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표가 매진된 후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던 영화인데, 요행히 상영일을 이틀 앞두고 딸이 표를 구했다. 그런 까닭으로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영화제가 다가오면 책자에 소개된 줄거리를 읽고 어딘가 마음이 끌리는 영화를 선택한다.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면 일단 보증수표가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작품이면 언젠가 개봉할 공산이 크므로 당장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아니라면, 거기다 GV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냥 패스다. 그런데 줄거리에서 받았던 느낌이나 예상했던 내용이 일치하거나 상상을 뛰어넘어 훌륭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기대에서 영 어긋나거나 내가 생각했던 내용에서 한참 벗어난 영화도 있다. 내게는 이 영화가 그랬다.
짧은 영화 소개문을 읽고 무슨 이유에선지 이 영화의 톤이 가볍고 경쾌할 거라고 확신했다. 안 그래도 무거운 소재를 무겁고 진지하게 다루면 밸런스가 맞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나 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예상이 빗나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무거웠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소재, 그것도 노인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에 쇳덩어리를 매단 듯 무겁게 밀고 나갔다. 국가에서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 노인에게 죽음을 권하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모두 혼자였다. 이유가 있겠지만 자식이 있어도 늙은 부모를 찾지 않는다. 거기다가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여서 고령의 몸을 힘겹게 움직여 일을 한다. 얼마 안 가 그 일자리마저 해고로 잃게 되지만.
티브이에서는 ‘플랜 75’라는 정부 정책을 대놓고 홍보한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밝고 상냥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겉으로 상냥하고 친절한 일본인의 특성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홍보 방송에서나 죽음을 '권하는' 공무원들이나 아주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인들을 향해, 당신들은 더 이상 이 사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될 뿐이니 그만 이 사회에서 퇴장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죽음을 택하라, 하고 종용하고 옥죄는 것이다. 감독은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을 의도적으로 부각했다고 한다. 그건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보는 동안 불편하고 소름이 끼쳤다.
근미래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오는 집안에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으로 시작된다. 음악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고 마당에는 넘어진 휠체어의 바퀴가 헛돌아가고 있다. 팔에 피를 묻힌 청년의 불안한 얼굴이 보이고, 이어서 그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청년들은 취업도 안 되고 살기 힘든데, 세금을 축내고 일자리까지 빼앗으며 사회의 부담이 되는 노인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폐를 끼치는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 참 단순하고도 무서운 논리이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으니 이번에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감독은 ‘플랜 75’의 홍보 요원과 진행 요원, 그리고 신청자들의 마지막 행선지인, 안락사를 시행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친절함의 외피를 쓴 이들의 이면이, 직접 총을 발사해서 살인하는 행동과 다르지 않게 잔인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의 도입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초고령화로 경제가 악화되고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자, 국회에서 ‘플랜 75’라는 이름의 법을 통과시키면서 비롯된 일이다. 75세 이상의 국민 누구나 죽음을 국가에 신청하면 국가가 이를 시행해 준다는 게 그 법의 골자이다.
노인들은 하나같이 순응적이다.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제도에 저항하는 노인은 없다. 국가에 순응하는 민족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딱 한 번, ‘플랜 75’ 홍보 포스터에 오물을 투척하는 화면 밖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정책의 잔인함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장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플랜 75’를 신청한 주인공 가쿠타니에게 매일 15분간 전화 상담을 해 주는 젊은 여성이 있다. '플랜 75' 관련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이 고용 창출 효과까지 낳는다며 또 한 번 자화자찬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하루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가쿠타니의 친구가 되어 준다. 가쿠타니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준다. 문제가 많았던 첫 남편과의 결혼생활, 그리고 두 번째 남편과 좋았던 기억에 대해서 들려줄 때 그녀의 얼굴은 티 없이 맑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두 사람은 규칙을 어기고 밖에서 대면한다. 가쿠타니는 ‘플랜 75’ 신청자에게 지급되는 10만 엔을,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 그녀에게 쓰고 싶어 한다. 그녀는 노인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 볼링장으로 가쿠타니를 데려간다. 그리고 가쿠타니에게 볼링공을 잡는 법, 공을 던지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볼링핀을 모두 쓰러뜨린 가쿠타니에게 주변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게 축하해준다. 그의 얼굴이 아주 오랜만에 환해진다. 그 장면은 가쿠타니가 또래 노인들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는 유일한 장면이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아팠다.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에게 한발 다가가고 손 내미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가족도 없이 외로운 데다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노인. 그건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빈곤한 독거노인이 적지 않고 그들은 언제든지 고독사 할 가능성을 안고 산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이니 이런 극단적인 소재를 가지고 영화화하는 게 이상할 일이 아니다.
