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핑계 삼아 떠난 유럽여행_푸엔테 라 레이나(용서의 언덕)
"현아, 아침 먹어"
오랜만에 알람소리도 못 듣고 푹 잤다. 감사하게도 식탁에는 아침밥으로 김치볶음밥과 계란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자다 보니 정신없이 잤다는 변명으로 아침밥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했다. 덕분에 오늘은 사뿐하게 걸을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은 이틀 동안 같이 걸었던 동행 두 분과 헤어지게 되었다. 한 분은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고, 다른 한 분은 결국 순례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쉽고 끝까지 해보자라고 말해 줄 수 있지만 순례길에서는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해 주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응원을 보냈다.
그렇게 차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는데, 어제 같이 저녁을 먹은 형님 한 분이 전화가 왔다.
방금 길에서 루시오를 만났는데 어젯밤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새벽에 급히 응급실을 갔다가 결국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떠나기 전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루시오는 휴대폰이 없기 때문에 아침에 팜플로나 공립알베르게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전해 들어서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겨 공립알베르게로 향했다. 하지만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30분 정도를 기다렸지만 루시오를 만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길이 엇갈렸나 보다. 나는 오늘도 길을 떠나야 했기에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머무르는 동행분께 혹시 루시오를 만나면 연락부탁드리는 말을 남겨놓은 채 팜플로나를 떠났다.
오늘은 용서의 언덕으로 불리는 곳을 지나친다. 그곳이 왜 용서의 언덕으로 불리는지는 아직까지 나는 모른다. 그저 몇 안 되는 순례길 공식 포토존이며 다른 코스에 비해 가파른 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피레네 산맥을 넘어본 사람이자 미리 사놓은 물과 환타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여기 순례길에 와서는 탄산음료를 하루 한 캔씩은 의무적으로 마시고 있다. 탄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걷는 동안 탄산에 빠지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매일매일 5시간이 넘는 거리를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역시 팜플로나는 대도시라 그런지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도시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순례길 조개모양이 크게 찍혀있는 건물이 눈에 보였다. 이곳은 분명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장소일 거란 생각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Sello(도장)?"라고 바로 물어보는 직원분의 친절에 한층 들뜬 목소로 "Si(응)"라고 대답했다. 직원분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도 도장을 받을 수 있다며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건물을 나와 옆 건물에서도 도장을 받고 나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분이 영어로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너는 순례길 걷고 있어? 어디서부터 걸었어?"라는 질문에 "나는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걷는 중이야!"라고 대답해 주니 내 손을 잡으면서 멋지다며 산티아고까지 조심히 걸으라고 말해준 뒤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마을분들에게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순간들은 나도 모르게 힘이 더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 보니 길에 순례길 안내표지가 없어 살짝 헷갈려 좌우를 쳐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중년의 남성분이 그쪽은 순례길이 아니라며 반대편을 가리키면서 길을 알려주셨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렇게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는 소소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풍력발전기가 가까워질수록 용서의 언덕이랑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중간에 한국인 형님들도 다시 만나고 반려동물과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는 외국인 부부분들도 만나고 이름이 안드레야인 이탈리아 청년과도 친구를 맺었다.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계속 마주치면서 웃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순례길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이자 기쁨이 아닐 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먼저 나온 마을의 바에서 하몬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팜플로나에서 헤어졌던 동행분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루시오였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에 몸은 괜찮은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루시오는 평소에도 심장이 약한 편이었다며 지금은 다행히 괜찮아졌지만 앞으로 걷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내일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 루시오를 아는 친구들 모두 보고 싶다는 말로 고마웠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렇게 목소리라도 다행이다.
나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 나갔다. 생각보다 언덕은 가파르지 않아서 힘들지 않게 용서의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바람이 사람이 휘청거릴 만큼 쌔게 불어왔다. 바람이 쉬지 않게 불어왔지만 이곳 용서의 언덕에서는 인증샷은 무조건 남겨야 한다. 용서의 언덕에 같이 도착한 분들과 단체 사진도 찍고, 개인사진도 열심히 각자 찍어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신나게 놀았으니 내려갈 일만 남았다. 내려가는 길은 온통 자갈, 돌로 가득했다. 이 많은 돌들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 자갈들로 길에 빼곡하게 깔려있었다. 조금만 아차 하다가는 발목이 아작 나겠구나 싶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돌길을 내려오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걷고 있는 11월은 우기 시즌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이전까지는 날씨가 너무 좋아 우비를 꺼낼 일이 없었는데 빗줄기가 굵어져 결국 우비를 꺼내 입었다. 강풍과 합해져 빗줄기가 강해져 이러다가 내일 감기몸살 걸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목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걱정인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종합감기약을 먹어야겠다.
다행히 언덕을 내려오니 햇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배낭에 우비를 걸어놓고 열심히 길을 걸었다.
오늘 도착지인 푸엔테 데 레이나까지는 조그마한 마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걸으면서 느낀 점은 마을별로 주는 느낌이 조금씩은 다르다는 점이다. 마을마다 집, 성당, 안내소 등 건축양식도 다르고 바에서 파는 음식도 조금씩 달라 머무는 곳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드디어 마지막 마을인 OBANOS 마을을 지나서 푸엔테 데 레이나 공립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사뭇 놀랐다. 바로 2층침대에 거치대가 없었다. 나는 다행히 벽 쪽에 있는 침대에 배정받아 떨어질 가능성이 적었지만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침대는 양쪽으로 거치대가 없어 자칫하면 자다가 떨어지기 딱 좋은 침대였다. 이때까지 잤단 알베르게에 비해 조금 싼 이유가 있었다..
가끔씩 2층 침대에서 주무시다가 떨어져 병원에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벽에 딱 붙어 자야겠다.
아무래도 비수기 순례길은 문을 여는 알베르게가 한정적이다 보니 개인별로 머무는 마을만 같다면 길에서 만난 분들을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마주치고 발걸음이 맞게 되는 사람들과 무리가 형성되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오늘은 한국인 형님분들과 YJ누나(*이전에는 같이 길을 걸었던 한국인 분들을 동행분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앞으로 꾸준하게 나의 순례길 일기에 나오는 분들은 영어이름으로 부를 예정이다)와 함께 새롭게 사귄 안드레야와 숙소에서 만난 게빈이라는 친구와 함께 순례자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는 게빈은 나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해 주었다.
먼저 만난 한국사람분들에게 배웠다면서 나에게도 새로운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며 기분 좋게 나에게 다가와주었다. 왠지 이 친구랑은 더 많이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할로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순례자 식당에 도착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기분 좋게 와인도 한잔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에 들어와 내일 입을 옷을 미리 보관함에 빼놓은 다음 노트북을 켜 오늘 하루를 일기로 정리했다. 걸은지 5일 차가 되니깐 나만의 산티아고 생활패턴이 만들어지고 다행히도 걷는 거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내일도 신나게 걸어보자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