는 바위를 잠자리날개보다 더 얇은 깃털로 3년마다 한 번 씩 스쳐서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게 겨우 1겁이다. 천지개벽은 하늘이 시작되었다가 우주가 꺼져 '허공'조차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시간 단위의 사건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성, 안주, 괴멸, 소멸을 포함하는 각 시기가 있는데, 이 시기들은 각각 20겁으로 되어 있어 네 단계를 일주하는 데에 80겁이 걸린다. 아마 이게 천지개벽에 해당하는 시간일 것이다.
현대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영)겁'은 빅뱅(Big Bang)의 시간 단위이다. 상상할 수 없는 밀도로 한 곳에 모여 있던 '존재/비존재(?)'가 폭발하고, 공간이 생겨나면서 팽창하고, 양성자ㆍ중성자ㆍ전자 등 '존재'가 생성되며, 그것들이 모여 헤아릴 수 없는 별과 은하가 생성되고 이것이 물질계를 구성하여 우주를 이룬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으므로 불교 세계관에서 보면 우주는 아직도 '괴멸' 단계의 겁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이해된 인류의 과학적 추측에 따르면 우주의 시간은 138억년 정도이다. 이 시간도 영겁에는 한참 멀었다.
겁의 시간은 '무한(無限)'에 해당한다. 장자는 무한을 '무외(無外)', 즉 '바깥이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시간을 어떻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봉우리에 오르지 못한 자가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 본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진대, 유한자가 무한자를 이해하는 일은 추측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장자는 하루살이가 밤낮을 모르고, 한 여름 살다 죽는 매미가 가을과 겨울을 모르는데, 8천년에 겨우 한 줄의 나이테를 만드는 어떤 나무를 모르는 인간이, 칠백 살 산 팽조라는 사람을 제일 오래 살았다고 칭송하고 있다며 혀를 찼다. 시인 네루다는 『질문의 책』에서 “하늘이 무너지면/ 새들은 어디서 날까?// 지구가 꺼지면/ 허공은 얼마나 깊어질까?/ 사람은 어디에 발 디디고 살지?”라고 물었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꺼진 후 허공의 시간’은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개념을 만들지만 이런 종류의 개념은 사람이 담을 수 있는 생각 너머에 있다. 비유조차도 그 너머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생명은 무생명에서 왔으나 무생명의 시간은 생명이 거느릴 수 있는 시간 너머에 있다.
‘찰나(刹那)’는 '겁'에 반대되는 시간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 소릿값을 딴 한자 번역어인데 원어는 ‘ksana’이다. ‘순간(瞬間)’이란 뜻이다. ‘순간’에 해당하는 개념은 동아시아에서는 한자어에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어 있다.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사이를 순식간(瞬息間)이라고 부른다. ‘순(瞬)’은 눈을 깜박인다는 뜻이고 ‘식(息)’은 숨을 한 번 들이쉬는 동안인데, 당나라 시인 두보는 자신의 글에서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얻고 잃는다’고 쓰기도 했다. ‘별안간(瞥眼間)’이란 말도 있다. ‘별(瞥)’은 언뜻 잠깐 스쳐 지나는 것을 뜻하고, 거기에 눈(眼)을 뜻하는 글자를 붙였으니, ‘별안간’은 언뜻 잠깐 눈 한 번 돌릴 사이 또는 눈 한 번 스칠 사이의 짧은 시간이라는 뜻이다. ‘삽시간(霎時間)’이란 말도 있다. ‘삽(霎)’은 이슬비를 뜻한다. ‘삽시간’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다고 할 때, 이슬 같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짧은 시간에 겉잡을 수 없이 일이 터지고 전개되는 걸 말한다. (박수밀, 『박수밀의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참조)
그러나 이런 말들조차도 '찰나'가 담고 있는 있는 본래 시간 개념을 제대로 지시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영겁이 무한대의 시간을 뜻한다면, 찰나는 그에 대응하는 무한소(無限小)의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무한소를 '무내(無內)' 즉 '내부가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오메가(omega) 같은 시계 명가에서 10000분의 1초 단위로 시침을 나눈 시계가 나오는 시대지만 이 개념에 도달하려면 턱도 없다.『대비대사론』에는 ‘가는 명주실 한 올을 젊은 사람 둘이서 양쪽 끝으로 당기면서 칼로 끊었더니, 명주실이 끊어지는 시간이 64찰나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명주실 끊어지는 순간의 64분의 1이 ‘찰나(1찰나)’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 사람이 그것을 느끼는 순간이 1찰나의 120배인 120찰나라고 하며,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사이(一彈指時)가 65찰나라는 말도 전해진다. (최기호,『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 참조) 이런 시간을 추측해 보기 위해서는 차라리 현대물리학의 시간을 참조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빅뱅을 다시 생각해 보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현재 시점에서 시간을 거슬러 갈 경우 무한대의 밀도와 온도로 우주가 정확히 한 점으로 축소되는 특이점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가 지금부터 138억 년 전인데 이 특이점을 현대물리학은 빅뱅으로 해석한다. 