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는 이제 너무 흔하다. 효를 이야기하는 일은 우리 대에서 끝났다. 이제 너도나도 부모를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족이란 지긋지긋하고 벗어나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마지막에는 돌아가게 되는 어떤 지점인가. 내가 본 많은 스토리를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부모는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족 이야기의 함정이다. 그러나 부모도 그런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부모도 자녀를 선택할 수 없다. 어떤 이가 내 자식이 되는가는 많은 부분 운에 달렸다. 물론 나머지 많은 부분은 유전자를 전해준 부모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텐데, 자식은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개체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한 패널의 말에 무릎을 쳤다.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로서 지원은 하되 그냥 남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라고도 했다. 그렇다. 자식은 내 유전자를 일부 가지고 있어도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나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부모의 어떤 부분을 닮기는 했지만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고유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해 왔다. 부모에게 어쩔 수 없이 의존해야 하는 성장기에 그들은 부모를 싫어하고 부모와 갈등하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부모의 그늘에서 산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탈출하듯 독립을 꿈꾼다. 당연한 일이다. 부모라는는 디딤돌을 밟고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려 한다. 덧붙이자면 자식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하듯 부모도 성인이 된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독립적인 성향의 큰아이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산다. 그래서 걱정을 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살가운 딸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는 애저녁에 접었다. 그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제 소신대로 비혼주의에 아이도 낳지 않겠다고 하는 데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이 없다. 그 아이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때로 부럽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자신의 행복을 챙기는 일을 1순위로 여긴다. 좋아하는 일은 빠뜨리지 않고 한다. 그는 스스로 K 장녀로서의 부담을 느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살갑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어느 때는 부모를 떠나 독립해 있는 상황을 즐기는구나, 하는 심증이 확실해도 속으로만 서운함을 느낄 뿐 그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 데는 나도 그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맞벌이하면서 친정엄마에게 상당 부분 아이들 양육을 빚졌다. 첫아이이다 보니 부모로서 무지한 탓에 많이 서투른 부모였다. 지금 와 생각하면 사느라 바빠서 사랑도 충분히 주지 못한 것 같고 표현도 충분히 해주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 없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는 법이니, 살갑고 표현을 많이 하는 딸들에게는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키운 엄마가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나에게는 절대적인 고통이었지만 그걸 숨기지 않고 아이에게 알게 모르게 짐을 나눠 지게 했다는 거다. (변명이 아니라 돌아보면 나의 엄마도 내게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이 그만큼 팍팍했고, 고통을 토로할 데 없이 참고 사는 것을 능사로 알았기 때문이다. ) 부모가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이들을 위해 억지로 연기를 할 수는 없으나 한쪽 부모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건 자제했어야 했다. 변명하자면 아이가 머리가 큰 이후라 이해받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나이가 몇 살이든 아이는 아이일 뿐인데 그에게 혼란을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에서는 명은의 오빠가 엄마에게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걸로 나온다. 엄마는 그에게 크고 작은 고충과 남편이나 외가 식구들에 대한 불만을 조심성 없이 풀어놓는다. 그러나 겉으로 착하고 의젓한 장남인 그도 친구들 앞에서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열세 살짜리 아이일 뿐이다. 딱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에게는 첫째 아이가 사실 이상으로 커 보인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딸에게는 그런 일들이 큰 짐이 되어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일은 예민한 아들에게도 낙인처럼 남아 상처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이 감사하다. 상처는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겠지만, 그들도 이제는 이런 흠 많은 부모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소화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문제없는 가정은 없을 것이다. 영화 속 명은은 말 그대로 깜찍한 아이다. 계속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명은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가 진 짐의 무게가 전해져 왔다. 그는 부모가 싫고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다. 직업도 친구들에게 내세울 만한 게 못 되는 데다가, 게으르고 무책임한 아빠와 돈 얘기만 하는 교양 없는 엄마가 싫다. 새 학년이 되어 새 담임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명은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시작하게 했다. 명은은 반장 선거에 나가서 당선될 만큼 진취적이고 리더십이 있으며 성실한 노력형 인간이다. 글짓기대회 준비를 위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제 관련 책을 쌓아놓고 읽는다. 과제가 주어지면 자기 주도적으로 철저한 자료 준비를 하는 것이다. 명은이 부끄러워하는 가족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명은만을 보면 그는 어디서 뭘 하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다. 단, 명은이 쌓아 올린 거짓말의 해악은 명은 자신을 향했다. 그것은 세계를 왜곡해서 보게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젠틀한 할아버지, 그리고 명은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삼촌이 명은은 좋다. 대상으로 선정된 글 속에서도 부모나 오빠에 대한 묘사와 달리 그 두 사람에 대한 평은 후하다. 그러나 그들은 엄마 말대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이다. 반면 피가 섞인 사이인 할아버지와 삼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명은과 부모 사이와 비슷한 풍경이 연출된다. 가족으로 엮인 사람들은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서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알고 있고 그래서 툭하면 상처를 건드리기 일쑤다. 명은에게 젠틀한 할아버지도 할머니 생전에 할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명은의 아버지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면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서로에게 각자가 가진 바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서로의 단점과 추한 지점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관계.
