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명랑한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오래 잊고 살았다.
이번 여행에서 새로 알게 된 나는 무구했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한 점의 죄책감도 부끄러움도 없이 놀이에 열중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
혼자 있을 때 나는 자주 내 나이를 의미하는 숫자를 의식한다. 늘 그렇지만 믿기지 않는 숫자다. 어떨 때는 아직 오지도 않은 나이를 당겨서 불러오기까지 한다. 그런 일과 별개로 내 안에는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그저 있다. 그 아이를 굳이 불러내는 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주책이니 사람들 보기 전에 어서 들어가라고 그 아이의 정수리를 누르고 또 누르곤 했다.
내 안에 살고 있던, 죄를 모르는 아이, 천진하고 밝은 아이를 후배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찾아내었다. 나는 어느새 나이를 잊고 있었다.
퇴직 후 3년이 지났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내는 기쁨도 잠시, 내 안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모든 일은 양면이 있다. 직장생활 역시 그렇다. 남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는 일치고 쉬운 일은 없다고 하지 않나. 일의 고충이 많으나 아주 가끔 작은 보람이랄지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싫든 좋든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낸다. 적당한 소음 속에서. 확실히 외로움을 느낄 새는 없다. 내가 내 스케줄을 짤 필요가 없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 나서는 나 자신이 감독관이 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과 내면까지 감시하고 참견해 왔다.
작년 연말쯤이었다. 올해 2월 명퇴를 앞둔 대학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대뜸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행이라니. 책 속에만 존재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았다.
후배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껏 들떠 있었다. 가능하다면 세계의 끝까지 갈 기세였다. 34년간의 직장생활에 대한 한풀이를 하겠다는 듯. 퇴직 4년 차에 접어든 나는 그가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 심드렁한 자신에게 조금 놀라고 있었다. 여행이라니. 여행이라는 단어에서는 아무 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래도 되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가 먼저 떠올랐고,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일들이 그다음으로 떠올랐다. 날개를 단 듯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후배의 어조에 이끌려 나는 거절도, 수락도 아닌 상태로 어정쩡하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계약금을 보낸 뒤로는 가야 하나 보다,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할 수 없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일찌감치 후배의 여행 제안 사실을 알렸던 친구는 내게 가벼운 마음으로 잘 갔다 오라고 했다. 실컷 수다 떨고 좋은 경치 보고 오라고. 여행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족에게 말하고 마지막으로 동생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그날이 되었다.
나는 어느새 독일 국적기의 비좁은 이코노미석에 후배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탈리아 패키지여행이었다.
우유부단한 나와 달리 후배는 오래 생각지 않고 어디 가까운 카페에서 만날까, 하는 어조로 말했다.
언니, 어디 갈래? 이탈리아 갈까?
그리고는 그다음 날 이탈리아 패키지 상품 두어 개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나는 결정을 못 내리고 미적거렸다. 그 사이에 후배는 퇴직 기념으로 동료 교사들과 일본 여행을 갔고, 그제야 나는 후배가 보내준 상품 목록을 열어 비교해 보았다. 몇 개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고민하다가, 기내식이 맛없기로 유명한 항공사에, 직항이 아니라 경유를 해야 하지만, 일정에 소도시가 포함되어 있는(그 말은 일정이 더 빡세다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상품이 어떻겠냐고 카톡을 보냈다. 후배는 이번에도 오래 생각지 않고 그게 좋겠다고 답을 해왔다.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 보험에, 전용 버스로 이동까지 책임져 주고, 미리 공부해가지 않아도 버스 좌석에 편히 앉아서 여행지에 대한 가이드의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장점을 생각하면 턱없이 저렴한 비용이었다. 그것만으로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로망은 물론 자유여행이다. 한 지역에서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르고 우연을 지향하며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무엇보다 여행과 일상을 병행할 수 있는 여유로운 진짜 여행. 시간과 비용이 충분하고 거기에 영어 구사까지 된다면 당연히 자유여행을 택했겠지. 그러나 자유여행만이 여행이랴. 이제 막 퇴직을 하고 자유에 대한 꿈에 부푼 후배와 하는 첫 여행으로 가성비 면에서 손색이 없었다.
예전에 했던 여행과 다르게 여행지에 대해 검색해 본다든가 도서관에서 관련 도서를 대출해 보겠다든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장마철 물기를 머금은 공기처럼 무거운 일상에서 벗어나 8박 9일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이라는 세계에 잠시 몸을 담갔다가 온다는 생각이었다.