삶을 포기하기로 결단한 후 삶에 대한 한 줌의 미련까지 비워내어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쿠타니의 마음을 열게 해 준 젊은이. 그녀 덕에 가쿠타니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지만, 어쩌면 뒤늦게 삶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고개를 들었을 수도 있다. 행복은 별 게 아닌지 모른다. 근심을 잊고 밝게 웃을 수 있는 현재의 한순간이 행복이 아닐까.
콜센터의 젊은이는 가쿠타니와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 울먹인다. 그런 일일수록 감정을 배제해야 할 것인데 로봇이 아닌 이상 마음을 나누던 한 존재에게 예정된 죽음은 젊은 그에게도 상흔을 남겼을 것이다.
마지막 날 아침 눈을 뜬 가쿠타니는 손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춰 본다. 마지막으로 보는 아침 햇빛이라 특별하고 애틋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담담한 얼굴에 미련의 기미는 없다. 콜센터 젊은이는 가쿠타니의 결정을 되돌리게 할 생각이었는지 다급하게 통화를 시도하지만 이미 전화선을 빼놓은 뒤다.
죽음을 맞는 절차는 간소하다. 그것은 마치 입원한 병원에서 간단한 처치를 받는 것 같다. 가쿠타니는 마리아의 안내에 따라 울렁거리는 증상을 막는 알약을 받아 삼킨다. 죽음의 과정을 돕고 사후 유품 정리를 하는 외국인 노동자 마리아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같이 보인다. 마리아에게는 심장병을 앓는 딸이 있다. 딸을 살리려면 노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돕는 이 일을 해야만 한다. 가쿠타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평생 해온 습관대로 조력자인 마리아에게 예의를 지킨다. 이제 누워서 주사약이 들어가고 잠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때 바로 옆 침상의 노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그녀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 길로 병원에서 나온 가쿠타니는 떠오르는 해를 향해 서 있다. 늘 보던 하늘이고 태양이고 세상인데, 죽음의 문전에서 되돌아 나온 그에게 풍경은 특별한 것이 된다. 새벽 여명은 삶은 눈부신 거라고, 아무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해하고 빼앗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는 요양병원 침상에 1년이 넘도록 외롭게 누워계신 엄마의 고통을 대면하면서 계속 늙음과 죽음,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생각한다. 노년의 풍경의 잔인함을 항상 무겁게 어깨에 지고 있다. 나 또한 노년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짐짝처럼 비인간적으로 취급되면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인간의 존엄을 잃는 순간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중년의 소피 마르소가 출연한 영화 <다 잘 될 거야>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인간의 존엄을 잃었다고 생각한 노인이 딸들에게 안락사를 부탁하고 결국 그 의지를 관철한다. 그에게는 죽음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기에 선택부터 실행의 순간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존엄한 죽음에 대한 평소의 상념은 점점 멀리 달아났다. 나는 무서웠다. 추상적이었던 죽음은 영화에서 아무 의미도 부여받지 않은 날것의 죽음이었다. 그런 죽음은 너무 차갑고 비정했다.
모든 유기체는 태어나서 죽는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 만물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미리 공포심을 갖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하고 두려워한다. 연로한 가쿠타니의 주변에서 죽음은 별스럽지 않고 흔한 것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가위로 자르듯 끝내는 죽음의 과정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교감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차가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 한다. 삶의 모습이 어땠는지가 죽음의 모습을 좌우한다. 결국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삶을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청년이든 노인이든 삶의 존엄과 가치의 무게는 같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은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오르는 햇살이 가만히 알려준다. 가쿠타니와 관객을 위무하듯이.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의도가 깔린 이 영화는 내게 공포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드러난 현상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