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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VN Solo Dec 29. 2019

공감의 시대, 관조의 힘을 생각하다

A Is Chuck  (1) 데보라 넬슨, 『터프 이너프(2019)』

           촛불 정치가 끝나고 광장은 둘로 나뉜 채 우리에게 어느 한 쪽에 서길 요구한다. 공감과 연대 그리고 개인주의가  모두 시대정신이 된 이 시점에 중심 잡기란 쉽지 않다.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이 화두였다면 올해는 페미니즘이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한  해였다. 젠더 감수성은 한국의 인권을 한 단계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많은 혼란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시대의 급류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개인을 잃지 않았던 여섯 명의  지식인이 있다. 스스로 세상과 다른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는 사람에게나, 혹은 세상의 목소리에 꼭 합류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나 이들의 사유를 따라가보는 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터프 이너프 @책세상

 시카고대학의  영문학 교수 데보라 넬슨은  책 서문에서 방향성을 명확히 한다. 이 책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른 20세기 여성 지식인  여섯  명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냉정과 비정, 유보와 절제가 차지할 공간을 만들어 낼 감동 연구에 경계선을 둘러치고자 한다.' (p.  32) 동시에 각개의 사유의 일부를 뽑아 통합하기보다는 하나하나의 사유에 집중해 보다 시대의 격류 속에서 그들의 삶과 사상이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를 조망한다.

 책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수난을 '천형'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종교적 보상을 바라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시몬 베유의 말은 그  시작부터 시작한다. 다이앤 아버스,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같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인물들은 물론이고 아직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메리 매카시나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한 조앤 디디온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동안 두각을 두드러냈던 여러 분야의 인물들은   감정 동기화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는 '감정의 전시를 아예 배제하거나 최소화하면서도 수난에 대해  진지하고 참여적이며 고통스럽게 다가가는 태도'(p. 28)로서 저자는 조앤 디디온의 개념을 빌려와 '터프함'이라고 부른다. 책의  제목 『터프 이너프』는 있는 그대로를 결연하게 직시한 이들을 가리킨다.


 여섯  명의 사상적 흐름, 그리고 그와 얽혀 있는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건조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논란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던 아렌트의 일화나 그런 아렌트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 죽는 날까지 선을  그었던 메리 매카시의 모습을 본다면 현실을 직시한다는 게 공사를 막론하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 아버스는 역경을 전혀  느껴본 적이 없는 과거를 "면제받는 느낌은 고통스러웠다"(p. 319)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든 연대를 배척하는 건 아니다. 아버스는 '공감을 거부하는 것이 관심과 리얼리티를 위한 공감을 열어준다'(p.  309)고 이해했으며 한나 아렌트는 개인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다. 조앤 디디온 역시 오랜 시간 부정적으로 여겼던 '자기 연민'에  관해 한층 누그러트린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데보라 넬슨은 그들이 거부하는 건 무분별한 감정의 파시즘이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진정한 존재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Atomistic Individualism: Anatomy of a Smear @Fee.org


   4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표지는 언뜻 학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명 한 명이 책 여러 권을 쓸 만큼 넓고 깊은 사고를  담았던 사람들이니 책이 조금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수전 손택의 말』, 『시녀 이야기』들을 번역했던 김선형 교수는 어려운 말을  배제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뉘앙스를 살려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데보라 넬슨이 한 번 인용하고 정리함으로써 수정된  원문에 또 새로운 의역을 가한다면 원저작의 사상이 아예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좋은 선택이었다.  무조건적인 공감과  합류를 강요하는 시대가 조금은 불편한 당신에게, 진정한 연대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당신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사랑‘에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저는 한 번도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노동계급도, 아니 이런 종류의 그 어떤 집단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친구들을 사랑하며 내가 알고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p. 130


 이 책에서 다룬 모든 여성처럼, 아버스는 공감을 거부하는 것이 관심과 리얼리티를 위한 공감을 열어준다고 이해했다. p.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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