여행에 대해서는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후배와 하는 첫 번째 여행이라는 데 대해서는 달랐다. 사실 조금 설렜다. 출발하기 한참 전부터 그와의 여행이 편안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여행 내내 어긋나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분명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인연을 맺은 건 오래전 일이나 실제로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짧지 않은 시간과 각자가 살아온 삶을 단번에 뛰어넘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맞았다. 우리는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 끼여 앉은 채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을 퍼내고 있었다.
부산에서 6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던 때부터 그가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보았기에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패키지여행을 하면서 분위기 메이커에다가 친화력 갑인 그의 성정을 새롭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행 내내 그는 학생으로 치면 교탁 바로 앞자리에서 교사와 눈을 맞추며 열심히 호응하는 모범생이자, 수업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 교사와 학생 모두를 유쾌하게 만드는 오락부장 역할을 했다. 나도 그의 덕분에 처음으로 여행 일정 동안 가이드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으며,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 때면 대답과 개그로 호응해 주는 그의 옆에서 소극적인 호응이라도 할 수 있었다. 비록 가이드가 마이크를 든 지 10분 이내에 잠드는 때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후배는 식사 시간이 되면 랜덤으로 앉은 테이블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어색함을 깨고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어떨 때는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아까 그건 아무래도 TMI 같아, 하고 말해줬다. 그 말이 기분 나빴을 수 있는데도 후배는 흔쾌히, 내가 좀 그래, 하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각각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배려하고 맞춰줬다. 덕분에 동행인 나도 덩달아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많이들 하는 말이 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이번 여행은 그 말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흔치는 않으나 결이 비슷해서 끌리는 사람이 있다. 그 끌림은 시간이 가면서 퇴색하여 내 애초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하면, 처음 느낌이 끝까지 가는 때도 있다.
이번 여행의 파트너인 후배도 그런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후배도 내게 같은 말을 했다. 이렇게 잘 맞다니, 연신 감탄하면서. 여행 파트너가 되면서 친구를 하나 더 얻은 느낌이다.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잠든 버스 안에서, 바티칸 박물관 입장을 위해 한 시간 넘게 대기하던 줄 가운데서, 길을 걷거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 팀 중에는 아무래도 부부가 가장 많았는데 아무리 금슬이 좋은 부부도 우리만큼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시차와 빡빡한 여행 일정도 우리의 수다를 막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서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지기 직전까지 말을 해댔다. 말의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안에 대한 생각, 취향과 취미, 사회와 정치를 보는 시각에서 일치점을 확인했다. 하다못해 똑같은 종이신문을 구독한다는 것까지 일치했다.
심지어 후배는 여행할 때마다 예외 없이 겪었던 장(腸) 트러블이 없다고 신기해했다. 화장실 걱정을 잊은 최초의 여행이라고, 언니가 너무 편한가 보다며 재미있어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마지막에 수줍게 말했다. 다음에 또 다른 여행을 같이하자고.
주변머리 없고 부정적인 나를 좋게 봐준 후배가 고맙다. 후배는 내가 아닌 누구에게도 좋을 사람이다. 이번 여행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좋은 사람들로 봐줬다면 그건 후배 공이 크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친절하며, 어색함을 무너뜨리고 편하게 다가가며,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을 다해 호응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그라는 사람이다.
일종의 강박증이 있는 나는 아침에 호텔 방을 나설 때마다 잊은 물건이 없나 살피느라 후배를 기다리게 했다. 후배는 처음에는, 뭐가 없어? 하고 같이 긴장하다가 나중에는, 아냐, 어디 들어 있을 거야, 하고 심드렁하게 대응하곤 했다. 속으로는 뭐야, 또? 지겨워,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여행 일정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무사히 출국장을 나섰다. 별일 없이 여행을 끝내는구나, 하고 방심하던 차에, 경유지로 가는 비행기에서 안경을 잃어버렸다. 나는 물건을 잃어버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여행 막바지에 나 때문에 마음을 쓰게 했다는 생각에 후배에게 미안했다. 내내 좋았던 관계도 어떤 사건 사고를 만나 어긋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나를 배려해 주었다. 긴긴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서 헤어진 뒤 후배와 나는 여전히 카톡을 주고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