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도, 삶도 혼돈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딸의 방에 꽂혀 있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가져와 읽은 지는 좀 되었다. 문장이 다소 장황한 면이 있지만 한 가지를 파고드는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삶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한 사람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에게서 그 답을 알아낼 것 같은 순간 그에 대한 믿음은 배반당한다.
저자가 자기 삶에 해답을 줄 거라 기대했던 사람의 최고 미덕은 낙천성과 의지였다. 운명의 폭풍우가 삶을 송두리째 쓰러뜨려도 절망하지 않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 저자에게는 그런 삶의 태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결여된 특성이니까. 모든 과오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과 기쁨을 쉬 허락하지 않는다. 우울을 평생의 벗처럼 지니고 산다.
저자 룰루 밀러의 반대편의 극단에 있는 사람이 바로 어류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그는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다. 그의 삶의 목록에 회의와 후회라는 건 없다. 오로지 앞으로 전진할 뿐. 분명 그의 미덕도 많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운명에 맞서는 태도. 집착에 가까운 집중력을 가지고 평생 한 가지 일에 헌신하는 태도. 그러나 그걸 뒤집으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 합리화도 마다하지 않으며, 신념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위험신호는 그가 학자로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뿐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성공 가도로 진입하던 때부터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기 사람들로 자리를 채우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며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는 이의 독살에 관여하게 된다.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의 부정을 덮기 위해 고발자의 성정체성을 무기로 협박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물고기 표본을 얻기 위해 강물에 독을 풀기도 한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이루려는 성취지향형 인간이 그라는 사람이다. 더 나쁜 것은 그러고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귀를 막고 앞만 바라봤다는 점이다.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가 몇 번의 거대한 좌절을 맛보고도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은 반성하고 성찰하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닐까.
다원발생설에 바탕을 둔 인종 차별론자인 스승 루이 아가시에 이어 그도 우생학을 신봉했다는 데 이르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념이 인류에게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역사의 몇몇 장면들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는 히틀러와 다를 게 없었다. 수없이 많은 ‘부적합자’들이 그의 판단에 따라 강제적인 불임 수술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반기를 드는 수많은 학자의 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저자 룰루 밀러는 독자인 내가 느낀 것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의 배반감과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종국에는 다른 이의 삶을 모델로 하는 일의 무용함과 위험성에 대해 깨달았을 것이다. 삶이 버거울 때가 아니라도 우리는 자주 자기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삶의 모델로 삼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더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 모델이 훌륭한 삶을 살고 인격까지 훌륭하다면 아주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세상은 어쩌면 소심해서 자책을 달고 사는, 지나치게 양심적인 이들이 있어서 그래도 살 만한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반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엔트로피 법칙을 무시하고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데이비드의 신념이 결국은 틀렸다는 사실이 과학계에서 판명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데이비드는 끝까지 다윈에 반대했던 스승 루이 아가시와는 달리 다윈의 학설을 믿었다. 다윈은 모든 것을 열어 놓았다. 그는 자연에 불변의 경계선이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의 좌절을 거쳐 물속 생물을 분류하는 일에 몰두하고 명성을 얻을수록, 복잡다기한 특성을 가진 생물을 단순하게 분류하고 명명하는 일에 대한 데이비드의 신념은 아집에 가까운 형태로 굳어져 갔다.
한때 다윈의 학설에 고개를 끄덕였던 데이비드는 이후 스승 루이 아가시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나무 맨 위에 인간이 있다고 보았다. 계층적 사다리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하등한 종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게으르거나 안 좋은 특성을 보이는 종은 점점 퇴화한다고 믿었다. 그 신념의 종착지는 우생학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지속하게 해주는 요인으로 ‘변이’를 들었다. 다윈이 연구를 거듭하면서 자연 앞에서 겸손함을 배운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다양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걸고 한 일이 사실은 무의미한 일이었음을 확인한 뒤 저자는 깨닫는다. 자연이 혼돈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모든 종은 고유하고 복잡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퍼즐 조각처럼 단순하게 자연의 사다리의 일부로 분류될 수 없다.
