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핑계 삼아 떠난 유럽여행_나헤라
오늘도 역시나 주변의 분주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날이 가면 갈수록 알람을 미리 맞출 필요가 없어지는 것 같다. 오늘도 역시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다들 일찍 나갈 채비를 하고 계신 듯하다.
나는 이미 가득 차 있는 샤워실을 핑계 삼아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일어나 보니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길을 떠나고 없었고, 8시가 다 되어서야 알베르게 문을 열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순례길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출발을 했다.
날씨는 꽤나 쌀쌀했고, 거리는 아직 어두컴컴했다. 대도시 로그로뇨는 새벽부터 출근하시는 사람들로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나는 바닥에 박혀있는 순례길 조개 모양을 따라 걷다가 날씨가 생각보다 많이 쌀쌀해 문이 열린 커피숍에 들려 카페라떼를 테이크아웃을 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순례길를 의미하는 화살표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앞에 공사가 한창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까미노 앱을 얼어 지도를 확인하니 정반대의 길로 걷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도시가 규모가 크다 보니 마을을 빠져나가는 방법이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져서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꽤 소요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큰 호수를 둘러싼 Grajer Park가 앞에 나타났다.
공원에는 많은 청설모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나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음식을 많이 나누어주다 보니 사람만 보면 다가오는 듯했다. 나는 가방에 가지고 있던 비스킷을 꺼내서 청설모에게 나누어주었다. 한국 청설모에 비해 몸집이 2배는 커서 살짝 무서웠지만 비스킷을 두 손 모아 열심히 갉아먹는 모습이 새삼 귀여웠다.
곧이어 눈앞에 드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매일 드 넓은 들판과 언덕만 보다가 잔잔한 호수의 풍경을 보니 새로운 풍경에 괜히 흥분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윤슬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호수 끝자락에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식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운영하고 있지 않아 아쉬웠다.
공원을 벗어나니 역시나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펼쳐진다. 오늘의 도착지인 나헤라로 가는 길을 가장 쉬운 길이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평야가 아닐까 싶다. 오늘도 역시나 나는 앞 뒤로 순례자분들이 보이지 않으면 목청껏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걸었다.
(분명 누군가는 한 번쯤은 들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괜히 쑥스러워진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종종 이전의 교회, 병원 등 건물의 터를 볼 수 있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QR코드를 찍어보면 예전 이 터에서 자리 잡았던 건물의 모습의 사진이 나온다. 순례길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 싶다.
어느덧 나바레테 마을에 도착했다. 언덕에 위치한 나바레테 마을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생각보다 거센 바람에 앞에 있는 바로 잠시 몸을 피신했다.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국식 아침식사를 판매하고 있었다. 가격은 비교적 비쌌지만 옆에서 다른 순례자들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주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구워진 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뭔가 기름진 게 필요했던 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뒤에 도착한 스코틀랜드 청년 게빈은 바로 옆에 성당에 다녀왔다며 내부가 매우 아름답다고 나에게 추천해 주었다. 식사를 끝낸 뒤 바로 옆 성당에 들어갔다. 순례길에서는 각 도시의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성당을 구경해 보았지만 금빛으로 감싸진 조각상들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종교가 따로 없지만 성당은 유럽에서 빠질 수 없는 문화이자 마을들마다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성당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마을에서 내려와 계속해서 드넓은 평야지대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저 멀리 단체로 모여있는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움직임이 거의 없어 빨랫줄에 걸어놓은 빨래인 것 같기도 하고 단체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인가 싶기도 했다. 가깝게 가보니 그들은 체험학습을 온 어린 친구들이었다. 마을 안내판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는 친구들한테 "올레"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몇몇 친구들은 "부엔 카미노"라고 외쳐주며 나의 인사에 반응해 주었다.
그나저나 분명히 카미노 앱에서는 [벤토사]라는 마을을 지나치지 않았는데 길에 적힌 화살표대로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벤토사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길을 잘못 왔나 싶었지만 그냥 안내판을 따라 걷기로 했다. 마을을 지나 조그마한 언덕을 넘은 뒤 다행히 올바른 까미노 길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질 때쯤 다행히 나헤라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은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듯했다. 나는 100유로를 환전도 할 겸 슈퍼마켓에 들어가 저녁에 먹을 장을 봤다. 순례길의 규모가 작은 마을에는 100, 50유로를 거절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큰 슈퍼마켓이 있을 때 미리미리 돈을 바꾸어놓는 게 좋다.
오늘 머무르는 공립알베르게는 원래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이었지만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이제 6유로를 지불해야만 이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알베르게보다 크고, 쾌적했던 것 같다. 특히 침대들이 많이 떨어져 있고, 개인 침대마다 콘센트가 달려있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씻을 준비를 하니 수건이 보이질 않았다. 수건케이스에는 장갑이 덩그러니 들어있다.
분명히 출발할 때 수건을 말리기 위해 가방에 걸어두었는데 그만 바람에 수건이 날아간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결국 여분으로 챙겨 온 땀 닦는 수건으로 샤워를 해결했다.
씻고 나오니 배가 출출했다. 로그로뇨에서 산 안성탕면을 꺼내 끓여 먹었다.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은 다음 수건을 파는 상점이 있을까 해서 YJ누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수건 파는 가게는 보이지 않았고, 저녁도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 슈퍼마켓에서 고기와 야채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주방은 저녁을 준비하는 외국인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내일 갈 숙소를 검색하면서 순서를 기다렸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주방이 여유로워졌다. 슈퍼마켓에서 산 2.8유로짜리 스테이크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한국보다 고깃값이 훨씬 싸다. 맛도 훌륭하다. 대부분 숙소에 도착해서 외식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예산도 아낄 겸 알베르게에서 직접 저녁을 만들어먹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나가야겠다.
저녁을 먹는 뒤에서는 SY형님이 사 오신 맥주를 둘러앉아 한 캔씩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이탈리아 청년 안드레아와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나이가 가장 어리기도 했고 항상 해맑은 모습에 한국인 분들에게 인기만점인 친구다.
"송!(외국인 친구들은 나를 송으로 불렀다) 한국사람들은 왜 이렇게 먹을 거를 나누어주는 거야?"
"그게 한국 스타일이야!"
"너무 고맙지만..... 우리 아빠도 이렇게 나를 챙겨주지 않아"
"우리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너무 고마워... 한국 사람들은 다 좋은 것 같아.."
너무 고맙지만 미안하다며 몰래 나중에 너희들 옷에 돈을 몰래 넣어둘 꺼라며 장난치는 안드레아와 대화를 하고 나니 힘들었던 오늘 하루가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오늘도 즐거운 대화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