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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May 16. 2022

영화와 나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한 시간들

     

영화는 내게 매혹적인 대상이다. 모든 스토리에 끌리지만, 영상과 결합된 스토리인 영화는 배우들의 흡인력 있는 연기와 장면들에 몰입하게 만든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영화는 독서 행위 못지않게 긴 여운을 남기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때그때 흥행하는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를 찾아 비디오 대여점을 들락거리는 정도의 평균적인 영화 애호가였다. 그런 내가 이전에 봐 왔던 영화들과 결이 다른 특별한 영화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내 손을 이끌어 영화의 세계에 입문시켜 준 사람은 한 직장 동료였다. 직장 일과 살림, 육아, 시월드에 시달려 초주검에 가깝던 당시의 내가 흑백의 무성영화였다면, 솔로인 그녀는 영롱하게 빛나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 같았다. 그녀는 나 같은 아줌마에게는 입장이 불허된 특별한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문화생활을 하고 맛집, 카페, 술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밥풀이 묻은 빛바랜 티셔츠 차림에 부스스한 얼굴로 주방에서 세끼 밥을 차리거나, 시집에서 걸레를 빨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주말에 그녀는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패셔니스타이다.) 화려한 외출을 했던 것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면서 또 감정이 격해지려고 한다. 아무튼.

어느 해 가을날 직원 야유회를 갔다. 나는 그날 아침에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일로 남편과 싸우고 비참한 기분으로 허겁지겁 집을 나왔다. 직원들을 태운 버스가 떠난 직후에 출발 장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친목회 임원진이 탄 승용차를 얻어 타고 경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남산을 등반하고 삼릉숲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뒤 나는 그녀와 노송이 우거진 왕릉 옆을 걸으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렸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해가 2회째가 되는 해였다. 그녀는 영화제가 열린 지 얼마 안 되어 관람객이 적었다는 얘기, 영화제에서 본 국내외 감독과 배우들 얘기, 그리고 관람한 영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존재하는 줄 몰랐던 신비한 나라의 이야기를 들은 듯 금방 매료되었다. 그것은 유성처럼 빛을 내며 덩어리째 내게 육박해 왔다.      

나는 그렇게 해서 그다음 해, 3회째부터 빠지지 않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열혈 관객이 되었다. 남포동 비프 거리의 인파를 헤치고 부산극장과 국도극장, 맞은편의 대영극장을 드나들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예매해 둔 한두 편의 영화가 끝나자마자 한눈팔 겨를 없이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느긋하게 영화제 자체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과 친정엄마 얼굴이 어른거려서 극장을 나서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자갈치역 지하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내 나이 겨우 30대 초반이었다. 요즘의 30대 초반 여성들을 떠올려 보면, 나는 그때 애 엄마라고는 하지만 채 영글지 못한 어린 사람이었다. 결혼 전 이렇다 할 취미생활이나 여행도 못 해 보고 남들의 행렬을 따라 결혼식장에 서 있던 나.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삶을 즐긴다는 개념도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애 엄마가 된 후에 영화라는 세계에 눈떴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안타깝고 안쓰럽다. 나는 내 딸을 비롯한 요즘의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당연히’ 선택사항으로 여기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부럽다. 내가 젊었을 때와 달리 지금의 사회는 결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는 건 논외에 두고 말하자면 그렇다.      


영화제 초기에는 중국과 대만 영화를 주로 봤다. 차이밍량 감독은 초기 부산국제영화제의 스타 감독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덕을 가장 많이 본 감독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싶다. 3회째에 본 ‘하류’라는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그 무렵 커밍아웃을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의 영화 세계가 이해되었다. 차이밍량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페르소나였던 이강생과의 관계에 대해 그 직장 동료와 지레짐작을 하기도 했다. 훗날 감독이 이강생은 자신의 페르소나이고 특별한 사람이나 자신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서 그 짐작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퀴어영화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기에 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5분 만에 매진되곤 했다. 나는 저런 영화도 존재하는구나, 하고 새로운 눈을 뜬 느낌이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문법의 영화에 빠져들면서 영화의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본주의화되어가는 중국의 실상을 리얼하게 그린 지아장커 감독의 영화도 거의 빠짐없이 봤다. 그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핸드헬드 기법과 다큐에 가까운 형식으로 영화를 촬영했다. 동서냉전이 종식된 후 1990년대 들어 급속도로 자본주의화되면서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소외되어가는 지역과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중국의 모습이 영화에 담겼다. 중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가려진 아픔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는 이유로 그의 영화는 정부의 제재를 받아 중국 내 개봉을 못하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를 통해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 외에도 왕샤오슈아이, 로예 감독의 영화도 감상했다. 그들은 중국의 6세대 감독으로 불리며, 중국 영화의 새바람을 몰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영화는 제도권을 벗어난 것으로 이른바 ‘지하전영’으로 불리며 탄압을 받았다.

지앙원(姜文) 감독의 ‘귀신이 온다’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린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과 오버랩되었다. 오래 뇌리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어서 일기에 리뷰 비슷한 글을 쓰기도 했다.

