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국화 May 16. 2022

2021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  
<거대한 자유>

보통 사람에게 가해진 시대의 폭력


   

오스트리아, 독일 / 감독 : 세바스티안 마이저 / 주연 : 프란츠 로고스키   

       

제목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처음과 마지막 몇 장면만 제외하고 영화 속 공간은 인간의 자유가 박탈된 감옥이다. 때는 2차 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1969년까지. 그 시기 한스는 동일한 죄명으로 몇 차례나 감옥을 들락거린다. 주인공 한스의 죄목은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감방 문에는 수감자가 위반한 법 조항을 의미하는 숫자가 붙어 있다. 한스의 감방문에 붙은 숫자는 175. 그 방의 주인이 동성애 금지 위반죄로 수감된 사실을 다른 죄수들에게 공표하는 셈이다. 


검색한 바에 의하면 나치 헌법 175조는 동성, 특히 남성 간의 애정행각을 비윤리적, 비사회적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이후 현재까지 독일에서 동성연애에 대한 법적, 사회적 차별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되고 있다고 한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체포된 동성연애자 10만 명 중 만 오천 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이른바 사회화 교육을 거친 뒤 거세 수술을 받거나 인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갔다고 한다. 

다른 죄수들로부터 호모라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한스는 의식적으로 무심하게 대응하려고 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그가 마지막으로 수감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시작되는데, 그 과정이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이라는 것을 배우의 익숙한 몸동작이 말해준다. 그에게 감옥은 집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인 것이다. 감옥이 집처럼 편하고 자유로울 리는 결코 없겠지만, 그에게는 좁은 감방이나 옷감을 재봉하는 작업실이나 빛 한 점 들지 않는 벌방마저 익숙해 보인다.      

그가 최초로 수감된 때는 나치 치하 말기이다. 앞서 말한 나치의 반인권적인 조치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시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단지 한스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감방 동료 빅토르의 얼굴에 떠오른 참담한 표정은 그때의 상황이 입에 올리기도 힘들 만큼 끔찍한 것이었음을 역설한다. 2차 대전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나서도 175조 헌법은 살아 있어서, 한스는 남은 형기를 채우기 위해 일반 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는 그 감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탈출을 계획하기도 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위태로운 사랑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하던 상대는 투신자살을 하고 만다. 인정사정없는 간수들은 절망으로 울부짖는 한스를 깜깜한 독방에 던져 넣는다. 그런 장면이 아니라도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우리가 늘 숨 쉬듯 누리는 자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큰 사랑의 상처를 지닌 한스가 마지막으로 수감됐을 때 만난 애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젊고 전도유망한 그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하고 자신이 죄를 덮어쓴다.



빅토르는 1945년 한스가 수용소에서 일반 감옥으로 이감됐을 때 만난 사람이다. 처음에 빅토르는 한스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고 그를 혐오하여 방에서 내쫓는다. 결국 한스와 한방을 쓰게 된 빅토르는 그의 팔에 새겨진 검은 숫자를 발견한다. 그것이 수용소의 흔적임을 보자마자 알아챈 빅토르는 흉물스러운 낙인과 같은 숫자들을 가리는 문신을 해준다. 빅토르는 아내의 외도 장면을 보고 살인을 저질러 수감된 종신수이다. 오랜 수감 생활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처신을 잘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감옥생활이 갑갑할 텐데도 그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요령 좋게도 감옥에서 마약을 하다가 중독에 빠진다. 세 번째 수감된 감옥에서 빅토르와 재회한 한스는 다시 그와 한방을 쓰면서 빅토르가 마약을 끊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스가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던 애인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진 둘의 관계는 신뢰로 다져진 우정에 가깝다.   


   

1969년 동성애가 합법화되면서 한스는 감옥을 나가게 된다. 

68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변하고 있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말을 기치로 내세운 68혁명은 기성세대가 만든 모든 권위에 저항했으며, 성, 인종,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 비판했다. 사회가 변화하고 동성애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면서, 그 사이 감옥 밖에는 게이클럽이 생겼다. 한스는 아마도 호기심에서 그곳을 찾아간다. 한스의 눈에 들어온 간판의 반짝이는 글자들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면서 관객의 눈앞에도 펼쳐진다. 클럽의 이름은 바로 ‘거대한 자유’이다. 그것은 신세계, 또는 어떤 파라다이스로 향하는 입구 같다. 관객은 한스를 따라 클럽의 내부로 들어선다. 내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바(bar)이다. 스테이지에서는 연주자들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자리를 잡은 한스는 흥미로운 듯 그곳을 관찰하며 술을 주문한다. 춤을 추는 사람들 틈에서 한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이가 있다. 그를 따라 지하 통로로 들어서는 한스의 눈앞에 별천지가 펼쳐진다. 한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중화장실에서, (감옥의 사소한 규칙을 고의로 어겨서 가는) 옥외 유치장에서 몰래 나누던 행위를,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치르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말 그대로 적나라한 몸짓들을 접한 한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한스가 충격과 경악에 이어서 곧 거대한 자유를 만끽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세먼지로 가득 찬 도시에 살던 사람이 피톤치드 풍부한 숲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듯이. 그러나 ‘거대한’ 자유를 대면한 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나를 비롯한 관객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클럽을 나온 한스는 조명이 밝혀진 보석상의 쇼윈도를 향해 돌을 던지고, 경보음이 울리는 동안 앉아서 여유 있게 담배를 피운다. 그에게 자유라는 것은 감당하기 두려울 만큼 거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유가 희박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자유가 생경해서 도리어 익숙한 부자유를 찾아 돌아가려 한 것일까.     


 

한스를 연기한 배우 프란츠 로고스키는 마스크부터 강렬하고 많은 말을 하는 것 같다. 한스의 성장 과정이나 가정환경, 직업 같은 세부 정보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기껏해야 10대 말, 20대 초부터 감옥생활을 시작해서, 풀려나고 재수감되는 걸 반복했으니 마땅한 직업이 있었을 리 없고, 시대가 인정하지 않았던 성 정체성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한스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다. 성실한 편이며 진실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따뜻한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부자유한 상태를 더 자유로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 자들과 제도가 악한 것이다. 역사와 시대가 행사한 폭력의 피해자로 산 그의 삶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