영화를 보다가 명은의 부모 편에서 그들을 변호하고 싶어졌다. 어른도 아이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몇 배 더 살기 힘들다. 사람마다 아픔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다. 명은의 엄마에게 그것은 돈이다. 그는 부모에게서 금전적인 도움을 받은 적이 없고 오히려 부모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동생을 부양해 오다시피 했다. 남편은 게으르고 무능해서, 이른 새벽에 가게를 열고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그녀 몫이다. 자기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가정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악착같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 앞에서도 ‘돈, 돈’ 소리를 입에 달게 되고, 티브이를 보다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ARS 전화를 걸려는 명은을 제지하며,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기꾼이라고 한다.
명은의 아버지는 게으르고 무능해도 사람 자체는 좋아 보인다. 자기 방식으로 자식들을 사랑한다. 생활력이 강한 아내가 한 발 앞서 뭐든 하다 보니 천성적인 게으름에 무기력한 습관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새벽에 일하러 나간 아내 대신 아이들 밥을 차려 주고, 명은이 싫어하는 젓갈 반찬을 넣어주기는 해도 아이들 도시락 싸주는 일 정도는 한다.
각박한 대화를 나누지만 명은의 부모는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명은이 동경하는 안락한 스위트 홈과 거리가 멀지 몰라도, 다른 부모들처럼 세련되고 고상한 부모는 아니어도 그 정도면 그렇게 문제 가정이랄 것도 없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시장에서 열심히 젓갈을 팔아 돈을 벌고, 자식들을 가슴 깊이 사랑하는 부모이다. 그렇지 않은 가정도 적지 않다는 걸 알기에는 명은이 아직 어린 나이일 뿐.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어릴 때 한 번쯤 자기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부모의 말에 환상을 품기도 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 부모가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고 어딘가 자신이 그려온 부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위안 삼는 것이다.
문제없는 가정은 없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것. 명은이 어른이 되면 알게 될 진실이다.
전학 온 혜진이라는 친구가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읽는 사람의 감동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상까지 타는 것을 보고, 명은은 그때까지의 글쓰기 방법(철저한 자료 준비로 그럴듯해 보이는 글을 쓰는 일)을 버리고 가족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 단번에 써 내려간 그 글을 명은은 시청에 보낸다. 시에서 주최하는 글짓기대회에는 이미 학교를 통해 다른 글을 응모한 바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보낸 글이 대상으로 선정된다. 그러나 그 글이 지역 신문에 공개됐을 때 가족이 받게 될 상처 때문에 고민하던 명은은 대상 수상을 포기한다. 앞서 보낸 글로 입선 수상을 하게 된 시상식 날, 가출한 이후 머물던 할아버지 집으로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귀가하던 명은은 갈 데가 있다며 환한 얼굴로 달려간다. 예상대로 목적지는 부모의 가게가 있는 시장이다. 비록 입선에 불과하지만 수상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대상은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던 부모였다.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명은의 얼굴에 비로소 아이다운 미소가 피어난다.
이 영화가 좋았던 점 가운데 하나는 교사들이 나쁘지 않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왜 교실과 교사가 나오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는 건지. 걱정이 무색하게 5학년 담임, 6학년 담임, 교장선생님까지 모두 좋은 선생님들이었다. 명은이 좋은 어른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1년 동안 명은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한바탕 지독한 열병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한번 크게 아프고 나면 훌쩍 큰다. 한 학년이 올라간 명은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한결 당당하고 성숙해진 모습이다.
새 담임선생님은, 나는 너희들의 가정환경을 알고 싶지 않다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너희들이라고 말한다. 정신의 키가 몇 뼘은 자랐을 명은은 이제 가정환경조사서 부모 직업란에 ‘젓갈 가게’라고 힘주어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너희 자신에 대해 알려달라 하는 담임선생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명은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리고 가정환경조사서 뒷면에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한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열심히 글짓기를 할 때처럼 신이 나서 색연필을 바꿔 가며 꾹꾹 눌러쓴다.
그의 지난했던 성장통이 그를 아픔을 아는 멋진 어른으로 키웠을 거라 믿는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