배우 공리를 앞세운 영화를 여럿 만든 장이모우의 영화들은 앞서 말한 감독들의 영화에 비하면 블록버스터급이라 할 수 있다. 그는 5세대 감독의 대표 주자로 문화혁명 등 중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그려냈다.

그 무렵 중국어를 재미있게 배우고 있었던 터라 배우들의 중국어 발음이 매혹적으로 들렸다.

그 외에 그 무렵 주목받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도 여러 편 감상했다. 이란 영화들은 단순한 내용에 순박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었다.      


한국영화로는 1999년 4회 개막작이었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 “나 다시 돌아갈래.”하고 절규하는 첫 장면부터 강렬했다. 거꾸로 가는 기차와 멀어지는 철로의 장면이  챕터가 바뀔 때마다 삽입되는 방식이나, 역순행적 구성을 취해 주인공이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 근원을 찾아가는 방식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문학적이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같은 이창동의 소설을 읽은 적 있는 내게는, 그가 영화의 기술을 빌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쓴 것으로 보였다. 광주 민주화운동, 군사정부의 민주화운동 탄압, 경제부흥기, IMF 등 주인공의 삶은 현대사를 관통했다. 순수했던 사람이 역사의 채찍에 망가져 가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 가슴 서늘한 감동을 주었다.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면서 인간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점이 이창동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그 후 나는 그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띄엄띄엄 들려올 때마다 두근거리며 기다렸다가 영화관으로 향했으며, ‘초록물고기’부터 최근작까지 담은 DVD를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야외상영장을 집에서 가까운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꾸몄던 때는 온 가족이 담요며 방한복을 챙겨서 갔다. 요트경기장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간식을 파는 노점이 늘어서서 축제 분위기였다. 그 당시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 식전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럼블피쉬의 공연이 기억난다. 럼블피쉬의 보컬 최진이는 관객들이 반응이 없다고 하면서,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너무 진지하다고 말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지한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소극적인 리액션을 취해 주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야외 상영작은 내 취향보다 남편과 아이들도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로 고심해서 골랐다. 그중에 가족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영화로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비상식적인 혐한 발언으로 지금은 싫어하는 사람이다.)의 ‘키쿠지로의 여름’과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있다.


해마다 10월이 다가오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초조함도 따라온다.

언젠가부터 올해는 무리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정신 차려 보면 무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체력이 달려서 옛날처럼은 못해,라고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퇴근길에 영화의 전당에 들러 당일 영화 티켓을 구하고 있는 나를 본다.

부국제 기간이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나 소풍날과 겹칠 때 가장 기뻤다. 오전에 일과를 마치고 바로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으니까.

영화제 초기에는 교무실 전화로 ARS 예매를 했다. 그다음엔 학교 앞 부산은행 창구에서 티켓을 구입했다. 물론 예매 시작 며칠 전 부산은행에서 부국제 책자를 챙겨 와서는 상영시간표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해 가며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는 일이 선행되었다. 인기 있는 영화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몇 초 만에 매진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예매가 시작되는 시간에 수업이 없어야 가능했다. 오전 수업이 연달아 있기라도 하면 포기하고, 늦게라도 가서 차선으로 찜해 둔 영화표가 있는지 묻고, 그마저 없으면 차차선 영화를, 하는 식이었다. 그 후엔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다. 인터넷 예매는 간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공률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부국제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서울을 위시해서 전국에 걸쳐 존재하는 재빠른 손가락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동 센텀시티에 영화의 전당이 생기고 부국제를 주최하는 지자체가 중구에서 해운대구로 이전되면서 나는 영화의 전당이 집에서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쾌재를 불렀다. 인터넷 예매에 실패해도, 주말에 일찍 나가서 줄을 서서 현장 예매를 하거나 교환 부스에 나온 티켓을 샀다. 이제는 여유가 생겨서 예매가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괜찮은 영화는 곧 개봉을 하거나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해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취향과 상관없이 랜덤으로 걸린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선호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은 좀 더 높지만.

요즘은 딸이 예매한 영화를 같이 보는데 그 행복감이 지 않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서너 편의 영화를 예매해 놓은 뒤 통보해 준다. 딸이 예매한 영화를 볼 때는,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거나 재미가 없어도 좋았다고 말한다. 그래야 다음 해에도 같이 볼 수 있으니까.     


영화제에서는 개봉을 앞둔 대형 영화는 보지 않는다. 가능한 한 영화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려고 한다. 운이 좋으면 그런 데서 원석 같은 영화를 만난다. 요즘은 남미나 중동 같은 제3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 여성 감독들의 영화에서 기대 이상의 감동을 받곤 한다. 그렇게 세계 각국의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살아가는 모습에는 특수성, 고유성보다 보편성이 더 많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선진국으로 알려진 유럽 국가들에서도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결국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실감한 것처럼 우리가 겪는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라는 생각을,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도착한 영화들을 보면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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