자연에는 경계선이 없다. 유동적이며 들고 난다.
데이비드와 같은 과학자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불과 일곱 살 먹은 딸의 질문에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주의 시공간은 광활하고 ‘나’라는 존재는 해변의 모래알 하나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괴로워 죽을 것 같고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고, 인생이 헤쳐가야 할 숙제 더미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그 말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이. 그러나 세상에서 고작 일곱 해를 보낸 아이에게 그 말은 더없이 냉정하고 막막한 답이었을 것이다. 일곱 살 소녀에게는 그보다 더 달콤한 말을 들려주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말. 인생은 경이로운 것이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너다움을 찾아가는 거라는 말. 그리고 데이비드가 그랬던 것처럼 설사 고난이 주어져도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보상을 얻게 될 거라는 말.
그러나 저자의 아버지는 이성적인 과학자였고, 어린 딸에게조차 어떤 포장도 조심성도 없이 객관적인 사실을 들려주었다. 먼지 같고 무의미한 삶이기에 그 자신은 호수에 몸을 던져 넣듯 죄책감 없이 삶의 순간을 즐겼다. 그는 좌절이 쌓여 우울 속에 침잠한 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은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이다. 이 문장은 저자의 아버지와 데이비드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공통으로 든 문장이다. 모든 생명 안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물고기가, 민들레가 그렇듯이 인간도 그렇다.
가정환경과 기질 때문에 우울한 성장기를 보낸 저자는 대학에 가서 선물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녀와 곱슬머리 남자는 연인이자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정서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와 함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남자친구이자 동거인을 너무 믿은 나머지 하지 않아도 될(!) 고백을 하는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른다. 두 번째가 더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그 뒤 이어지는 결말을 생각하면 실수가 아니라 꼭 거쳐야 할 과정일 수 있다. ) 남자친구는 냉정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저자는 한동안 그가 돌아올 거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매달린다.
그런 고통 한가운데서 그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의 삶의 방식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이가 구명선을 발견한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 룰루 밀러는 자연이 혼돈이라는 사실에 이어 삶 또한 혼돈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일곱 살 때는 냉정하게만 들렸던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 그러니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삶을 즐길 것. 그것이 아버지의 삶의 모토였다. 아버지의 그 말은 언니의 크고 작은 좌절을 옆에서 지켜보던 우울한 기질의 아이에게 너무나 막막하게 받아들여졌고 이후로도 한동안 그랬다. 그리고 데이비드라는 인물에 의존했다가 실망한 뒤 갑자기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의 삶에 끼어든 뒤의 일이다.
저자는 곱슬머리 남자를 만나 난생처음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걸 절대적 기준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그를 자기 삶의 혼돈 속에서 찾은 질서라고 믿어버린 결과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붙잡고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일은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낙천성의 방패’를 들고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과거의 끈을 놓지 못하고 회한과 자책에 빠진 저자를 본다면 시간을 허비한다며 경멸의 말을 들려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렇듯 삶도 혼돈 속에 있다. 곱슬머리 남자와의 이별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간이 가고 우연히 일곱 살 연하의 재기 발랄한 여자친구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녀.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사실도 몰랐고, 그전까지는 그 존재도 몰랐던 그녀를 사랑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이제 그녀라는 존재가 삶의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절망과 마찬가지로 희망도 혼돈 속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녀가 혼돈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동안의 방황이 스르르 막을 내린다. 150년 전쯤 존재했던 한 특이한 남자에게서 찾으려고 애썼던 해답을 놓치는 대신 그녀는 삶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263p)
(덧붙여...)
요즘 ‘종 평등’이라는 개념이 화제가 되고 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보고 대상화하던 것에서, 똑같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생명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에 따라 동물에게만 사용되던 용어도 평등한 용어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불법 포획되어 좁은 수족관에 감금된 채 쇼에 동원되었던 돌고래의 방류가 떠오르고, 최근 판다 가족을 자식이나 손녀같이 끔찍하게 돌보는 사육사의 영상이 국내외에서 반향이 컸던 일도 떠오른다. 다윈과 데이비드가 이런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 보게 된다.