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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womanB Jun 19. 2022

얘는 여자라서 오갈 데가 없는 거고

내가 일을 잘해도 여자라는 사실은 늘 잘못이다

 오랜만에 글을 쓴다. 꼰대들에 대한 분노와 울분으로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가던 신입은 이제 중고참이 되었다. 그 정도의 일, 그 정도의 사건은 그냥 친구들과 소맥 5잔에 털어버리고 허허 웃을 정도의 내성이 생겼다.


 나에게만 커피 심부름을 시켜도 이해했다. 여자라고 술자리에 데려가도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어르신들 여자랑 술 마시겠어 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 까다롭고 어려운 일만 맡기기에 그래 그래도 나를 인정하나 보다 하며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다 큰 사업을 하고 싶다고 자원을 했지만 나보다 후배인 남자 직원을 데려갈 때의 실망은 굉장했다. 그럼에도 '내가 여자라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 사람이 더 윗사람들 비위를 잘 맞출 거라 생각했나 보다' 라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퇴사자가 생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나를 가리키며 '얘는 여자라 오갈 데가 없어서 남아있는 거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얘는 다르죠. 얘는 그냥 여자라서 오갈 데가 없으니 눌러앉아 있는 거예요.


 경채로 들어온 남자 직원들이 적당히 경력을 쌓다가 퇴사를 하기에 시작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그럼에도 그는 공채로 경력 없이 들어온 직원들은 이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니 여기저기 들렀다가 마지막 정착지로 공무원을 하는 경채를 들이면 된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 속내는 부리기 쉬운 남자를 뽑고 싶은데 공채는 성별에 차별을 두고 떨어뜨릴 수 없는 구조인 반면 경채는 남자를 뽑아버리면 되는 구조이기에 경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늘 하던 말이 '공채로 채용하면 여자 들어와서 못써.' 였으니까.


 인사권을 쥐고 계신 분이 함께한 자리였기에 나는 그대로 넘기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듣고 있는 신입 공채 출신(나)이 서운하죠." 하고 웃으며 말하자 나의 말에 다들 '아이고 그러네. 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던 그가 급하게 내뱉은 말은 겨우 "얘는 다르죠. 얘는 그냥 여자라서 오갈 데가 없으니 눌러앉아 있는 거예요."였다. 얼마나 급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차라리 "공채로 신입이 000주무관 같은 사람 들어올 확률이 사실 낮다. 그래서 경채를 해서 좀 더 사회경험이 있어서 더 잘 버 가능성을 보자는 거다."라고 했으면 서로에게 얼마나 좋은 마무리였을까.


  내가 오갈 데가 없어서 그렇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고, 그렇게 주말을 반납하고, 그렇게 야근을 했을까. 나도 이 직장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고 사람은 더러워도 일이 좋아서,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계속 남아서 일하고 있는 것인데, 내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한 적이 없음에도 그의 시선에선 결국 여자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런 말들에 혼자 속앓이 하는 신입이 아니었다. 다시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나는 "이미 경채 후배들 몇몇 있지만, 경채라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어요. 사람의 차이지 채용의 차이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그는 또다시 성급하게 "얘는 그냥 지 공채 후배 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니까요."라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주변의 행정직들에게서 "그거야 당연하죠. 뭐가 문제죠?"라는 말을 시작으로 내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내 의견을 지지하는 말들이 나열되었다. "퇴사자가 많으면 업무 시스템을 개선해서 원인을 해결해줘야죠. 채용방식을 바꾸는 게 답이 아닌 것 같네요.", "주니어를 들여서 교육시키고 경력을 쌓게 해 시니어를 만드는 것이 공무원 채용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 원칙을 무시하게 되면 기술직은 계장 과장 전체 다 경력채용으로 전환해서 외부인사들만 들어오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세요?" 등의 발언 뒤 인사권자는 "그래서 내가 기술직 지켜주려고 경채 안된다니까 자꾸 저렇게 주장한다니까." 라며 마무리했고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자리의 대화가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알 수 없다. 그 자리에선 나의 의견에 동조했어도, 결국 속으로는 '윗사람에게 저렇게까지 이기려 드는 직원이 다 있나. 지독하다.'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잘해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퇴사를 해서 다른 곳에 가야만 여자를 한 명의 직원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윗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아무 말 없이 순종한다면, 나는 정말 오갈 데가 없는 사람이 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런 구조에서도 끝까지 일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곧 퇴직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동을 수십 년 듣고 지낸 또 다른 윗사람들은 남아있다. 나는 과연 여기 남아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 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정말 떠나는 것이 맞을까. 남아서 발버둥 친다면, 증명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떠난다면, 나의 일로서 내가 증명되는, 그렇게 나를 한 명의 직원으로서 인정해주는 곳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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