이 특이점으로부터 10의 -43제곱초 사이에 현대물리학으로도 아예 추측되지도 못하는 사건이 예비된다. 10의 -43제곱초에 중력이 다른 힘에서 분리되고, 10의 -36제곱초에서 10의 -32제곱초 무렵에 급팽창이 일어나며, 10의 -36제곱초에서 10의 -12제곱초 사이에 입자들이 상호작용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힘이었던 전자기력과 약력은 10의 -12제곱초 경에 두 힘으로 분리된다. 이 시기에는쿼크와 렙톤 등의 입자와 반입자가 마구 뒤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에 물질계의 온도는 1028도에서 1013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10의 -6제곱초 이후 대부분의 반물질이 물질과 상쇄되어 사라지고 우주에는 물질만이 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쿼크가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성되며 중성미자가 우주 공간에 자유롭게 방출된다. 3분 정도가 지나 이 입자들 사이에 핵융합이 일어나 20분 무렵까지 헬륨, 리튬 등의 가벼운 핵이 합성되었다. 7만 7천 년이 지나면 우주가 충분히 팽창하여 원자핵과 전자가 결합하여 가벼운 원자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질계' 즉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1억 5천만 년 정도 후 중력에 의해 최초의 별과 퀘이사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물리학회, 『물리학백과』)
여기에서 10의 -43제곱초 같은 개념이 바로 찰나다. 그러나 138억 년으로 추정되는 현행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특이점 직후부터 원자가 생성되기 시작한 7만 7천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조차 찰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신'의 영역인 그 우주드라마는 새로운 물리적 단계에 진입하는 매 순간이 10의 -몇 십 제곱초 같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뤄졌다. 찰나의 함의는 무한히 미소한 것이 담고 있는 우주적 무한성이다. 이전과 이후를 바꾸어 놓는 것,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특이점을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 사건은 찰나에서 순간에서 이루어진다. 찰나와 순간에서 연쇄적 시간의 고리들이 쏟아진다. 무한한 연기(緣起)적 계기들은 하나의 특이점, 찰나-순간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리고 시간의 자식들은 다시 무한한 계기들의 연쇄를 또 낳는다. 그것이 '세계'를 생성한다. 플라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엘레아의 현자 파르메니데스에게 '찰나-순간'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물질성으로 이해되었고, 이 모호성을 견디지 못한 그는 이 물질성을 일종에 공간성으로 규정했다. 그가 이 (공간적) 물질성에서 거세한 모호함은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의 본래 이름이 바로 '찰나-순간'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런 생각은 합리주의적 기풍을 지닌 그리스적 사고의 원형을 보여주는 면이 있으며, 그 자체가 그리스적 사고의 원류로서 이후 서양적 사유의 전통을 만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어에서는 시간을 뜻하는 두 종류의 표현이 있다.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전자는 '동안'을 뜻하는 '시간'에 가깝고, 후자는 어떤 특정한 '때'로서 '시각'에 가깝다. 전자는 시간의 경과를 뜻하며 수평적이고 물리적이다. 후자는 한 계기적 '순간'에 초점을 맞추며, 시간에서 수직적으로 관통하고 내포되는 심연과 사건의 잠재성을 본다. 그리스어에 침투한 히브리적 사고의 유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스어로 쓰인 성경에서 언급되는 '그 때'라는 이름의 시간성은 크로노스가 아니라 대부분 '카이로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가장 첨예하게 성경을 해석할 경우, 예컨대 벤야민 같은 철학자는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때'는, 메시아의 시간은, 죽은 후의 세계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영원을 담고 있는 '순간' ' 지금-현재'라는 카이로스적 찰나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공(空)으로 본 불교적 세계관은 순간에서 연기적 계기를 보며, 우주의 영고성쇠와 생명의 희노애락을 본다. 공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무한한 역동성이다. 