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란 닿지 않는 것
미지와의 조우
시도는 멋졌다. 지방대 공과대학 4년을 마치고 잡지 MAXIM 의 에디터를 하겠다고 자소서를 내밀었던 그 시도는. 그 후 어쩌다 필기까지 합격을 해서, 생전 입어보지도 못한 남성브랜드의 옷을 한벌로 맞추고서 호텔 면접장으로 당차게 걸어갈 때까지는 꽤 멋졌단 말이다. 나는 열정페이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각오가 되있었으니까.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면접장에서 '저는 긴장하면 속으로 욕을 합니다' 라고 조언을 건내던 서울대 문창과 학생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또 류승범 머리를 한 키큰 홍대생이 가끔 파티 호스트를 한다고 자기를 소개하며 너무들 긴장하지 말라고 여럿을 독려했을 때. 앞 면접 순서의 유학파 출신의 미녀가 영어로 PT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때. 나는 내 세계의 우물이, 영화 [인셉션] 의 꿈이 부숴져내리는 한 장면처럼 산산히 조각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꿈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다는 것을 꽤나 현실적으로 체감한 것이다.
벌벌 떨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별다른 특징이 없던 나는 쓰디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나는 곧 전공을 살려 대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내었고 한 곳의 대기업으로는 탈락 통보를, 그리고 두 곳의 대기업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슬램덩크의 서태웅처럼 "가까워서" 라는 이유로 그 중 한 곳을 선택한지가 이제 5년 째.
될놈될 안될안
돌이켜보면 대기업 최종 면접 기회는 총 세번. 그 중 탈락한 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그룹사라는 S 그룹의 전자 계열이었다. 너무 붙고 싶은 욕망이 강했는지 면접장에서 쭈구리가 되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말을 했고, 간단한 영어 자기 소개도 버벅거렸으며 전공 면접에서는 아주 죽을 쒔다. 만약에 나를 붙여준다면, 그 동안 이 회사가 잘나갔던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게 의구심을 품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권유로(?) 그토록 합격을 원했던 회사에서 떨어져 취업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비워졌다. 그래서인지 이후 면접부터는 아주 터프해졌다. 일례로 전공 52학점에 교양 80학점을 들은 내게 면접관이 '왜 이런식으로 이수를 했냐' 고 물어보면, 그렇게 해도 졸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러면 전공에 대해 취약해지지 않겠냐' 고 물으면, 대학의 커리큘럼이 그렇게 진행 가능한 것은 교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도 많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얻은 것도 많다고 했다. 그 중 압권은 '당신의 전공으로 이 회사에서 뭘 할수 있냐' 고 물었을 때,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그 전공자를 모집한거 아니겠냐고 반문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가막힐 노릇이지만 그런 식으로 치룬 면접 두 곳에서 모두 합격했다. 될놈될 안될안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꿈은 언제나 미생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곳에 그토록 쉽게 자리를 얻고, 2년 동안은 군대에 재입대한 것 같은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역시 군대와 마찬가지로 견디고나니 열정페이라고는 차마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럴 듯한 봉급에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나는 잡지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으로부터, 그 때의 잡지사 합격자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함께 접하게 되었다.
나는 내 꿈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지만, 어쨌든 된장인지 똥인지 뭔가를 담은채로 살아가고 있다. 내 꿈을 대신 가져간 그들이 담으려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그 자리에 남기고 간 꿈은 누굴 위해 준비되있는걸까. 내가 담으려 했던 것들을 스쳐간, 그리고 또 다시 그 꿈과 조우하게 될 누군가를 상상한다는 것. 어쩌면 그런 미련이 다른 무엇보다 나의 취업에 수난을 안겨준 것이 아닐런지. 늘 꿈이라는 것은 닿지 않는 곳에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