인간의 삶이 이 안에 포함되지 않을 리 없다. ‘인생이 찰나처럼 지나간다’라는 말을 흔히 쓰거니와, 불교적 사유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 김만중의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도 이러한 시간관에서 나왔다. 연화도량에서 도를 닦던 성진이 양소유로 세상에 태어나 오욕칠정을 겪던 삶의 전생애가 실은 ‘찰나’였던 것이다. 시간의 변증법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의 주제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찰나에 깃든 영겁, 순간에 깃든 영원에 관한 성찰이라고 뒤집어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이 깨고 난 뒤에야 그것이 꿈임을 각성하지만, 꿈이 깨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꿈임을 알지 못하며, 꿈속의 생은 그것대로 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양소유에서 성진으로 다시 돌아와 꿈을 깬 연화도량의 수도자 성진이 ‘스승이 자신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해서 깨닫게 한 것이다’라고 스승에게 자기 '깨달음'을 얘기했더니, 오히려 스승이 ‘꿈’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꿈과 실재를 구분하려 하고, 아직도 꿈을 깨지 못했다고 제자를 혼내는 것이 아닌가. 이 소설에 녹아 있는 궁극적 철학은 ‘인생은 꿈이다’가 아니라, 꿈과 꿈밖-현실을 구분하는 관념의 이분법에 대한 일갈이다. 표면과 내부, 현상과 실재, 현세와 내세, 사바세계와 서방정토, 찰나와 영원을 구분하는 이분법.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배워야 할 기술(techne 예술)은 길다’고 했지만, 기술을 출현시키는 것이 순간의 체험이며, 그 인생을 내포하는 작업이 기술(예술)이다. ‘순간’은 짧지만, 시간의 평면에는 우주적 계기와 사물세계의 인연이 깃들어 있다.
양소유에게 인생의 오욕칠정을, 연화도량 승려 성진에게 현묘한 각성을 부여한 ‘찰나’는 도시인에게는 다른 방식의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한 편의 시를 통해 ‘찰나’가 지닌 현대성에 대한 암시를 다음과 같은 시적 예화로 보여준 바 있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喪服),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 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 장식 치마 자락을 살풋 들어 흔들며,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얼빠진 사람처럼 경련하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 줄기 번갯불…… 그리고는 어둠!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끝내’!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 샤를 삐에르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 황현산 역
도시를 걷는 일은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걷거나 농촌의 마을길을 걷는 일과는 다르다. 어제의 꽃과 새소리와 이웃들은 오늘도 내일도 보고 들을 수 있지만, 도시의 걷기는 군중의 대규모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흐름에 묻혀 그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는 까닭은 차량소리 때문이 아니라, 익명성과 일회성의 부딪힘으로 이루어진 군중의 거리, 바로 현대성의 무질서가 촉발하는 감각의 혼돈 때문이다. 도시의 이 정서적 과잉 상태에서 화자도 예외일 수 없다. 그 거리에서 “날씬한 여인”이 내 곁을 '잠깐' 스쳐 지나간다. ‘찰나’다. 그런데 나는 이 순간에 까마득한 허방을 경험한다. 이 순간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 줄기 번갯불”은 찰나의 시간인 동시에 찰나가 촉발한 감각적 경이의 강렬함을 표현하고 있다. 나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을 보았을 때, 두 시선은 서로 아주 짧은 시간 교차했을 것이며, 이 하늘은 그녀가 내 눈에서 본 세계일 수도 있을 터다. 아직 태풍이 되지 못하고 태풍을 예비한 이 하늘은 순간적 현재에 담긴 아직 오지 않은 시간(미래)이며, 찰나에 담긴 영원의 시간이다.
그러나 영원이 담긴 이 순간 뒤에 “그리고는 어둠!”이 찾아온다. 나를 살아 있게 한 그녀가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길 없는 “종적 없는 미인”이 되었으므로.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는 도시적 익명성과 일회성, 현대적 무질서는 어쩌면 “내가 사랑했을 그대”를 “어둠”으로 사라지게 한다.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곳에서나 가능할 재회는 “영원에서밖에” 가능하지 않은 내생(來生)의 소망으로 남는다. 번갯불의 번쩍임과 어둠의 아득함은 '순식간'에 교차된 만남과 이별의 드라마, 존재의 서사가 스민 찰나적 감각의 깊이를 표현한다. 이 찰나는 현대 도시인에게는 아득한 신비이자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의) 예민한 상처로 남는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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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 DMZ Creative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